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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26호 | |
창경궁 명정전 昌慶宮 明政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시설 | 1동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조선 광해군 8년(1616) |
<colbgcolor=#bf1400> 명정전[1] |
비교적 근거리에서 찍은 명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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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경궁의 정전.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으로 입궐했을 때 옥천교를 건너 명정문을 통해 바로 정면에 보인다.
2. 역사
<colbgcolor=#bf1400> 〈동궐도〉 명정전 |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른다. 즉,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17세기 초 조선 중기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에 명정전을 가장 알뜰살뜰 사용한 임금은 영조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자 66세가 되던 1759년(영조 35년)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이곳 명정전에서 계비로 맞아들였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유흥 · 여가시설 창경원이 되면서 일제가 명정전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을 걷어 벚나무를 심는 등 크게 훼손했다. 8.15 광복 후인 1963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수했고, 1983년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환원되면서 관련 시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긴 이후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1986년에 마무리했다.
3. 정문
자세한 내용은 창경궁 명정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 구조
<colbgcolor=#bf1400> 명정전 뒤편에 붙어있는 복도. 왼쪽 복도는 빈양문 및 숭문당과, 오른쪽 복도는 문정전과 붙어있다.[5] |
- 석축기단 2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1층 전각[6]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7]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8]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학자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한 것을 확인했다.
- 외곽을 둘러싸는 16개의 일반 기둥[9]와 내부 전면(前面)에만 배치된 크고
아름다운높은 기둥 4개[10]로 형성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 어칸에는 꽃처럼 창살을 만든 사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삼분합문, 그리고 툇칸에는 이분합창이 설치되어 있고, 좌 · 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부는 회색벽돌로 12단 쌓아 화방벽(火防壁)으로 조성했다.[11] 좌우 측면 중앙칸에는 삼분합문이 설치되었고, 좌·우 툇칸 이분합창의 하단은 정면을 후면과 마찬가지로 회색벽돌로 12단 쌓았다. 분합문과 창 상부에는 모두 광창[12]을 설치했으며,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부 중앙 뒤에 어좌를 설치했다.출처.
<colbgcolor=#bf1400> 명정전 내부[13] |
명정전 천장에 달린 봉황 조각[14] |
- 8.15 광복 이후 명정전 조정 뜰에 품계석[15]을 세워두었지만, 원래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품계석은 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창덕궁(경복궁 중건 이전 조선 후기 사실상 법궁), 경운궁(대한제국 광무 연간 법궁) 조정에만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창덕궁 인정전 뜰에는 품계석이 있지만 명정전 뜰에는 없다. 이밖의 다른 조선시대나 구한말에 제작한 자료에도 명정전 품계석은 보이지 않는다.
5. 기타
<colbgcolor=#bf1400> 2020년대 초 명정전의 창호 |
6. 대중매체에서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에 비해 존재감이 약해서 거의 안 나온다고 봐야 할 수준이다.<colbgcolor=#bf1400> 명정전이 나오는 KBS2 《명성황후》의 한 장면 |
- 그리고 생뚱맞게도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등장한다. 다름 아닌 신라 왕궁이 나오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 《태조 왕건》 초반부 회차의 엔딩에도 당당하게 장소 협조에 이름을 올렸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3]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이나 공사 과정, 일시 등을 적어둔 글.[4]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7] 소의 혀란 뜻으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 첨차의 뜻은 후술.[8] 공포를 구성하는 나무 부재.[9] 평주(平柱).[10] 고주(高柱).[11] 이것은 창덕궁 인정전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종황제의 이어 이후 현재와 같은 머름으로 변했다.[12] 光窓. 어두운 실내를 밝혀주기 위하여 설치하는 창.[1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5] 品階石. 신하들이 서열에 맞게 서있을 위치를 나타내는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