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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75호 | |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 |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공양구 / 공양구 |
수량/시설 | 1점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명종 7년(1177) |
1. 개요
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고려 명종 7년(1177)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최고(最古)의 금속제 향로로, 표면에 여러 문양을 은입사 기법으로 새겼고 따로 명문이 담아 있다.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이라는 이름을 풀이하자면, 은입사 기법으로 문양을 새겨 넣고 청동 재질로 된 표충사의 향완이란 뜻이다. 은입사(銀入絲) 기법이란 금속으로 된 기구에 은으로 뽑은 실을 이용하여 그림이나 문양 등을 새기는 세공기술로 고려 시대에 제작된 공예품에서 많이 발견된다. 향완(香垸)은 향로의 일종인데, 여러 가지 향로 종류 중에서도 본 유물처럼 일종의 잔처럼 생긴 것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동 향완 가운데 여러 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1] 이들 중에서도 표충사의 청동 은입사 향완은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또한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1962년 국보 제75호로 지정되었고, 경상남도 밀양시 재약산 기슭에 있는 표충사에서 소장하였는데 표충사호국박물관에 전시된다.
2. 내용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높이 27.5 cm, 입지름 26.1 cm에 달하는 향완으로 높이와 너비가 거의 같다. 본 향완은 표면에 새겨진 57자 명문 중에는 금나라 세종 시기의 연호를 사용해 대정 17년(大定十七年)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때문에 대정 17년(고려 명종 7년)인 1177년에 만들어졌다고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은입사 향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전체적인 형태는 고려시대 향완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향완 형태의 균형과 비례가 잘 맞는다. 본 향완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일종의 잔처럼 생겼는데, 하부의 받침에 향을 담는 상부의 몸체를 끼워 넣는 식으로 연결되었고 둘은 분리가 가능하다. 또한 상하부 표면에 전체적으로 무늬가 가득 장식되었는데, 이는 모두 은실로 새긴 것이다.
향을 담는 상부는 넓은 테를 둥그렇게 둘렀는데, 테의 안쪽에는 실담 문자(범자)로 육자진언(옴 마니 반메 훔)을 새겼다. 각 글자들은 굵기가 각기 다른 2중 동심원 안에 들어가 있다. 또한 실담문자들의 사이에는 피어오르는 구름 모양 무늬 6개로 채워졌다. 테의 가장자리에도 또 하나 테를 둘렀는데 여기에도 작은 구름 무늬를 12군데에 둘러서 장식하였다.
본 향완의 상부 몸체 표면에도 2중 동심원 4개를 새기고 동심원 안에 실담문자를 하나씩 새겼다. 실담문자를 해석하면 옴 아 훔 흐리흐(om ah hum hrih)인데, 이중 '옴 아 훔'은 불교 진언에 자주 등장하는 음절들이고, 그 자제로도 진언의 한 가지로 통한다. 또한 흐리흐(hrih)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밀교의 종자자이다. 위쪽에 관세음보살의 대표적인 진언인 육자진언을 새겼으니, 아래쪽에 관세음보살의 종자자를 새김도 이상하지 않다.
범자(실담문자) 아래 부분에는 두 겹으로 된 연꽃 무늬가 둘러져 있다. 연꽃 잎에는 마치 지문처럼 생긴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몸체 표면에 장식된 연꽃 무늬와 범어 문양은 서로 조화되어서 마치 피어나는 연꽃 위로 범자가 떠오른 듯이 보인다. 또한 새겨진 범자는 크고 눈에 띄게 장식했는데, 간결하지만 아주 세련된 서체라고 평가받는다.[2]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상부 몸체의 장식뿐만 아니라 하부 받침에 새겨진 문양들도 대단히 수준이 높다. 받침의 표면에는 구름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이 새겨져 있는데 용의 묘사 정도가 아주 세밀하다. 용의 얼굴, 윤곽, 뿔, 꼬리, 갈기, 비늘, 발톱 등의 용의 세부 표현이 상세하고 각 부분마다 은실의 굵기를 다르게 하여서, 구름 속에서 힘차고 생동감 있게 용틀임 치는 용의 형상이 완연하다. 또한 용의 바로 위에는 구름 무늬 띠를 둘렀고, 받침 바닥의 도톰하게 만든 테두리에는 동심원 무늬를 둘러서 장식 처리했다. 이와 같이 받침에는 장식으로 가득해서, 여백이 많은 상부 몸체와는 대조적이다.[3]
한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장식적인 측면도 대단히 수준이 높지만, 제작에 관련한 명문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상부 몸체와 하부 받침 둘 다 각기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상부 몸체의 테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大定十七年丁酉六月八日法界生亡空增菩提之願以鑄成靑銅含銀香垸一副重八斤印棟樑道人孝初通康柱等謹發至誠特造隨喜者敢文
대정십칠년정유유월팔일법계생망공증보제지원이주성청동함은향완일부중팔근인동량도인효초통강주등근발지성특조수희자감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명문[4]
여기서 '대정 17년(大定十七年)'이라는 제작 연도와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이라는 향완의 명칭, 그리고 '효초(孝初)'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서 제작 장인의 이름이 효초임이 확인된다. 대정은 금나라의 연호인데 대정 1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면 서기 1177년이며,[5] 함은은 은을 포함했다는 말로 고려시대에는 은입사를 함은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던 모양이다. 대정십칠년정유유월팔일법계생망공증보제지원이주성청동함은향완일부중팔근인동량도인효초통강주등근발지성특조수희자감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명문[4]
또한 하부 받침의 안쪽에도 점각으로 새긴 명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창령북면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라고 쓰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본 향완은 본래 창녕군에 있는 용흥사의 물품이었을 것이다.[6] 하지만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이 언제 어떠한 연유로 창녕 용흥사에서 밀양 표충사로 흘러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없으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 선조가 유정대사에게 하사한 물품이라고 하는데[7] 표충사에 유정대사, 휴정, 기허대사를 모시는 유교 서원인 표충서원이 들어오게 되면서 함께 딸려온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은 현존하는 고려의 금속 향완 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임과 동시에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명문이 남아 있어서 제작 정보를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제작 수준이 높아 그 미적인 가치도 탁월하여 고려의 높은 금속 공예 수준을 대표할만한 걸작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5호로 지정되었다.
