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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30호 | |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大邱 慶尙監營 測雨臺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길 52 (송월동, 국립기상박물관)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
수량/면적 | 1점 |
지정연도 | 2020년 2월 27일 |
제작시기 | 조선 영조 |
1. 개요
大邱 慶尙監營 測雨臺.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조선 시대의 강우량 관측기구 세트의 일부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측우기의 받침대다.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본래 대구에 위치한 경상감영[1]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전면과 후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제작시기가 1770년(조선 영조 46년)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측우대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측우기 그 자체는 아니며, 정확하게는 측우기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지칭한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함께 세트로 있던 측우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본 측우대의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며 측우대에 새겨진 명문만으로도 조선시대에 강우량 측정 제도가 있었음을 층분히 증명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이미 1985년에 대구 선화당 측우대라는 문화재 명으로 보물 제842호로 지정되었으나,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20년 2월 27일에 그 과학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과 함께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에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국보 제330호로 지정되었으며, 기상청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2020년 10월 말에 개관한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옮겨져서 전시되어 있다.
2. 내용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전면.[2] |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높이 46cm, 세로 37cm, 가로 37cm 크기의 화강암제 기둥형 측우기 받침대로 상단의 가운데에는 측우기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측우대의 전면에는 '측우대(測雨臺)'라는 이름이, 후면에는 '측우대(測雨臺)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서 본 측우대가 조선시대 영조 46년인 1770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측우기도 세트로 함께 있었지만 측우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측우대 표면의 몇 군데에 깨진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한국 전쟁때 총격에 의해 생긴 총탄 자국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측우대에 새겨진 명문에는 큰 손상이 없으며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측우기 실물이 없음에도 측우대 만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데, 이는 표면에 새겨진 명문이 무사히 보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명문에는 측우대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남아 있으며, 제작시기 역시 건륭경인오월조라고 명확히 밝혀져 있다. 이를 해석하자면 본 물품의 이름은 측우대이고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륭이란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를 뜻하는데, 건륭 경인년이면 1770년으로 환산된다.[3][4] 또한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의 기사에 영조 46년인 1770년에 영조가 강우량 측정을 다시 시행하라는 명을 내렸음이[5] 나와 있어서 본 측우대는 실록 기록과도 일치한다. 실록에 실린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 실록. 영조 46년(1770) 5월 1일 정축 2번째 기사[7]
영조실록의 기사에서 말하는 석대(石臺)가 바로 측우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서, 세종 때의 기존 규격을 가지고 측우기와 측우대를 다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 실록. 영조 46년(1770) 5월 1일 정축 2번째 기사[7]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측우대만 실물이 전해지고 측우기는 안 남아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세트로 있었을 측우기도 20세기 초까지는 함께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해진 조선고대관측기록보고(朝鮮古代觀測記錄報告)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본 측우대는 대구 경상감영의 선화당 건물 앞마당에 있었으며 측우기는 이와 함께 설치된 것이 남아있던 것으로 나온다.[8][9]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측우기가 함께 전해졌다면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10] |
그리고 조사와 함께 경상감영에 있던 측우기와 측우대를 인천에 위치한 총독부 관측소로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시기에 측우기는 사라져버렸고 측우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50년 서울 국립기상대[11]로 옮겼다고 한다.[12]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비록 측우기 실물은 함께 전해지지는 않지만, 명문이 잘 남아있어 제작연대가 명확하며 확실하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실제 유물이며 전래 및 입수 경위도 분명하여 그 가치가 높다. 또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현전하는 측우기 관련 유물(측우기, 측우대) 중 제작 시기가 명확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명문이 남아 제작 시기가 확실한 측우기 관련 유물로는 본 측우대 외에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가 있는데, 각각 1837년(헌종 3년)과 1782년(정조 6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1770년에 제작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13] 이 뿐만 아니라 본 측우대는 조선시대에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로 행해진 체계적이며 표준화된 강우량 측정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실록에 남은 기록뿐만 아니라 실제 유물로써도 증명하는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한반도 과학사 연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익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에 보물 제842호로 지정되었으나, 학술적인 여러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2020년 2월 27일 국보 제33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측우대
