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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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 |
수량/면적 | 1기 |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
건축시기 |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 | |
소유 | 분황사 | |
관리 | 분황사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ⅱ)[1], (ⅲ)[2] | }}} |
<colbgcolor=#4a2d5b>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9층으로 가정하여 제작한 복원도 |
1. 개요
芬皇寺對黃龍寺 분황사가 황룡사와 마주해 있어
千載遺基草自新 천년 묵은 옛터에 풀만 무성히 자랐구나.
白塔亭亭如喚客 흰 탑은 우뚝 서서 나그네를 부르는 듯하고
靑山點點已愁人 띄엄띄엄 푸른 산은 사람을 시름케 한다.
無僧能解前三語 전삼(前三)[3]이란 말을 알아들을 중들은 없고
有物空餘丈六身 부질없이 장륙 부처의 몸만 남아 있구나.
始信閭閻半佛宇 여염집의 절반은 절이었음을 비로소 믿겠네
法興何代似姚秦 법흥왕의 어느 대가 요진(姚秦)과 같았으려나.[4]
서거정의 경주12영 가운데 '분황폐사(芬皇廢寺)'
千載遺基草自新 천년 묵은 옛터에 풀만 무성히 자랐구나.
白塔亭亭如喚客 흰 탑은 우뚝 서서 나그네를 부르는 듯하고
靑山點點已愁人 띄엄띄엄 푸른 산은 사람을 시름케 한다.
無僧能解前三語 전삼(前三)[3]이란 말을 알아들을 중들은 없고
有物空餘丈六身 부질없이 장륙 부처의 몸만 남아 있구나.
始信閭閻半佛宇 여염집의 절반은 절이었음을 비로소 믿겠네
法興何代似姚秦 법흥왕의 어느 대가 요진(姚秦)과 같았으려나.[4]
서거정의 경주12영 가운데 '분황폐사(芬皇廢寺)'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현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사에 건립된 모전석탑.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5]
2. 내용
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현재 높이 : 9.3m.
추정 최대높이 : 41.6m(7층설), 48.5m(9층설).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이 정식 명칭이다. 전돌(塼塔)을 모방하였으므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도 부른다. 분황사 창건 때 같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탑의 비율이나 다른 전탑들의 형태를 봐서는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을 구층탑이라고 기록한 사료가 많아 대략 9층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이 탑은 돌을 전탑을 흉내내서 돌을 네모나게 깎아 벽돌 모양을 내서 만든 석탑이다. 즉, 생긴 것과는 다르게 벽돌로 쌓은 전탑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기록으로 봐서는 1층만 남기고 무너졌다가 다시 쌓았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니 신라시대에 쌓은 형태는 지금과는 좀 다를 가능성도 있다.
수리 전의 모전석탑. | 수리 후. |
구한말을 거치면서 나무들이 자라는 등 탑의 상태가 더욱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이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그 과정에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함 안에는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되었다. 이 때 무너진 탑을 수습하면서 3층에 지붕 형상을 만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3. 특징
3.1. 한국 모전석탑의 원류
석탑과 모전석탑의 양식 차이.사진 출처 : 신라 모전석탑의 두가지 양식
일반석탑의 옥개석, 전탑계모전석탑의 옥개석, 석탑계모전석탑의 옥개석 전탑과의 양식 비교.사진 출처 : 상동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으로, 이후 만들어지는 신라계 모전석탑 양식의 원류가 된다. 아래는 분황사 모전석탑에 영향을 받아 건축된 후 현재까지 현존하고 있는 한국계 모전석탑 중 일부의 모습이다.
칠곡 송림사 전탑과 영양 현2동 모전석탑.
영양군 삼지동 모전석탑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정선 수마노 모전석탑
경상북도 지역의 전탑과 모전탑 리스트.출처 : 상동
3.2. 사자상
분황사 모전석탑 주변에 세워져있는 사자상 중 하나.사진 출처 : [스크랩] 신라의 사자상과 분황사 모전석탑 돌사자
탑의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석재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으로, 탑신(塔身) 밑은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분황사 모전석탑과 동시기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는 서면 남북 모서리에 수사자상 각 한 마리씩과 동면 남북 모서리에 암사자상 각 한 마리씩 총 4마리가 사방을 지키고 있으나 원래는 두 마리가 더 있어 총 여섯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 현재 나머지 두 마리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정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분황사 사자상 중 1점.
2마리의 사자상을 박물관 쪽으로 빼돌린 주체는 일제로, 원래 1915년 이전까지는 기단 위에 총 6마리의 석사자가 있었으나. 1915년에 일제 주도로 모전석탑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4마리를 본래의 자리에서 뜯어 기단의 모서리에 각각 배치하고, 나머지 2마리는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겼다.
신라 다보탑 석사자상, 관덕동 삼층탑 석사자상과의 크기 비교.
