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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 |
<colbgcolor=#315288> 경복궁 景福宮 | Gyeongbokgung Palace | |
<colcolor=#fff>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세종로)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면적 | 432,703㎡ |
건축시기 | 조선 시대, 1395년 11월 27일[1]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관리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
링크 |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
〈북궐도〉, 혜촌 김학수, 1975년 作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bf1400> 근정전 전경 |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정도전,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1395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2]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법궁)으로,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3]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정도전,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1395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中
1592년 임진왜란 때[4] 소실되어 275년간[5] 방치되다가 1865년 고종 재위 시기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중건되었다. 공사가 완료되었을 당시 건물 수는 330여 동으로, 궐내 전각 7,225칸과 후원(後苑) 내 전각 232칸 반을 합해 7,450여 칸 상당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다. 하지만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에 소수의 전각이 이전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거나 매각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대부분의 구역이 소실되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선원전 권역에 남은 9동 106칸마저 철거해버리는 등 수난을 겪었다. 복원 사업을 처음 착수한 해인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아있는 상태였으며,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사라진 전각들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복원한 전각들도 완벽하게 원형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일에도 완전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2. 구조 및 지리
<colbgcolor=#bf1400> 경복궁 위성사진[6] |
북궐도형(北闕圖形), 1907년(광무 11) 제작[7] |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8]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9]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고종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고종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고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10]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인사동길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대체로 남향으로 건축되었으나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완전한 정남향은 아니다. 당대 측량 기술의 한계로 보인다.
3. 역사 및 복원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건축물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건축물 문서 참고하십시오.5. 관람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관람 문서 참고하십시오.6. 사건 사고
6.1. 경복궁 영추문 및 담장 훼손 사건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영추문 및 담장 훼손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7. 매체
- Europa Universalis IV: 기념물로 등장한다. 3레벨을 모두 증축할 시 군주 행정력 +2라는 정신나간 스탯을 보이는 유로파의 대표적 사기 기념물이다. 그 외에 조언가 비용 감소, 한성 지역 개발비용 - 25% 등 알짜배기 성능을 자랑한다.
- 변신자동차 또봇: '덩덕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 신비아파트 특별판: 조선퇴마실록: 주 배경으로 등장했다.
- 징비록: 백성들에 의해 불타 잿더미가 되며, 광화문은 문루가 모두 박살난다.
- 혼례대첩: 경복궁 안에서 촬영한 장면들이 나온다.
-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 : 경복궁 중건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 주인공 김귀남이 전국의 포장도로 공사부터 다 하고 나서 마지막에 짓자고 계획을 바꿔 1886년 초에 완성되어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경복궁에 이주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죽기 직전에야 경복궁을 보게 생겼다고 절망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당시 기준으로 장수해서 경복궁 재건 기념 행사 당시 감격하는 모습이 나온다.[12] 해당 합의가 1869년 늦여름에 나왔기 때문에 완성까지 17년 걸린 것인데, 원 역사에서 1864~1867년에 중건하고 1868년에 경복궁에 이주한 것을 고려하면 전국 포장도로 공사를 감안해도 상당히 티스푼 공사였던 모양이다. 1863년 즉위 당시부터 개혁한다고 이런저런 기구를 만들거나 국제(헌법) 제정을 1878년에 하는 등 이래저래 바빴기 때문에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권분립도 이때 했을 정도.[13] 작중 언급을 보아 건청궁 권역은 따로 짓지 않은 것으로 추측되며, 티스푼 공사였고 개혁 정책과 서양과의 무역, 만주 연해주 개척 때문에 재정에 여유를 가지고 지어서 경희궁 해체도 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14]
8. 대중교통
- 수도권 전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
-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9. 기타
- 2018년 2월 7일,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공개구입 후 보존처리를 완료한 '경복궁도'를 최초 공개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 경복궁내 건물(전각)들의 배치 모습을 그린 족자이다. #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경복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경복궁지도(장서각), 조선국왕성지도(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 자금성에 신무문, 교태전, 건청궁 등 한자 표기까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전각이 존재한다. 둘다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가사상, 음양오행, 주역 등을 사상적 배경으로 지어진 궁궐이기 때문이다.
- 박서함은 처음 이름이 박경복이었으나 어린 시절 경복궁이라고 놀림을 받아 박승준으로 개명했다.
