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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14호 | |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興王寺銘 靑銅 銀入絲 香垸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삼성미술관 리움 (한남동)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공양구 |
수량/면적 | 1점 |
지정연도 | 1984년 8월 6일 |
제작시기 | 고려 충렬왕 15년(1289)[1] |
1. 개요
興王寺銘 靑銅 銀入絲 香垸.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금속제 향로로, 표면에 여러 문양이 은실로 새겨져 있으며 명문이 남아 있어 제작 연대도 추측할 수 있다.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이라는 이름을 풀이하자면, 은입사 기법으로 문양을 넣고 흥왕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청동 재질의 향완이란 뜻이다. 은입사(銀入絲) 기법이란 금속으로 된 기구의 표면에 은으로 된 실을 이용하여 그림이나 문양 등을 새기는 세공 기술로 고려 시대에 제작된 공예품에서 주로 나타난다. 향완(香垸)은 향로의 일종인데, 여러 형태의 향로 중에서도 본 유물처럼 일종의 잔처럼 생긴 것을 가리킨다.
본 향완은 본래 경기도 개풍군[2] 덕적산에 위치했던 흥왕사(興王寺)의 것인데,[3] 정확히 어떤 경위로 전래되다가 삼성에 입수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건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흥왕사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현존하는 유물이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동 향완 가운데 여러 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바가 있으며,[4]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1984년 국보 제21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높이 40.1cm, 입지름 30cm의 청동제 향완으로, 본 향완의 받침에 34자의 명문이 은입사로 새겨져 있는데, 이 중에 제작연대를 나타내는 기축2월일흥왕사(己丑二月日興王寺)라는 문구를 통해 고려 고종 16년인 1229년 혹은 충렬왕 15년인 1289년에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된다.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의 전체적인 형태는 고려시대 향완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일종의 잔처럼 생겼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향완 형태의 균형과 비례가 잘 맞으며 하단부 받침이 높아 경쾌한 인상을 준다고 평가받는다.[5] 또한 상하부 표면에 전체적으로 무늬가 가득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은실로 새긴 것이다.
향을 담는 상부의 입에는 넓은 테를 둥그렇게 둘러놨고, 여기에는 은실로 구슬, 연꽃, 덩굴 무늬를 장식해놨다.[6] 본 향완의 상부 몸체 표면은 여러 무늬로 가득한데, 꽃 형태의 테두리 안에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과 봉황을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장식했다. 특히 용과 봉황 무늬는 다른 향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 고려 최대의 사찰이던 흥왕사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본다. 그 밖의 상부 몸체 공간에는 갈대와 연꽃 그리고 물새들로 어우러진 경치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라고 하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속 공예품에서 종종 발견되는 무늬로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7][8]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상부 몸체의 장식도 아름답지만 하부 받침에 새겨진 문양들도 대단히 섬세하다. 받침의 표면에는 당초(唐草) 무늬를 빼곡하게 둘렸는데 그 세공 수준이 상당히 빼어나다.[9]
한편,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장식적인 측면도 대단히 수준이 높지만 명문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하부 받침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석하자면 '기축년(1289) 2월에 흥왕사 학도가 큰 덕을 쌓아 □일 진례군 부호장 김부 등과 마음을 합쳐 발원하였고, 개경에 있는 김언수가 만들었다.'는 뜻이다.[12] 여기에 '기축2월(己丑二月)', '흥왕사(興王寺)', '김언수조(金彦守造)' 등이 적혀 있어서 향로의 제작 연도와 절의 이름, 제작 장인의 이름이 김언수라는 것 및 향로를 발원한 사람들 등이 확인된다. 다만 여기서 기축2월이 고종 16년인 1229년인지 아니면 충렬왕 15년인 1289년인지는 불명확하다. 11세기의 간지 상 육십갑자 중 기축년은 1229년과 1289년인데,[13] 일반적으로는 본 명문에 나온 기축년을 1289년으로 보긴한다. 하지만 1229년과 1289년 사이인 1231년부터 1259년까지 무려 9차례나 되는 몽고의 침략이 있었고 이때 고려 전국토가 초토화되면서 필연적으로 공예품 생산 역량이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제작 시기를 몽고 침입 이전의 고종 16년(1229)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14]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명문이 남아 있어서 제작 연대와 같은 정보를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제작 수준이 높아 그 미적인 가치도 탁월하여 고려의 높은 금속 공예 수준을 대표할만한 걸작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인정 받아, 1984년 8월 6일 국보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214호
향을 담아 피우는 향로 가운데 이처럼 나팔처럼 벌어진 다리가 달린 향로를 고려시대에는 특별히 향완(香垸)이라 불렀다.