분황사 모전석탑의 석사자상은 네 마리 모두 1m가 넘어가는 크기로, 불탑 주위에 조성해놓는 한국의 고대 석사자상 중에서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거의 왕릉의 수호물로 세워두는 왕실 석사자상과 비슷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아래는 한국의 주요 왕릉 석사자상과의 크기를 비교한 사진이다.
다만 일제가 사자상의 위치를 마음대로 변경한 것에 대한 문제와는 별도로, 사자상 4기를 각 기단의 모서리에 배치하는 모습 자체는 원래의 신라 양식에서도 자주 보이는 형태다. 예를 들어 현재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에도 4마리의 사자상이 각 귀퉁이에 조성되어 있다.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의 4마리 사자상.
3.3. 7층설과 9층설
현재 모습인 3층의 설계도.
9층으로 복원하였을 때의 설계안. 사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듯, 분황사 모전석탑은 원래 3층이 아니었다. 현재 학자들은 이 모전석탑이 본디 7층이었는지, 아니면 9층이었는지를 두고 팽팽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2층과 3층의 탑의 비례 면에서는 7층설을, 경내에 남아 있는 모전석의 양으로 보아서는 9층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일단 문화재관리국에서 제시한 도면에 의하면 7층일 경우 높이 41.6m, 9층일 경우에는 48.5m의 크기이다.
먼저 9층설을 제시하는 학자들은 주로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 문자 기록 및 출토유물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기록상으로는 동경잡기 등 모든 자료들이 일괄되게 분황사 모전석탑이 9층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1915년에 일본인들이 이 탑을 3층으로 재복원하던 중, 이 작업을 다 완료한 후에도 석탑지에서 나온 남아도는 모전 벽돌들이 많아 이것들을 따로 보관해놓았는데 이 양을 분석한 결과 딱 9층으로 쌓을 정도의 양이라는 사실을 증거로 내세운다.
7층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 630년대의 신라는 9층 높이의 탑을 쌓을 만한 기술 및 수준이 안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신라가 분황사에서 본 탑을 만든 후 겨우 4년 후에 백제에서 매우 아름답고 세련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639년 조성)을 조성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아비지로 대표되는 백제 기술자들을 정중히 모셔와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3.4. 감실(龕室) 및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
사진 출처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30호), 가장 오래된 신라 석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탑 내에 감실을 만들고 4면에 출입문을 만든 후 금강역사라 불리는 인왕상을 각 출입문 당 2기씩 새겨놓았다는 것. 돌을 떡 주무르듯이 만졌다는 신라인들 답게 1400여 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어 탑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의 눈을 즐겁게 만드는 마스코트 취급을 받는다. 이 석탑을 조성했던 7세기의 조각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고, 외부에 노출되었는데도 지금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3.5. 출토 유물
1915년 수리 중, 모전석탑 내에서 다수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당시 사리갖춤 및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공양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바늘.가위.집게 등은 분황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덕여왕의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석탑 안에는 북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북송 동전인 송녕중보가 같이 발견되어 훗날 고려시대에도 석탑을 한번 중수하고 유물을 추가로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발견된 주요 유물은 아래와 같다.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수정화주
사진 출처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30호), 가장 오래된 신라 석탑
4.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두산백과: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한국어 위키백과: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분황사 모전 석탑
- 문화원형백과: 분황사 석탑
- 문화유산채널: 신라 새로운 탑을 세우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문화유산채널: 신라 최초의 석탑, 최초의 인왕상,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선덕여왕: 분황사 석탑
- 시사상식사전: 분황사 모전석탑
- 한국석탑: 분황사 모전석탑
- 미술백과: 분황사모전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분황사 석탑
- 종교학대사전: 분황사석탑
5. 국보 제30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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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로, 당나라 말기의 선사인 무착문희(無着文喜, 821~900)가 항주(杭州)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알현하러 북쪽으로 오대산(五臺山)에 왔다가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무착에게 “어디서 왔는가?” 묻자 무착은 “남쪽에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노인에게 “북쪽의 불법은 어떻게 주지(住持)합니까?” 라고 묻자 노인은 “용과 뱀이 뒤엉켜 있고 범부와 성인이 동거한다.”고 대답했다. 무착이 “그것이 얼마나 됩니까?” 라고 묻자 노인은 “전삼삼 후삼삼이니라(前三三後三三).”라고 대답했다. 전과 후는 피차(彼此)와 같은 뜻이고, 삼삼은 '무수무량(無數無量)'의 뜻을 나타낸 말로서, 즉 '피차가 똑같이 무수무량하다'는 의미로 앞, 뒤라는 분별에 얽매이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노인이 실은 문수보살의 현신이었지만 무착문희는 그걸 홍주의 관음원에서 앙산선사가 "당신이 본 그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이셨소"라고 알려 주기 전까지는 끝내 알지 못했더라는 뒷이야기.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998[4] 법흥왕과 요진은 모두 불교를 크게 일으킨 군주이다.[5] 처음 지정될 당시 제3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