3.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도난 사건[9]
1965년 1월에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도난 사건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정치적 격량으로 나라는 어수선하고 국민들은 가난하며 문화재 보존 의식이 높지 않던 시기인 1950~60년대에 이를 틈탄 문화재 도난 사건이 잦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1967년에 발생하여 현재까지도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은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도난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보다 2년 앞서서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도 도난 사건을 겪었다.본 향완은 1957년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데,[10] 발견된 뒤로 1963년경까지 표충사의 총무 스님이 본 향완을 애지중지하면서 따로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11] 그러다가 이후에 표충사 경내에 사명당유물관이 생기면서 여기로 옮겨져서 보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5년 1월 19일에 밀양 교육청의 한 공무원[12]이 문화재 실태 조사를 위해 유물관을 방문했을 때, 본 향완이 들어가 있던 유물함은 박살이 났고 유물은 도난당했음을 발견했다. 이에 표충사의 스님들은 도난 사실을 바로 경찰에 알렸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수사에 착수해서 여럿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 조사함과 동시에 나라의 국보가 도난 당했다는 것을 일반에 알려서 해외반출을 막으려고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향완 도둑이 누구인지 별다른 실마리는 얻지 못하였다.
수사에 착수하고 두 달가량이 지났을 때 경찰은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받고는 1965년 3월 28일에 서울에 위치한 용의자의 집에서 유력 용의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체포된 용의자가 표충사 청동 은입사향완 도난사건의 진범임이 확인되어 공범 일당도 함께 검거하고 본 향완도 회수하였다.
경찰 조사 결과, 주범 송모씨와 공범 박모씨와 최모씨 일당이 1월 18일 새벽 5시 경에 표충사 유물관으로 잠입하여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을 훔쳤을 뿐만 아니라, 안양 염불암과 평창 상원사에서도 유물들을 절도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들 일당은 서울에 있는 골동품상인 이모씨에게 훔친 유물들을 팔아 넘겼고, 이모씨는 이들 일당이 파는 유물들이 절도품임을 알면서도 매수했다고 밝혀졌다.
기가 막히는 사실은 범인 일당이 본 향완을 당시 돈으로 5만 원에 이모씨에게 넘겼는데, 이를 2020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만 원쯤 된다는 점이다.[13] 더욱 기가 막히는 부분은 장물상 이모씨를 포함한 범인 일당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지금도 아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당시 일반 국민들의 문화재 보존 인식이 상당히 낮았으며 이러한 부분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밀양 표충사 청동은입사향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대정17년명청동은입사향완
- 한국 미의 재발견 - 금속공예: 청동제함은향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표충사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 두산백과: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5. 국보 제75호
향완이란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데 사용된 공양구이다. 특히 이처럼 완형(盌形)의 몸체에 나팔처럼 벌어진 자리와 원반형 받침을 지닌 형태를 향완이라 불렀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입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바깥으로 벌어진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6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명문을 새겼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향완 연구에 귀중한 편년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바깥으로 벌어진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6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명문을 새겼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향완 연구에 귀중한 편년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 본 향완 외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고려의 향완으로는 국보 제214호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288호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21호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334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778호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향완 등이 있다.[2]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금속공예 - 청동제함은향완[3]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금속공예 - 청동제함은향완[4] 출처: 밀양시청 홈페이지 - 표충사 청동은입사 향완[5] 이는 송나라의 순희 4년에 해당한다.[6]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경남 - 표충사[7]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밀양 표충사 청동은입사향완[8] 표충사(表忠寺)는 절로서는 대단히 특이하게도 경내에 유교 서원인 표충사(表忠祠)도 함께 하고 있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경남 - 표충사[9] 본 단락은 전적으로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 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의 내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법보신문 -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8.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10]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관련 문헌들에서 딱히 확인되진 않는다.[11] 출처: 동아일보 1963년 3월 18일자 기사 - 國寳巡禮(국보순례) (81) 表忠寺靑銅含銀香(표충사청동함은향)[12] 이모 계장이라고 전한다.[13] 참조: 통계청 - 화폐가치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