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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93호 |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보살상 |
수량/면적 | 1점 |
지정연도 | 1997년 1월 1일 |
제작시기 | 삼국시대 |
1. 개요
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구리, 주석, 납의 합금으로 주조하여 금으로 도금한 금속제 관음보살상이다.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위치한 한 절터에서 어느 농부가 발견했다.[1] 땅 속에 묻혀 있던 뚜껑 덮힌 무쇠솥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하며, 발견 당시 본 불상과 함께 또다른 관음보살입상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2] 하지만 일본 헌병대가 두 점 모두 압수해갔고 경매로 일본인에게 팔아치웠는데, 이때 '니와세 히로유키(庭瀨博章)'라는 자가 두 점 모두 구매한다. 그러다가 니와세 히로유키가 다른 한 점은 1922년 '이치다 지로(市田次郎)'에게 팔아 넘기고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만 가지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압수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환수했다. 하지만 이치다 지로의 손에 들어간 다른 한 점은 환수하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가져가고는 이치다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고만 전해질뿐 그 실물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약 100여년이 지난 2018년 일본에서 또다른 불상의 실물이 확인됐다.[3] 자세한 경위는 후술한다.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정식적인 학술 조사를 통한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유물이고 불상에 남아 있는 명문도 없는데다 발견 시기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여러 관련 정보가 누락된 점이 많아, 본 불상이 어디 계열 유물일지 그리고 언제쯤 만들어졌을지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불상에서 드러나는 여러 특징과 전해지는 바 등으로 미루어보아 7세기 경 삼국시대 백제의 불상으로 추정한다.[4] 본 불상은 시간의 흐름을 이기진 못하고 전체적으로 녹이 슬어 있으나, 불상의 형태가 눈에 띄게 결구된 부분 없이 잘 남아 있고 도금 상태도 양호하여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또한 관음보살의 자태가 유려하여 '미스 백제'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백제의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이미 1963년에 보물 제195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으로 지정되었으나,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7년 국보 제293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2.1. 상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높이 21.1cm의 금동불상으로, 연꽃형 대좌 위에 올라선 보살이 똑바로 서서 오른손으로는 구슬을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는 형상이다. 2020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본 불상의 재질은 구리-주석-납을 섞은 청동 합금이며,[5] 표면은 아말감도금기법으로 금을 입힌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같은 불상 제작 방식은 고대 한반도에서 널리 사용되던 방식이라고 한다.[6]본 불상이 보살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보살인지는 불상의 특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확인 된다. 불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정면에는 화불(化佛)로 추정되는 작은 부처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 불상이 보살상이며 보살 가운데서도 관음보살(=관세음보살)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7] 머리에 쓴 보관에 화불을 장식하는 것은 관음보살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방식은 7세기 들어서 백제를 중심으로 유행했다고 한다.[8]
머리 뒤에 삐죽 나온 촉이 확인된다. |
관음보살의 체형은 날씬하고 입고 있는 옷(천의(天衣))은 몸에 착 달라 붙게 표현했다. 이 옷에는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팔 뒤로 쭉 늘어져서 바닥의 대좌까지 닿는 천자락이 달려 있는데, 왼팔을 아래로 쭉 뻗어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 흘러내린 천자락을 살짝 잡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손바닥을 편 상태에서 엄지와 검지로 구슬[12]을 잡고 있다. 이렇게 구슬과 늘어진 천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자태가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평가된다.[13] 옷 위에는 불상에 장식하는 구슬 장식인 영락(瓔珞)이 표현되어 있는데,[14] 양어깨에서 내려오다가 배꼽 부근의 꽃장식에서 만난 뒤 다시 갈라져서 무릎까지 늘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X자의 형태를 이룬다. 이와 같은 영락 표현은 중국의 불상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삼국시대인 7세기경의 불상들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15]
본 불상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불상들의 경우, 불상의 앞면은 아름답게 조형해도 뒤편은 단순화해서 간략하게 표현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불상의 뒷모습도 상당히 사실적으로 신경써서 조형했다.[16] 어깨 뒤편에서 시작해서 팔 뒤로 늘어진 천자락, 앞과 동일한 형태의 영락이 표현되어 있다. 영락은 앞면과 동일한 구성으로, 엉덩이 부근의 꽃장식에서 한번 만나면서 X자 형태를 이룬다.
