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3:13:37

울진 봉평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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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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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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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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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1968)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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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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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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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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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51~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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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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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조사 당시 영상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蔚珍 鳳坪里 新羅碑
소재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전시관 내부 전시 / (도로명)죽변면 봉화길 15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88년 11월 4일
제작시기 524년(법흥왕11년) 추정

파일:울진 봉평 신라비 문화재청.jpg

蔚珍 鳳坪里 新羅碑

1. 개요2. 상세3. 역주4. 내용5. 외부 링크6. 국보 제242호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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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242호. 재질은 변성화강암이며, 높이는 204cm이다.

2. 상세

파일:울진_봉평리_신라비_탁본 문화재청.jpg

법흥왕 시대인 524년에 만들어졌다.

1988년 1월 20일 무렵에 농민 주두원이 논을 갈다가 발견했다. 국보급 유물인 줄은 당연히 몰랐다. 커다란 바위가 논둑에 박혀 농사에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포크레인으로 파내 들어서 도로 옆 개울가에 던져버렸다. 두 달이 지나 같은 해 3월 20일 무렵, 이장 권대선이 버려진 바위를 정원석으로 쓰려고 마침 지나가던 포크레인에 옮겨 실어 마을 옆 빈터로 옮겼다. 그러던 와중에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를 발견해서 신고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포크레인에 실리고 던져지는 동안에 비 중간쯤의 글자들이 일부 훼손돼 못 읽게 됐다고 한다. 물론 발견한 것 자체가 우연의 연속에 기적적일 만한 상황이었으니 발견자에 책임을 물을 순 없지만.

고대사는 삼국사기 등 사서 내용이 부실해서 알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신라인이 직접 기록한 이 비석은 당시 역사를 정확히 아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520년 율령 반포 기사와도 합치한다.

지금은 원래 발견된 곳에서 약 50m 떨어진 신라비 전시관 내부에 있다.[1] 바로 옆에 봉평해수욕장이 있다.

노인법(奴人法)과 장형에 대한 언급 등 당시 신라에 고정된 성문법이 존재했다는 점, 당대의 관등 체계와 지방 통치조직 및 촌락 구조, 재판 시 얼룩소를 잡는 의식행위[2], 일을 처리할 때 왕과 6부 귀족들이 의논하는 방식 등 삼국사기만으로는 알기 힘든 많은 정보를 함축하였다.

3. 역주

갑진년(524년) 정월 15일에 탁부(喙部)의 모즉지 매금왕(牟卽智寐錦王), 사탁부(沙喙部)의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 본파부(本波部)의 무부지(巫夫智) ▨[3]간지(▨干支), 잠탁부(岑喙部)의 미흔지(美昕智)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而粘[4]智) 태아간지(太阿干支),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 일독부지(一毒夫智) 일길간지(一吉干支), 탁부의 물력지(勿力智) 일길간지(一吉干支)[5], 신육지(愼肉智) 거벌간지(居伐干支), 일부지(一夫智) 태나마(太奈麻), 일이지(一尒智) 태나마, 모심지(牟心智) 나마(奈麻), 사탁부의 십사지(十斯智) 나마, 실이지(悉尒智) 나마 등이 교시하신 일이다.

별도로 교시하시기를, "거벌모라(居伐牟羅)와 남미지(男弥只)는 본래 노인(奴人)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으나 앞선 시기에 왕이 법을 크게 교시하여 주셨다.[6] 그러나 길이 좁고 막혀서 이야은성(尒耶恩城)에 마음대로 불을 내고 성을 태워 우리 대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이 한 자들이 모두 맹세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국토를 지키고 왕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대노촌(大奴村)은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나머지 일들은 여러 노인법(奴人法)에 따라 처벌하라"고 하시었다.

