신라 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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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142호 | ||
경주 서악동 고분군 慶州 西岳洞 古墳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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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 |
면적 | 37\,299㎡ | |
지정연도 | 1964년 8월 29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 |
위치 |
<colbgcolor=#4a2d5b> 서악동 고분군의 전경[출처][2] |
1. 개요
파일:서악동 고분군.jpg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하는 신라 중고기의 왕묘역. 1963년 8월 29일에 사적 제 142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엔 서악리 고분군이었지만, 2011년에 서악동 고분군으로 변경되었다.
2. 내용
중고기(6세기 이후) 이전까지는 잘 알려진 대릉원을 비롯한 경주 시내의 대형 신라 고분들이 신라의 왕묘역이었다. 이후 6세기에 접어들어 대릉원 인근 대신 서악동 일원에서 대형 왕묘를 연속하여 축조했다.대릉원에서 본 서악동 고분군의 원경. 무덤의 규모 때문에 거리가 좀 있지만 식별가능하다.
서악동 고분군이 시내에서 비교적 거리가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렇지, 1~4호분의 규모는 지름 40~60 m 내외로 거의 황남대총의 크기에 필적하는 규모라 주요 인사의 무덤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3] 역사고고학적으로는 무열왕을 비롯하여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의 무덤으로 서악동이 거론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의 무덤의 위치에 대한 기록[4]으로 인해서 사적으로 "ㅇㅇ왕릉"으로 지정된 것은 지금의 서악동 고분군이 아니라 서악동 고분군의 북서쪽에 있는 충효동 고분군[5]의 대형분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비정되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이 실제 진흥왕과 진지왕의 능이 아니라 서악동 고분군의 대형분이 진흥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 때부터 제기되었다.
비록 서악동 고분군이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지 신라왕릉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적석목곽묘를 채용하는 대릉원 고분군 → 서악동 고분군/선덕여왕릉 → 괘릉과 같은 난간석이 설치된 단독 왕릉의 형태로의 변화가 인정받는다. 이러한 추정에는 여러가지 단초가 있는데, 무열왕릉의 존재, 적석목곽묘에서 석실로의 변화, 호석에서 난간석으로의 변화, 입지의 변화 등이 주요한 근거이다.
- 무열왕릉
무열왕릉은 지금의 무열왕릉의 인근에서 비석과 귀부가 발견되면서 무열왕릉으로 인정받았으며 그로 인해서 무열왕릉의 뒤로 위치하는 서악동 1~4호분의 묘주 논의도 개진될 수 있었다.
- 적석목곽묘에서 석실로의 변화
적석목곽묘는 신라의 전통적인 왕족급의 묘제로써 4세기부터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해서 5세기에는 완연한 왕족, 지방 귀족의 무덤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6세기부터는 한반도의 고분문화의 전개가 그렇듯이 석실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적석목곽묘가 내부는 목곽을 사용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함몰되고, 무덤 봉분의 정상 부분이 함몰되어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서악동 고분군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찍이 석실을 채용하는 6세기 무덤임을 추론하기에 충분하였다. 비교적 비학술적인 추정일 수도 있지만, 전자기파 분석으로 석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적석목곽묘가 아닌 석실을 채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대릉원 고분군에 후행하는 왕묘역으로 추정한다.
- 호석에서 난간석으로의 변화
봉분과 지표면의 경계에 돌을 둘러싸 무덤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봉분의 지지력을 확보하는 기능을 하는 호석을 설치하는 신라 고분의 특징이 있다. 이는 역시 적석목곽묘 단계에서 확인되는 현상이다. 반면 난간석 등의 시설로 봉분의 지지력을 확보하는 무덤들은 표본적인 발굴결과 대부분 석실이었기 때문에 호석 → 난간석으로 변화는 일찍이 인정되었다. 무열왕릉을 살펴보면 지금도 무덤의 아래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들이 삐져나왔다. 난간석 및 갑석을 설치할 때에 갑석의 사이사이에 기둥이 되는 돌을 박는데, 무열왕릉에서 모종의 갑석과 난간석 등의 시설을 했던 흔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입지의 변화
신라왕릉에서 줄줄이 열상배치(列狀排置)된 왕묘역은 배동 삼릉과 이곳 서악동 고분군뿐으로 매우 드문 방식이다.[6] 대릉원도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배치의 순서가 있지만 있다고한들 비교적 조잡한 편이다. 반면에 이러한 열상배치는 일반적으로 세습적인 왕권의 형성, 새로이 일신된 왕권의 정당화 표출 등 정치적 함의가 있따고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추정되는 서악동 고분군의 연대(年代)나 배치상 변화 등으로 대릉원 조영이 중단된 이후의 것으로 보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악동 고분군이 대릉원 고분군(4~6세기), 서악동 고분군/선덕여왕릉(6~7세기), 단독입지의 하대 신라 왕릉으로의 큰 변화를 상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정황 속에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다소 뜬금없게도 그 출발은 황남대총이었다. 정식으로 발굴되었고 유물이 풍부하여 무덤의 시간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의심의 여지 없는 신라왕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대릉원에는 왕릉급의 무덤이 인교동 119호, 전 미추왕릉, 황남대총, 봉황대 고분, 서봉황대 고분이라는 빼박 왕릉이 있기 때문에 발굴된 황남대총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특정한 왕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고로 대릉원에 들어가지 않는 왕들부터 순서대로 서악동 고분군의 묘주에 연결시켜 보기 때문에, 6세기 왕릉을 논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황남대총의 묘주가 누구인가 여부는 꽤나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서악동 고분군의 묘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데, 주로 거론되는 후보는 고분군 아래쪽에 있고 확실히 밝혀진 무열왕릉을 기준으로 하여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왕, 문성왕, 헌안왕 등이 있다. 상술한 무덤들의 일렬의 배치와 관한 설명처럼 대부분 무열왕의 직계 혈족일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열왕릉의 바로 위에 있는 서악동 4호분은 학계 다수에서는 법흥왕의 왕릉[7]으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이자 왕으로 추존된 김용춘(문흥대왕)까지도 거론되기도 한다. 지증왕의 무덤이 서악동 고분군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2.1. 배총
<colbgcolor=#4a2d5b> 김양과 김인문의 무덤으로 추정[출처] |
서악동 고분군에는 배총(配塚)이 존재하는데 바로 김인문묘(경상북도 시도기념물 32호)와 김양묘(경상북도 시도기념물 33호)이다.
