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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64호 | |
포항 냉수리 신라비 浦項 冷水里 新羅碑 | |
소재지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번지 신광면사무소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91년 3월 15일 |
제작시기 | 443년(눌지왕 27), 503년(지증왕 4)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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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비석. 국보 제264호.2. 상세
지증왕 시대인 503년에 만들었고[1] 1989년에 발견됐다. 발견된 곳이 지금은 포항시 북구지만 발견 당시에는 영일군 신광면이었으므로 '영일 냉수리 신라비'로도 많이 알려졌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공식명칭은 현재 행정구역을 따서 "포항 냉수리 신라비"이다. 1989년 4월 6일 신광면 냉수리 이상운 소유 밭에서 밭갈이를 하던 중, 평소부터 걸림돌이었던 이 바위를 파내서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운반 후 흙을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행정기관에 신고하여 학계에서 현지조사한 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비석은 화강암 바위의 앞면, 뒷면, 윗면에 글씨를 새겼다. 글씨를 새기고자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었지만, 글자가 너무 많아서 다듬지 않은 뒷면과 윗면에도 글자를 새긴 것 같다. 사실 냉수리비는 비석치고는 작은 편이다. 다행히 보존상태가 좋아 모든 글자를 판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대사는 삼국사기 등 사서 내용이 부실해서 알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신라인이 직접 기록한 이 비석은 당시 역사를 정확히 아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신라 국호를 사라(斯羅)라고 썼는데, 지증왕이 신라의 한자 표기를 신라(新羅)로 통일한 것이 바로 이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503년의 음력 10월이다. 이 비석은 9월 25일에 건립되었으므로, 국호 통일 명령을 내리기 불과 한 달 전에 제작된 것이다.
3. 역주
〈전면(前面)〉
사라(斯羅)의 탁부(喙部) 출신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이 두 왕이 교시(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시었다. 계미년(503년) 9월 25일, 사탁부(沙喙部)의 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 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 자수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와 탁부의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 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와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와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暮斯智) 간지(干支), 이 일곱 왕들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셨으니, 이전의 두 왕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재물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별도로 교시하셨으니, 절거리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뒤에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후면(後面)〉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重罪)를 준다고 교시하셨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은 사탁부의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 도로불(到盧弗), 수구휴(須仇休)와 탁부의 탐수(耽須) 도사(道使) 심자공(心訾公)과 탁부의 사부(沙夫)와 나사리(那斯利), 사탁부의 소나지(蘇那支)이다. 이 7인이 삼가 사뢴 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알리었기에 이에 기록한다.
〈상면(上面)〉
촌주(村主)인 유지(臾支) 간지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 이 두 사람이 그 해에 일을 마쳤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사라(斯羅)의 탁부(喙部) 출신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이 두 왕이 교시(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시었다. 계미년(503년) 9월 25일, 사탁부(沙喙部)의 지도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 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 자수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와 탁부의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 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와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와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暮斯智) 간지(干支), 이 일곱 왕들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셨으니, 이전의 두 왕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재물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별도로 교시하셨으니, 절거리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뒤에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후면(後面)〉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중죄(重罪)를 준다고 교시하셨다. 일을 맡은 사람[典事人]은 사탁부의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 도로불(到盧弗), 수구휴(須仇休)와 탁부의 탐수(耽須) 도사(道使) 심자공(心訾公)과 탁부의 사부(沙夫)와 나사리(那斯利), 사탁부의 소나지(蘇那支)이다. 이 7인이 삼가 사뢴 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알리었기에 이에 기록한다.