- 2022년 구찌가 국가유산청과의 협의를 통해 향후 3년간 경복궁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을 위한 후원을 약속했다. 2023년 5월 16일 저녁 근정전에서 '구찌 크루즈 2024 패션쇼'를 개최했다. 이는 구찌가 한국 매장 오픈 25년만에 한국에서 여는 최초의 공식 패션쇼이며 경복궁에서 열린 최초의 패션쇼이기도 하다. 앞서 2022년 11월 1일에 이곳에서 ‘코스모고니 컬렉션 서울’ 패션쇼를 개최하려 했으나 이태원 참사로 인한 국가애도기간에 따라 전날 행사를 취소한 바 있다. 오프닝 엔딩 구찌 채널 풀영상 국가유산채널 풀영상 기사1 기사2 기사3
- 궁내에 있는 사랑 경복궁 카페에서 따로 커피, 차, 식혜를 비롯한 마실 거리를 판매하기도 한다 (가격은 4천원대). 외부 음식물은 갖고 입장할 수 없으므로 다 먹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 경복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유튜브 채널도 있다.
- 2023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원들이 방문했었다.
10. 관련 문서
[1] 출처[2]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일대[3] 천도하기 전에는 개성 수창궁에서 기거했고, 천도한 뒤 경복궁이 다 지어지기 전까지는 한양부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4] 일본쪽 기록에서는 조선왕이 떠나기 전에 불을 질렀다는 언급이 있다.[5] 대중성에 비해 다른 궁궐보다 생각보다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창덕궁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고 원형 보존성도 이쪽이 더 높다. 게다가 경복궁은 19세기에 와서 아예 새로 지은 것이다.[6] 촬영된 지 다소 시간이 지난 사진이라 현재와는 약간 다르다. 사진 속에서는 향원정 일대 보수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고, 계조당 복원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이며, 광화문 월대 복원 공사와 그 앞의 사직로 곡선화 공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모습이다. 2024년 기준 향원정 보수 및 취향교 복원과 계조당, 광화문 앞 월대까지는 복원이 완료되었다.[7] 경복궁의 완전한 모습이 아닌, 건물의 실내 용도만 그린 것이다 보니 지붕의 모양, 건물 내부 모습, 건물 기단 및 계단의 모양, 기둥 및 공포는 어떻게 생겼는지 등의 세부 사항은 전혀 알 수 없다. 또 실제 건물의 배치가 틀린 것도 있는데다가 작성 당시인 1907년에 10%가량의 건물은 경운궁 중건으로 인한 이건 및 화재로 사라져서 금무(今無) 즉 이제는 없음으로 표시된 것도 꽤 있다. 그래도 이것이 다른 자료보다는 가장 정확하다보니 경복궁 복원 시 1차 자료로 기준이 된다.[8] 법궁이 사무를 볼 수 없는 경우 역할을 이어받는 보조 궁궐 이궁, 궁 밖으로 나가서 기거할 행궁 등 여러 궁궐 중 왕이 평상시에 직접 사무를 보는 중심 궁궐이다.[9]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10] 동의 이름도 세종로다.[11] 문명 5의 조선시대 궁은 창덕궁을 모티브로 했다.[12] 사족으로 고종 즉위 이후 세도가 지위를 상실한 장동 김씨가 권세를 되찾아보려고 경복궁 중건 제안을 했다가 졸지에 경복궁과 전국 도로 공사를 떠맡게 되는데, 여차저차한 끝에 토목 건설을 본업으로 하는 대재벌로 전환되어 권력 대신 재력으로 잘나가게 되었다.[13] 의회와 사법기관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지만 입법부, 행정부의 삼권분립은 1878년 헌법 제정 때 이루어졌다. 1878년 국제 당시에는 왕이 행정권은 전제적으로 행사하는 부르봉 왕정복고기에 가까운 양상을 보였고(단원제라서 왕이 상원의원 임명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1887년에 참의대부(국회의원)과 영의정 겸 총리대신을 전국 추거(선거)제로 바꾸고, 20세기에 접어들어 총리대신이 대통령에 준하는 행정부 권한을 갖게 되면서 점차 일반적인 입헌군주국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한다.[14] 작중에서 경희궁 해체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지었기 때문에 굳이 경희궁을 해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5] 추가로,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치도 잘못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