배총이라는 것은 얼핏 순장하고도 비슷한 개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주인공의 부속 정도로 격이 낮은 개념은 아니고 섬겼던 왕의 곁에 묻힐 자격이 있다는 의미의 영예다. 고구려나 중국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었고 대릉원에 위치하는 중소형의 무덤들이 바로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데 다만 의미상에서의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릉원의 경우는 왕릉 옆의 작은 무덤들이라고 할지라도 왕족의 무덤으로 가족묘의 양상이라면 배총은 가족 말고 중요한 신하들이 묻히는 것으로 당대에는 가문의 명예 정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사실 배총의 개념이 확실한 경우가 바로 당 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과 그 아래의 평지에 수km에 걸쳐 펼쳐진 근신자들의 무덤에 대한 것이다.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배총으로 묻힐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일찍이 하여 해당 신하가 사망할 경우 해당 문중의 의중을 물어 황제의 무덤 아래에 묻힐지를 정하기도 하였다.
서악동 고분군 아래의 중형 무덤 2기에 대해서는 김인문이나 김양이라는 구체적 추정이 가능할 만큼의 사료가 있다보니 배총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며, 나아가 배총이라는 개념이 적용된 고분군으로써 당나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신라가 당대의 황제묘의 양상을 어느 정도 적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서악동 고분군과 김유신묘에 대해서도 다소 논의가 있는데, 바로 배총 중의 하나가 김유신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김유신묘는 난간석이 설치된 무덤으로써 신라왕릉의 역사고고학적인 전개 과정 상 늦은 형태이기도 하며 왕릉급의 무덤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간석의 변화 등을 추론할 때 지금의 김유신묘는 김유신의 무덤이 아니라 신라 왕들 가운데 한명의 무덤이며 따라서 서악동 고분군 아래의 2기의 배총 가운데 하나가 실제 김유신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9]
2.2. 배총군
서악동의 배후 산지인 선도산의 남서사면에는 충효동 고분군이 넓게 펼쳐져 있다. 약 6개 남짓한 군집으로 나뉘는데 총 수량은 300여 기에 달한다. 그 밖에도 남쪽으로는 장산이라는 작은 산지가 있는데 그곳에도 서악동 장산 토우총, 서악동 석침총[10] 등을 포함한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이 배총군에 해당하는 고분군은 비교적 발굴조사를 하였기에 이를 바탕으로 서악동 고분군의 성격을 역 추적하기도 한다. 충효동 고분군이나 서악동 장산 고분군 모두 신라의 석실 고분군이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2] 숲 속에 둘러싸인 무덤이 무열왕릉이며 뒤로부터는 서악동 4호, 3호, 2호, 1호이다. 무열왕릉의 앞쪽의 두 무덤은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3] 왕릉급으로 보기도 하지만, 왕족이나 귀족들 무덤일 수도 있어서 확신할 순 없다. 애초에 무덤이 크다고 무조건 왕이 묻히는건 아니며, 신라 전성기 왕이 오히려 작은 무덤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있다. 무덤 크기도 시기마다 달라지기 때문. 무열왕릉 항목 등 참고.[4] 모두 애공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애공사와 관련된 곳이 바로 서악동 일대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5] 서악동 고분군의 배후 산지에는 무덤 300여 기가 모인 고분군이 있다.[6] 배동 삼릉은 시대차가 수백년은 나는 하대의 돌방무덤이라 서로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낮다.[7] 지금의 법흥왕릉은 조선 영조대에 김씨 문중에서 비정한 것이다.[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9] 하지만 김유신도 기록상 사후엔 신하 신분으로 묻혔다가 하대에 뒤늦게 신라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이 때 하대 왕릉 스타일로 고쳤다는 주장도 있다.[10] 토우총과 석침총 모두 일제강점기에 조사되었다. 일본인들은 항상 특징적인 조사내용을 네이밍할 때 적용하였다. 토우총은 토우(土偶: 흙으로 빚은 사람 모양 토제품)가 출토되어서, 석침총은 석침(石枕: 돌베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대릉원을 조사할 때도 철검만 딸랑 나와서 검총이라하거나 금관이 나와서 금관총, 식리가 나와서 식리총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