〈상면(上面)〉
촌주(村主)인 유지(臾支) 간지와 수지(須支) 일금지(壹今智), 이 두 사람이 그 해에 일을 마쳤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1 #2
4. 내용
진이마촌이라는 마을에 절거리(節居利), 말추(末鄒), 사신지(斯申支)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어떤 재물의 소유권으로 분쟁이 났다. 내용을 봐선 지증왕 이전 임금 2명[2] 시절에도 어떤 분쟁과 판결이 있었는데, 당시 절거리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자가 소유권을 인정받은 듯하다. 그때 교시를 증거로 해서 지증왕을 비롯한 일곱 왕[3]들이 의논한 끝에 이 재물을 절거리의 소유로 인정하고, 절거리가 나중에 죽으면 동생 아사노(兒斯奴) 또는 동생의 아들 사노(斯奴)가 재물을 가지고, 말추와 사신지는 이 재물에 트집을 잡지 말라는 내용이다.여기까지가 메인인 앞부분의 내용이고, 뒷면에는 말추와 사신지가 만약에 트집을 또 잡으면 중죄로 처벌할 것이며 얼룩소를 제물로 잡아서 하늘에 맹세했다는 내용이 있다. 옆면에는 포항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촌주 유지 간지와 수지 일금지 두 사람이 일을 마치고 기록한다고 쓰였다.
재산과 상속 문제를 신라 조정에서 개입해 결정해준 것으로 일종의 판례를 만들어 바위에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재물이 무엇인지는 철, 금, 조세수취권(세금을 걷을 권리) 등 여러 설이 있다.
한편 이 비석에는 수많은 신라인의 이름과 관등명 같은 사회체계,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는 당시 풍속제도 등 기록이 있다. 특히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글귀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도 있다.
4.1. 부족별 역학 구도[4]
현재까지 연구로는 사탁부와 탁부는 김씨 왕족의 부족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본피부는 초창기 경주에 거주하여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했던 6부가 통합되어 토호 세력으로서 존재했다고 추측한다. 마지막으로 사피부는 파사 이사금 시기부터 진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흡수된 새로운 세력으로 형성된 부족인 듯하다.즉, 해당 분쟁에서는 김씨 왕족으로서 사탁부와 탁부가, 토호 세력으로서 본피부가, 흡수 세력으로서 사피부가 참여한 것이다. 이로써 지증왕 시기 권력구도와 관련하여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1. 지증왕이 왕을 칭했으나 아직은 부족 합의체의 성격이 남아 있다. 이는 각 부족들의 합의로 분쟁을 처리하고 七王이라는 단어가 쓰임으로 확인할 수 있다.
2. 지증왕이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으로 명칭된 것으로 보아 지증왕은 신라 전체의 국왕이었으나 여전히 6부 체제의 한 부족인 사탁부 소속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여전히 부족체제가 잔존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3. 그러나 각 부족의 권력이 수평적이진 않았다. 김씨 왕족인 사탁부에는 3인, 탁부에는 2인이 참석했고, 본피부와 사피부는 각각 1인만 참석했다. 이는 구성에 있어서 김씨 왕족의 발언권이 확연히 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4. 초기 왕성이었던 박씨와 석씨에 해당하는 부족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볼 때 모든 국가 사항에 6부가 참여하진 않은 듯하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기록된 사건 역시 국가 전체적인 중대사는 아니었으므로 세력이 비교적 강했던 박씨와 석씨가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
즉, 정리하면 신라 고유의 6부 체제와 부족 합의적 성격이 남아 있었으나 이미 김씨 일족이 합의의 주도권을 명확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증왕이 '왕'을 칭하고 일련의 왕권 강화정책을 시행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포항 냉수리 신라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포항 냉수리 신라비
-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냉수리 신라비
- 고고학사전: 냉수리 신라비
- 두산백과: 포항 냉수리 신라비
6. 국보 제264호
이 비는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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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포항 냉수리 신라비 · 포항 중성리 신라비 |
[1] 냉수리비가 503년 계미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경현 교수 등이 주장하는 소수설은 한 갑자 이전 계미년인 443년이라는 것이지만, 이를 받아들일 경우 고작 6살에 불과한 지증왕이 갈문왕에 등극하는 문제가 생긴다.[2]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라고 쓰였는데, 각각 실성 마립간과 눌지 마립간으로 비정한다.#[3] 이들이 왕이라고 불리긴 하나, 독립된 나라의 군자라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사람, 혹은 신라 안에서도 한 내부 집단의 수장급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본다. 여기서도 탁부의 누구, 본피부의 누구 하는 식으로 6부에 속한 인물들인 것으로 표현했다.[4] 해당 부분은 신라 연구총서 제8권 《신라의 통치 체제》내용을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