관음보살이 서 있는 둥근 대좌는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좌 위의 작은 판에 관음보살이 올라가 있다. 대좌는 위를 향하고 있는 8개의 연꽃잎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큰 연꽃잎의 안에 작은 꽃잎을 새겨놨다. 대좌는 소박한 형태라고 평가된다.[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정확한 제작 연대나 제작 국가는 확실하진 않지만 불상의 도상 양식과 형태 그리고 전해지는 바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얼굴에 살이 올라 있는데다 표정이 부드럽고 체형과 자태는 세련됐다는 점, 삼면보관이나 영락 등의 특징적인 도상 양식이 백제의 불상들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백제의 강역이었던 부여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본 불상은 7세기 초엽경 백제의 불상이라 추정할 수 있다.[18]
또한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과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사이에 비교할 만한 부분도 있다. 본 불상에서 나타나는 보관이나 영락과 같은 특징들이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19] 다만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은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불상으로 본 불상보다 더 세련되고 발전된 양식을 보인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부여군과 구미시 지역 간에 교류가 있었고 기존의 세련된 백제의 문화를 수입하여 받아들인 신라에서 자기들 방식으로 더 발달시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여기저기 녹이 슬고 금박이 벗겨지는 등 보존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상의 형태가 온전하고, 표현 기법 등으로 제작 시기를 7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자태가 유려하여 아름답고, 생기있지만 세련된 백제의 미를 보여주는 불상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1월 1일에 보물 제195호에서 국보 제29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2. 형제 관음보살 입상[20]
- 한겨레: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 - 2018년 6월 4일자 기사
- 한겨레: 1400년 녹슨 세월의 더께도 지우지 못한 백제의 미소 - 2018년 7월 24일자 기사
- 한겨레: <단독> ‘백제의 미소’ 금동관음상, 일 소장자와 환수협상 결렬 - 2018년 10월 10일자 기사
- 뉴스티앤티: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 조속히 국내로 환수해야 - 2019년 5월 8일자 기사
- 연합뉴스: "부여→일본 반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하라" - 2019년 5월 8일자 기사
- 백제NEWS: "백제미소불이여 돌아오라!" - 2020년 7월 13일자 기사
- 충청게릴라뉴스: 부여군,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 의지 결집 - 2020년 7월 23일자 기사
- 경향신문: ‘백제의 미소’ 불상, 아름답지만…40억원↑ 가격은 ‘국제호갱’ 감이다 - 2024년 4월 16일자 기사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위치한 한 절터에서 어느 농부가 발견했는데, 이와 함께 또다른 관음보살입상도[21]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헌병대가 두 점 모두 압수하고는 경매로 일본인에게 팔아버렸고 한 쌍을 이루던 두 불상은 서로 헤어지게 된다. 두 점 모두 '니와세 히로유키(庭瀨博章)'라는 자가 사들여 가지고 있다가,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만 남기고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은 팔아버린 것이다. 니와세 히로유키가 계속 가지고 있던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해방 이후 그에게서 압수하여 다행히도 대한민국 정부가 환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22년 의사인 '이치다 지로(市田次郎)'가 사들였고, 이후 일제가 패망하면서 이치다 지로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가져가고는 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고만 전해질뿐 그 실물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1932년에 일본의 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펴낸 <조선미술사>에 실린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흑백사진을 마지막으로 그 행방과 존재여부가 묘연해진 것이다. 그러다가 약 100여년이 지난 2018년 일본에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실물이 확인되면서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한겨레신문이 단독으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불상을 일본에 가져간 이치다 지로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의원을 열었던 의사로, 수백여점의 조선 고미술품들을 소장했던 굴지의 컬렉터였다. 이 작품의 입수·반출경로를 추적해온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치다는 1929년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에 이 불상을 포함한 소장품들을 선보인 것을 마지막으로, 1970년대 그가 죽을 때까지 백제관음상을 극소수의 지인 말고는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후손들에게도 “이 작품은 절대로 바깥에 공개하면 안된다”는 유지를 남겼고, 기업가로 알려진 현소장자도 70년대 이치다로부터 작품을 넘겨받을 당시 이런 유지를 전해듣고 계속 지켜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 하면서 이번에 소장자가 고심 끝에 한국 학계에 공개한 만큼 불상이 돌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셈
이라고 밝혔다.[22] 현재의 소장자가[23] 어떤 연유에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을 공개했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 행방과 실물이 확인된 것이다. 본래 일본은 일제 강점기에 반출된 한반도의 문화재에 대한 공개를 극히 꺼리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공립 박물관이 소장한 것들의 대외 공개도 꺼리는 판인데, 개인이 소장한 것이라면 더더욱 비밀스럽게 감추려 든다. 한국 학계에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을 애타게 찾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원소장자였던 이치다도 기사에 나온 것과 같이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우리 문화재들에 대한 실정과 실태 파악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현소장자가 2018년 공개한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은 크기는 28cm이며, 공개 당시 진품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와 관련하여 잠시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의 후속보도에 따르면,
한겨레 취재에 앞서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 전문가들로 구성된 실사단이 지난 3일 도쿄를 찾아와 소장자 쪽의 협조로 불상을 실견하고 진위 여부와 보존상태를 판별하는 조사를 벌였으며, 이를 토대로 최근 박물관 쪽이 문화재청 쪽에 “100% 진품”이라는 공식판정 결과를 통보한 사실이 확인됐다.
