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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영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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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영추문
景福宮 迎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395년 (창건) / 1867년 (중건) / 1975년 (복원)
파일:경복궁_영추문_전경.jpg
<colbgcolor=#bf1400> 영추문[1]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서문(西門). 주로 문무백관들이 이용했다.

고종 중건 당시 현판 글씨는 허계#(許棨, 1798 ~ 1866)가, 현재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 ~ 2006)이# 썼다.

2. 이름

‘영추’는 ‘가을(秋)을 맞아(迎) 서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나타내므로, 경복궁의 서쪽 문에 ‘가을 추(秋)’ 자를 넣은 것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연추문(延秋門)'으로도 불렸다. 송강 정철은 가사 《관동별곡》에서 '연추문'으로 적었다.#

3. 역사

1395년(태조 4년)에 조선 정부에서 경복궁을 창건할 때 건립했으며# 1427년(세종 9년) 6월에 수리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다.
파일:무너진 영추문1.png
파일:무너진 영추문2.png
<colbgcolor=#bf1400> 무너진 영추문 석축
일제강점기일제가 영추문 바로 앞에 전차 선로를 부설했다. 선로 위를 오가는 전차의 진동 때문에 1926년 4월 27일에 석축이 무너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전체가 헐렸다.
파일:복원 전 영추문.png
<colbgcolor=#bf1400> 복원 전 평삼문으로 있던 영추문
광복 이후 한동안 철거된 자리에 예전처럼 성문이 아닌 3칸짜리 평대문이 놓여있었다.
<colbgcolor=#bf1400> 영추문 복원 준공을 다룬 〈[[대한뉴스|{{{#gold 대한뉴스}}}]]〉
이후 1975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만, 당시 경복궁에 주둔해있던 군부대를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50m 이전했고, 목조가 아닌 1968년에 복원한 광화문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다.[2] 이후 다시 원래대로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3단계(2026~2034)에 복원될 예정이다.#

4. 구조

  • 아치을 낸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을 두었다.#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를 달았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 내부를 전부 한 공간으로 텄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 아치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백호를 그려놓았다. 그러나 고종 때에는 기린 2마리를 그려두었다고 한다.# 문짝은 붉은색 나무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
  • 경복궁 안쪽 부분의 석축 양쪽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계단에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계단과 문루 사이의 통여장 가운데에는 전돌을 쌓은 을 두었다.#
  • 원래 건춘문과는 축이 살짝 틀어져있었다. 그러나 상술했듯 1975년 영추문 복원 공사 때 북쪽으로 50m를 옮겨 지었기 때문에 현재는 꽤 많이 틀어져있다.#

5. 여담

  •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고종 31년) 7월에 일본군경복궁을 점령할 때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물론 다른 문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일본군은 특히 침전과 가까운 영추문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자세한 것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서 참조.

}}} ||
<colbgcolor=#bf1400> 영추문 개방을 다룬 〈JTBC 뉴스
복원 후 정부에서는 한동안 닫아놓았다가 2018년 12월 6일에 일반에 개방했다. 그래서 영추문으로 관람객의 출입이 가능하다. 경복궁에서 서촌으로, 또는 그 반대로 가려면 영추문을 이용하면 훨씬 가깝게 갈 수 있으니 참조하자.
  • 2019년에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일본에 있던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영추문 현판이 검은 바탕, 흰색 글씨가 아닌 반대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 중건 당시의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파일:영추문 현판(국립중앙박물관 소장).jpg
  • 석축이 무너진 영추문을 해체할 당시 문루로 통하는 작은 벽돌문이 경복궁 자경전의 동쪽 담장으로 이전되어 보존되어 왔음이 밝혀졌다.로드뷰 문화재청은 영추문 소문(小門)이 행방불명됐고 영추문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철거. 2010년에 옛 방식대로 목조로 복원했다.[3] 신무문이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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