-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 시사상식사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 두산백과: 대구 선화당 측우대
- 두산백과: 측우대
- 한국어 위키백과: 대구 선화당 측우대
- 문화재청 홈페이지: 대구 선화당 측우대 (大邱 宣化堂 測雨臺)
4. 국보 제330호
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大邱 慶尙監營 測雨臺)’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46cm의 장방형 석재로, 원래 대구감영(大邱監營)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면에 ‘측우기(測雨器)’, 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測雨臺, 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해 1770년(영조 46)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和田雄治]의 기록을 따르면, 이 측우대는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의 뜰에 있다가 총독부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하며, 지금은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 15세기 측우기와 측우대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770년 영조의 명으로 다시 실행되었으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이 때 다시 시작된 측우제도를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있다. 당시 영조는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고 전국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해,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보고하게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는 점으로,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너비는 8치, 석대(石臺) 위 둥그런 구멍의 깊이는 1치로 규정하였다.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임을 감안하면, 높이 46cm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영조 대 측우대 제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는 조선 후기 15세기의 옛 제도를 따라 측우기와 측우대 제도를 마련하였고, 기존의 전례가 지속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비록 측우기는 사라졌지만, 제작시기가 명확하고 우리나라의 체계적인 강수량 측정 역사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와 함께 국보로 지정해 역사적․과학사적 가치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1] 감영(監營)은 현재의 도청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기관으로, 관찰사(지금으로 따지면 도지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를 뜻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감영2[2] 측우대 밑의 받침돌은 임의로 받쳐놓은 것으로 측우대와 세트로 전해진 것은 아니다.[3]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경인[4] 명문에 건륭이라는 청나라의 연호가 쓰여있기 때문에 본 측우대가 조선의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만들어서 조선으로 보낸 것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중국학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해줄만한 기록이나 증거는 전무하다. 따라서 이는 일고의 고려할 가치도 없는 엉터리 주장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측우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측우기[5] 본래 조선의 강우량 측정 제도는 1441년 세종이 처음 시작해서 계속 시행되어 오다가 16~17세기에 들어 연달아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의 난리통에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이후로는 있는 둥 없는 둥 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영조때 들어서야 비로소 이를 다시 시행하게 된다.[6] 1740년으로 영조 16년이다.[7]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영조실록 114권 중[8] 또한 조선고대관측기록보고에 따르면, 1917년 당시 시점으로는 1770년 영조의 명으로 제작된 측우기는 7점이 남아 있고 측우대는 4점이 남아 있었다 전한다. 하지만 2020년 현재 남아 있는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단 한 점만이 남아 있고, 측우대는 관상감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대리석 측우대),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통영 측우대,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까지 총 5기 뿐만이 남아 있다.[9] 참고 문헌에 따라서는 이 당시 측우대 9점이 남아 있었다고도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측우대[10] 측우대 상단에 올려 놓은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인 것으로 보인다.[11] 지금의 기상청의 전신이다. 이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12]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과학문화 -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서울 -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13] 제작 시기가 불명확한 측우기 관련 유물로는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그리고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가 있는데, 관상감 측우대는 아마도 조선 전기에 만들어져 가장 먼저 제작됐을 것으로 보이지만 남아있는 명문이나 전해지는 관련 자료가 딱히 없어서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관상감 측우대는 국보 승격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통영 측우대의 경우 '신미 2월(辛未 二月)'이라는 명문만이 남아 있어서 1811년(순조 11년) 또는 1871년(고종 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도 관상감 측우대처럼 딱히 명문이나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에 아마도 창덕궁에 연경당이 건설된 1828년(순조 28년)경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