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19:54:34

봉황대


1. 경상북도 경주시의 봉황대2.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황대3. 경상남도 의령군의 봉황대

1. 경상북도 경주시의 봉황대

신라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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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동노서.jpg
봉황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구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구역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급 대형 무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고분으로, 한반도에 있는 역사시대 무덤들 중에서도 가장 큰 편이다.[1] 위치는 대릉원 북쪽 길 맞은편 노동리 고분군에 있으며, 금관총 바로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왕릉 중 제일 크기로 유명한 곳은 황남대총이고 실제로 황남대총이 전체 크기는 더 크긴 한데, 황남대총은 무덤 2기가 합쳐진 형태라 단일 봉분으로는 봉황대가 좀 더 크다.

경주 왕릉 중에서 특이하게 무덤 봉분 위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무덤 위에 거대한 나무가 있는 신라왕릉이라고 하면 경주에 갔던 사람들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경우가 많을 듯하다. 다만 이 느티나무가 오히려 봉황대 발굴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도 아이러니.

아직 발굴조사를 한 적이 없다. 봉분위 느티나무도 문제지만 무덤 내부의 나무 받침 구조상 발굴시 구조 훼손을 피하기 어렵다고 밝혀져 발굴하지 않았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도 금관으로 대표되는 발굴조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도굴이 상당히 어려워 손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고, 후대에는 이곳을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굴 시도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대한 크기로 미뤄볼 때 왕이나 고위 귀족급의 고분이 분명하고, 도굴 되었을 가능성도 낮아 발굴하면 금관과 여러 유물이 출토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사람 한 명의 무덤이라기엔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 큰 크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여기를 무덤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풍수지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인공 언덕(조산造山)으로 착각했을 정도였다.[2] 그래서 김수흥의 남정록, 박종의 동경유록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경주 여행기에서 봉황대는 항상 전망대로 등장한다(...) 당장 봉황대의 대()란 한자가 태종대신선대 등 지명에서 나타나듯 주변을 관망할 수 있는 고지대의 넓고 평평한 반석을 의미한다. 즉 무덤에 붙일 만한 이름이 아니다. 사실 지금이야 잡다한 나무를 제거하고 잔디를 깔끔하게 벌초해놔서 무덤 봉분처럼 보이지만, 일제강점기흑백사진을 보면 죽은 나무가 무성하게 헝클어져 있어 더욱 언덕에 가깝게 보였다.

물론 봉황대란 이름은 신라 당대에 쓰인 이름은 아니고,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무덤인 줄 알았다면 전망대로 여기거나 이런 이름을 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선비된 자로서 도리가 아니니…[3] 다만 추사 김정희는 무장사지에 답사를 갔다가, 봉황대를 보고는 조산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고분일 것이라 추측하였다.

파일:tumulis_chronicle.jpg
대릉원 및 경주 일대의 신라 왕릉의 형성 과정 추론도[4]

일정한 위세품 부장량을 갖춘, 흔히 수장층으로 표현되는 왕족급의 최상위 계층의 등장의 지표가되는 무덤이 가장 빨리 형성된 곳은 지금의 경주 팔우정 로타리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빠지는 구 월성로 일대였다. 형성시점은 대략 4세기 중~후반으로 다양한 위세품이 출토되지만, 대릉원처럼 도드라지는 무덤이 없으므로 중앙집권적 왕권국가로의 형성 이전 단계의 왕묘역으로 추정되는 구역이기도 하다.

월성로 고분군 다음으로 형성된 곳이 대릉원 일대의 초대형 고총들이 즐비한 구역이다. 아직도 여전히 경주 일대의 왕릉에 대한 개별 왕릉 비정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그 문제의 중심에 있는 황남대총 남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눌지 마립간 또는 실성 마립간, 내물 마립간으로 양분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만[5], 그래도 눌지 마립간의 무덤이란 쪽으로 의견이 더 많이 모였다. 그러한 바 내물 마립간의 경우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첨성대 남쪽에 무덤이 있다는 기록을 취신하여 내물왕의 무덤은 인교동 119호분으로 보기도 한다.

연대를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는 유적과 고분을 바탕으로 할 때, 신라 능원 형성과정은 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인교동 119호분부터 초대형분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연이어 전 미추왕릉[6]을 거쳐 황남대총이 형성되고 연이어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의 봉황대, 서봉황대 고분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황남대총의 묘주의 문제에 따라서 위 도면의 A냐 B냐에 대한 이견이 있다.

실제로 노동동, 노서동에서는 발굴된 대릉원에서는 작지만 신라 전체로 볼 때 대형분이 의외로 많은데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 서봉총, 호우총, 은령총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발굴된 각 유물들의 편년을 보면 전반적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의 점진적 형성 과정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7]

이를 바탕으로 봉황대 고분의 묘주를 대략적으로 추정하자면 500년 전후, 자비 마립간부터 지증왕 사이쯤의 왕이나 왕족급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고, 대릉원 고분군이 조영이 끝나고 그 다음 순서로 형성되는 신라 왕묘역인 서악동 고분군진흥왕 이후의 왕들이 묻힌 것이 어느 정도 추정되는 것도 이를 순환논리로 뒷받침한다.

첨성대와 함께 2020 세계유산축전 행사 장소로 선정되었다.

2.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황대

김해 시가지에 있는 금관가야시기 사람들의 주거지와 생활물품이 많이 출토된 유적지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의 일부분이다. 원래는 바로 옆에 있던 사적 2호 패총과 따로였는데 2003년에 사적 2호에 포함됐다.

3. 경상남도 의령군의 봉황대

여기 봉황대는 위와 같은 유적지가 아니라 계곡 위 기암괴석에 붙은 이름이다. 봉황이 날개를 편 듯 보이는 바위.
[1] 전라남도의 몇몇 전방후원분이 옆으로 길이가 더 긴 곳은 있지만 봉분 높이는 봉황대가 몇 배로 높다.[2] 이러한 인공 언덕을 조산(造山) 또는 가산(假山)이라고 부른다. 한국 경복궁은 북쪽에 산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중국 베이징은 주변에 산이 없는 지형이기 때문에 자금성 북쪽에 풍수지리적 균형을 맞추는 조산인 경산공원을 일부러 만들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1398년(정종 즉위년) 종묘 앞에 조산을 만들었고, 우리나라 각지에도 과거 풍수지리적 이유로 만든 조산들이 남아 있다. 과거에 조산을 종종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다.[3] 조선 말기의 보빙사들이 이집트 피라미드를 방문했을 때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묘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 남의 무덤, 그것도 왕의 무덤을 밟고 올라갈 수 있느냐고 되물은 적이 있었을 정도다.[4] 일부 고분들은 생략되어 있다. 대릉원 문서에서 고분군 단락의 도면을 참고하면 좋다.[5] 북분 한정으로 자비 마립간이라는 견해도 있긴 하다.[6] 순서대로 본다면 전 미추왕릉은 실성마립간이 되어야 하겠으나... 실성의 행적을 본다면 저렇게 큰 무덤을 해주었겠느냐는 문제도 있다.[7] 다만 어디까지나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며, 이를 비판하자면 당장 천마총만 하더라도 5세기 말에서 6세기로 추정하고 있는데다가 지증왕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위의 순서도 여느 썰 중 하나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