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00:06:30

창경궁 빈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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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colbgcolor=#bf1400> 창경궁 빈양문
昌慶宮 賓陽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616년 (창건 추정)
1833년 (재건)
1986년 (복원)
파일:창경궁 빈양문.png
파일:창경궁 빈양문 2.png
<colbgcolor=#bf1400> 빈양문[1]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5.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창경궁 명정전후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정전의 후문 기능을 넘어 창경궁 내 합문(閤門) 역할을 했다. 합문이란 궁궐에서 행사공적 공간사적 공간의 경계로 설정된 문을 말한다.# 빈양문은 외전 일대와[2] 내전 구역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합문을 두기 적절한 장소였다.

명정전의 서쪽[3]에 있으며 남쪽으로 숭문당과 붙어있다.

‘빈양(賓陽)’ 뜻은 ‘밝음(陽)을 공경히 맞이한다(賓)’이다.

2. 역사

파일:동궐도 빈양문.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 빈양문
정확한 건립 연대는 모르지만 기록에서 빈양문이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1616년(광해군 8년)인 것을 보아 이 무렵 진행했던 창경궁 중건 공사 때 처음 지은 듯하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불탄 것을 1633년(인조 11년)에 재건했다.

이후 주로 임금이 명정전으로 행차할 때 지나거나#, 장례 때 망곡례[4]를 행하고#, 발인할 때 재궁(梓宮)[5]이 나가는 공간으로 등장했다.## 이외에 영조가 문과 식년시에서 뽑은 54명을 이곳에서 만난 기록이 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에 다시 불탄 것을 3년 뒤에 복구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일제창경궁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 때 같이 철거했다. 8.15 광복문화재관리국에서 1984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198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가 높이 솟은 형태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 문짝은 나무 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다. 가장자리에 바로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본 기둥과 약간 간격을 두고 샛기둥을 세운 뒤 거기에 달았다. 가운데 이 다니는 어칸(御間)은 조금 더 높게 만들어 신하들이 다니는 좌, 우 (협칸)과 차이를 두었다. 협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는 나무 으로 마감했으며 어칸의 본 기둥과 샛기둥 사이, 그리고 양 측면의 칸에는 중인방을 끼우고 나머지 공간을 역시 나무 판으로 막았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6]으로 입혔다. 바닥엔 전돌을 깔았다.

파일:빈양문 복도.png}}} ||
파일:빈양문 복도2.png
||
<colbgcolor=#bf1400> 빈양문과 명정전을 잇는 복도 <colbgcolor=#bf1400> 문정전까지 이어진 빈양문의 복도
명정전 뒷면에 가설된 툇마루까지 복도각을 연결하여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행차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복도는 문정전 뒷면까지 이어진다.

4. 여담

  • 합문은 고정된 게 아니라 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현직 관료가 아니면 합문이 어딘지를 잘 몰랐다. 이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창경궁에 머물 때 한 신입 사관창덕궁의 합문인 협양문에서 을 기다렸다. 하지만 임금이 거기서 나올 리 없었고, 뒤늦게야 정조가 창경궁에 있는 것을 안 사관은 빈양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건너갔다고 한다.(...)##

5. 매체에서


[1] 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정전명정전편전문정전 구역.[3] 명정전은 동향했기에 뒷면은 서쪽이 된다.[4] 望哭禮. 시신이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곡하는 예식.[5] 왕실에서 쓰는 을 말한다.[6]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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