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version=27, uuid=b16ef97f-b363-494a-ab2a-e95ccd5f503f,
title2=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version2=23, uuid2=979147df-3a26-481f-b049-2bed6c206bdc,
title3=틀:대한민국의 국보 61~90호, version3=18, uuid3=a651288c-6ac5-4be6-aabd-d4ff8ce28b2d,
title4=틀:대한민국의 국보 91~120호, version4=16, uuid4=47b78863-c197-4fb3-8fa6-911be58d2f63,
title5=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version5=18, uuid5=38233d15-3cf9-4c93-833c-94c06a6fbf8b,
title6=틀:대한민국의 국보 151~180호, version6=15, uuid6=edf3cf60-9adb-4a8f-8ee0-0b7fbc07c52f,
title7=틀:대한민국의 국보 181~210호, version7=13, uuid7=dc5f6abf-c5c1-4679-b79e-a752e027eb8b,
title8=틀:대한민국의 국보 211~240호, version8=15, uuid8=0da4ae8e-4b56-4578-9135-01ed7dddf02a,
title9=틀:대한민국의 국보 241~270호, version9=13, uuid9=98999a90-809a-452b-9fd0-6721c558ff35,
title10=틀:대한민국의 국보 271~300호, version10=12, uuid10=d3cf8eb4-7dea-45c4-8db8-f764102672c0,
title11=틀:대한민국의 국보 301~330호, version11=21, uuid11=654db38a-ea8b-426b-a33e-245918ddd995,
title12=틀:대한민국의 국보 331~360호, version12=14, uuid12=6bc2ec27-8f76-40cf-9ef0-c2d80032b65e)]
{{{#!wiki style="margin:-12px 0" | <tablebordercolor=#315288> | }}} | ||||||||||||||
{{{#!wiki style="margin:0 -10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 1. 서울 숭례문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51 강릉 임영관 삼문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151 조선왕조실록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1.#301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 번호 없음 ] {{{#!wiki style="margin:-10px 0" | <table bordercolor=#fff,#1C1D1F> | }}}}}}}}}}}} |
|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
| |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金泉 葛項寺址 東·西 三層石塔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 6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2기 |
지정연도 | 1962.12.20 |
제작시기 |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9) |
1. 개요
金泉 葛項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통일신라시대 759년에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에 위치한 갈항사에서 조성한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2기. 1916년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경복궁 앞뜰로 옮겨졌으며,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이관 시에 석조물 공원으로 이전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높이는 동탑(東塔)은 4.3m, 서탑(西塔)은 4m이다.김천 갈항사[1]에서 조성하였고, 전형적인 8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이다. 서탑은 상륜부가, 동탑은 상륜부 및 3층 탑신, 옥개석이 현존하지 않는다.
동탑의 기단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 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
姉者 照文皇太后 君 妳在旀
妹者 敬信太王妳在也
두 탑을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법사이며, 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님이시며, 작은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이시니라.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
姉者 照文皇太后 君 妳在旀
妹者 敬信太王妳在也
두 탑을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법사이며, 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님이시며, 작은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이시니라.
탑신부에서 현재 남아 있는 유구로 보아 크게 주목되는 것은 표면에 별도의 장식물이 첨부되었던 것으로 초층 옥신석 각 면에 사천왕입상이 있었던 듯한 흔적이 보이고, 또 각 기둥 모양의 옆모서리에는 길이로 5개의 못구멍(정혈, 釘穴)이 일렬로 있다.
이렇듯 많은 못구멍은 탑신 표면에 금동판(金銅板)으로써 장식한 것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금동판을 돋을새김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물상을 압출해낸 수법을 이용한 것이다.
이 양 석탑은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각 부 구성에서 통일 초반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였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 있는 조화를 보이고 있다. 명문 또한 이두를 사용하여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므로, 이에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99호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
[1] 현재는 터만 남아 밭으로 변하였으며, 남아 있는 것으로는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본 석탑, 그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갈항사비 조각, 그리고 종종 발견되는 기와 조각 등이다. 석탑이 옮겨간 후에는 그곳에 석탑이 있었다는 표지석만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