이에 신라의 6부는 얼룩소를 죽여 몸을 씻고 아뢰었다. 일을 맡은 대인은 탁부의 내사지(內沙智) 나마, 사탁부의 일등지(一登智) 나마, 막차(莫次) 사족지(邪足智), 탁부의 비수루(比須婁) 사족지, 거벌모라 도사(道使)인 졸차(卒次) 소사제지(小舍帝智), 실지(悉支) 도사인 오루차(烏婁次)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의 니모리(尼牟利) 일벌(一伐)[7], 미의지(弥宜智) 파단(波旦)[8], 탄지사리(䋎只斯利) 일금지(一金智)와 아대혜촌(阿大兮村) 사인(使人) 나이리(奈尒利)는 곤장 60대, 갈시조촌(葛尸條村) 사인 나이리 거▨척(居▨尺), 남미지촌(男弥只村) 사인 익사(翼糸)는 곤장 100대, 어즉근리(於卽斤利)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실지 군주(軍主)인 탁부의 이부지(尒夫智) 나마(가 일을 맡았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牟珍斯利公) 길지지(吉之智)와 사탁부의 약문(若文) 길지지이고, 글을 새긴 사람은 탁부의 술도(述刀) 소오제지(小烏帝智)와 사탁부의 모리지(牟利智) 소오제지이며, 비석을 세운 사람은 탁부의 박사(博士)이다. 이에 교시하시기를,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고 하시었다.

거벌모라의 이지파(異知巴) 하간지(下干支)[9]와 신일지(辛日智) 일척(一尺)[10]이 그해에 (일을 마치었다). 글자는 398자이다.[11]
{{{#!wiki style="text-align:right"
참고자료: #1 #2}}}

4. 내용

이 비석은 한강 유역이 고구려백제의 지배 아래 있던 때에 만들어졌다. 이 때는 신라가 아직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비석에 새겨진 문장의 어순이 한국어식이고 이두식 표기도 많다.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 첫 번째 문단은 갑진년(524) 정월 15일에 모즉지 매금왕(법흥왕)과 6부 귀족 13명이 논의해서 어떤 죄를 지은 울진 지방민들에게 곤장 60대와 100대를 판결하고 그것을 집행했다는 내용이다.
  • 두 번째 문단은 앞 문단과는 별개로, '거벌모라'와 '남미지'라는 마을의 주민들은 대가를 치르고 노인법(奴人法)이라는 법에 따라 처벌하라는 내용이다. 제대로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가 많다.
  • 세 번째 문단은 법흥왕을 비롯한 신라 6부의 관리들이 현지에 가서 위의 판결을 직접 이행하고 를 잡아 제사를 지내 하늘에 그 사실을 알렸다는 내용이다. 문단 마지막에 실지군주(悉支軍主) 이부지 나마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실지군주는 한때 이사부도 거쳐갔던 실직성군주라는 뜻으로, 이 비석이 발견된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이부지 나마는 이 사건을 총괄한 책임자로 보인다.
  • 네 번째 문단은 이 비석을 세우던 당시의 포고문과 비석을 세울 때 동원한 현지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경북 울진 지역은 파사 이사금 때인 서기 102년 처음 신라에 병합되었으나, 5세기 장수왕의 남진정책 이래 고구려가 직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며 그때그때 고구려와 신라가 밀고 당기는 전선을 형성하던 곳이었다. 장수왕 사후 고구려가 약화되고 신라가 다시 울진을 재편입한 후[12] 일부 주민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고, 신라에서 육부(六部) 회의를 열어 대인(大人)을 보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5. 외부 링크

6. 국보 제242호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7. 관련 문서



[1] 전시관을 세우기 이전에는 충주 고구려비처럼 야외에 비각을 두고 관리했었다.[2] 이는 앞선 지증왕 시기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도 나타나는 내용이다.[3] 최광식은 잡(迊)으로 판독하였다. 잡찬(迊湌, 잡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3등의 관직이었다. 한편 이것이 한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라고 판독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이렇다면 순서로 볼 때 제4등인 피진간지(佊珎干支, 파진찬)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4] 이 글자도 이견이 많다. 拈이나 𢲸으로 판독하기도 하고, 아예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5] 거칠부의 아버지이다.[6] 법흥왕 7년(520년)에 율령을 반포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7] 신라에서 지방 세력의 유력자에게 수여한 관등인 외위(外位)는 11등급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벌은 이 중 제8등급에 해당한다.[8] 마찬가지로 외위에 속하며, 제10등급이다.[9] 외위 제7등급인 간(干)에 해당한다.[10] 외위 제9등급에 해당한다.[11] 실제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명문 수를 세어보면 모두 399자로, 약간의 오차가 있다.[12] 505년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그 유명한 이사부가 실직의 군주로 취임했었다. 우산국 정벌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