이 향로는 높이 40.1㎝, 입 지름 30㎝의 크기로 받침, 몸체, 입 3부분으로 되어있다. 입은 수평으로 넓게 퍼진 테를 가진 전이 있으며, 그 전을 구슬 무늬로 장식하고 연꽃과 덩굴 무늬를 새기고 은을 입혔다. 몸체에는 대칭되는 위치에 꽃으로 창을 만들고 그 안에 용과 봉황을 세밀하게 은입사하였다. 남은 공간에는 갈대와 연꽃을 새기고 위에는 기러기를 새겼으며, 밑에 오리를 새겨 은을 입혔다.
나팔형 받침은 위의 가장자리를 쌍선으로 굵게 표시하고, 위로 오르면서 덩굴무늬를, 하단에는 풀무늬를, 굽에는 꽃무늬를 은입사하였다. 은입사 문양은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뿐아니라 회화적 가치도 아주 높다. 받침의 굽을 돌아가며 34자의 명문을 새겼는데 기축(己丑)년의 간지를 통해 이 향로가 1229년쯤에 개풍군 흥왕사용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용과 봉황의 모습을 인입자로 세련되게 장식하였고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향로 가운데 중요한 작품이다.
이 향로는 높이 40.1㎝, 입 지름 30㎝의 크기로 받침, 몸체, 입 3부분으로 되어있다. 입은 수평으로 넓게 퍼진 테를 가진 전이 있으며, 그 전을 구슬 무늬로 장식하고 연꽃과 덩굴 무늬를 새기고 은을 입혔다. 몸체에는 대칭되는 위치에 꽃으로 창을 만들고 그 안에 용과 봉황을 세밀하게 은입사하였다. 남은 공간에는 갈대와 연꽃을 새기고 위에는 기러기를 새겼으며, 밑에 오리를 새겨 은을 입혔다.
나팔형 받침은 위의 가장자리를 쌍선으로 굵게 표시하고, 위로 오르면서 덩굴무늬를, 하단에는 풀무늬를, 굽에는 꽃무늬를 은입사하였다. 은입사 문양은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줄 뿐아니라 회화적 가치도 아주 높다. 받침의 굽을 돌아가며 34자의 명문을 새겼는데 기축(己丑)년의 간지를 통해 이 향로가 1229년쯤에 개풍군 흥왕사용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용과 봉황의 모습을 인입자로 세련되게 장식하였고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향로 가운데 중요한 작품이다.
5. 관련 문서
[1]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본 유물의 제원을 밝히면서 제작시기를 '고려 충렬왕 15년(1289)'이라고 해놓고서는, 막상 유물 설명 본문에서는 1229년 제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 개풍군은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 상으로는 개성시에 속한다. 남북분단 이후 경기도-개성시-황해북도-개성시의 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본 문서에서는 이북 5도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라 경기도로 표기한다.[3] 흥왕사는 고려 최대의 사찰로 전해지는데, 고려 멸망 이후로도 조선 초기까지는 유지되다가 불명확한 시기에 폐사가 됐다.[4] 본 향완 외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고려의 향완으로는 국보 제75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288호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21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3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778호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향완 등이 있다.[5] 출처: 두산백과 -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6] 출처: 두산백과 -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8] 이외에도 포류수금문이 장식된 고려의 공예품으로는 국보 제92호로 지정된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이 있다.[9] 당초는 덩굴을 뜻하는데 특정한 식물의 덩굴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당초 무늬는 일반적인 덩굴이 이리저리 꼬여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늬를 말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이슬람 문화권의 아라베스크 무늬가 있다.[10] 여기에 들어갈 문자를 회일(會日)로 보기도 한다.[11] 김(金) 대신 전(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2] 출처: 김세린(2013): 高麗時代禁制와工匠制를통해본金屬象嵌技法의양상 A Study of the Metal Inlay Techniques Seen through the Institutional Prohibitions and Artisanship during the Goryeo Period. In: 미술사논단 36, 167-200. 논문 다운로드 링크[13]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기축[14] 출처: 진홍섭(1999): 묵재 한화 (默齋閑話) - 한국 미술사 외사. 대원사. 온라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