고 한다.[24] 1932년에 공개된 사진과 비교해도 형태가 완전히 일치하고, 현소장자의 입수경위도 명확하여 진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정부는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환수를 추진하기로 결정한다.하지만 한국 정부의 환수에 제동이 걸렸다. 현소장자가 내건 요구 금액이 한화로 100억원을 넘어서, 문화재청에서 책정한 구입액인 40억원+α로는 택도 없이 못미치는 것이었다. 2018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에서,
협의를 맡은 문화재청의 김동영 국제교류협력과장은 “100억원대를 넘는 것으로 알려진 소장자의 요구 금액과 정부쪽 공식 구매가의 간격이 너무 크고, 소장자 쪽이 최근 협상이 진척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연락을 끊어 현재로선 더이상 협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설명했다.
고 전한다.[25]이렇게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의 환수협상이 결렬된 와중에, 2019년 현소장자가 중국 상하이박물관과 접촉한 것이 알려지면서 부여군청은 기자회견을 열어 환수를 촉구했으며,[26] 2020년에는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정책토론회 등을 개최하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27]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은 2021년 현재도 부여군청과 문화유산회복재단 등의 단체들에서 지속적으로 환수 추진 중에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진척상황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것으로 보인다.
2024년 3월 말에 들어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불교미술 전시인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 출품이 됐다. 호암미술관 측에서 현소장자에게 상당히 공을 들여가면서 접촉했으며 막판에야 가까스로 전시가 성사됐다고 한다. 이로써 1945년 해방 때 반출된 이후 처음으로 고국땅을 밟게 된 것이다.[28]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 e뮤지엄: 금동관음보살입상
- 두산백과: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한겨례: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
4. 국보 제293호
1907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1] 발견이 100년도 더 전의 일이라 발견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본 불상의 이름에는 규암리라는 지명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아마도 왕흥사지에서 발견한 것으로 추정한다. 왕흥사지는 규암면 신리에 있다.[2] 출처: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한겨례 -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4]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5] 구리와 주석을 합쳐서 청동을 만든다.[6] 출처: 신용비, 김지호(2020): 부여 규암리 출토 금동관음보살 입상의 형상과 제작기법 Gilt-bronze Standing Avalokiteshvara from Gyuam-ri, Buyeo : The Structure and Production Technique. In: 박물관보존과학 vol.23, 1-16. 논문 다운로드 링크[7] 참조: 세계미술용어사전 - 관음보살, 미술대사전(용어편) - 화불[8]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9]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10] 삼면보관은 각 면의 모양이 산과 같은 삼각형인데, 이에 착안해서 삼산보관(三山寶冠)이라고도 한다.[11] 보계는 보살이나 부처의 머리 위에 있는 상투를 말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육계(肉髻)가 있다. 육계는 무견정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을 지칭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보계5, 네이버 국어사전 - 육계4[12] 혹은 보주(寶珠)로도 본다.[13] 출처: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14]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영락[15]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16]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17] 출처: 두산백과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1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두산백과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1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20] 본 단락은 전적으로 한겨레신문의 기사들을 주 텍스트로 삼아 종합하여 작성되었다. 한겨레신문의 기사들과 그 외에 참고한 기사들은 아래에 밝힌다.[21] 이하에서는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으로 지칭한다.[22] 출처: 한겨레 -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23] 기업가로 알려졌다.[24] 출처: 한겨레 - 1400년 녹슨 세월의 더께도 지우지 못한 백제의 미소[25] 출처: 한겨레 - <단독> ‘백제의 미소’ 금동관음상, 일 소장자와 환수협상 결렬[26] 참조: 뉴스티앤티 -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 조속히 국내로 환수해야, 연합뉴스 - "부여→일본 반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하라"[27] 참조: 백제NEWS - "백제미소불이여 돌아오라!", 충청게릴라뉴스 - 부여군,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 의지 결집[28] 출처: 조선일보 - “환수” 목소리 높던 백제 불상, 95년 만에 한국 전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