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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1. 궁성
사진 | 설명 |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년) 중건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 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광화문 문서 참조. | |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2월 25일 상량했다. 여담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 |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0월 25일 상량했다. 1926년 4월 27일 궁성 주변에 부설된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무너졌다가 1975년 원 자리에서 40m 내려간 남쪽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이후 다시 원래대로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2단계(2023~2034)에 복원될 예정이다.2018년 12월 6일에 43년 만에 개방했다.# | |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15년)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했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다.[1]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되었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되었다가 2006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 |
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루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
2. 외조
2.1. 정전 권역
사진 | 설명 |
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졌으며 1426년(세종 8년)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흥례문으로 개칭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가 85년 뒤인 2001년 10월 26일 복원되었다. | |
영제교(永濟橋) 경복궁의 금천교이다. 1395년(태조 4년) 9월, 경복궁이 창건될 때 만들어졌고 세종 대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되었으나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서 큰 훼손 없이 남아있었다. 이후 270여 년 간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궁궐의 금천교 역할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흥례문과 주변 행각이 철거될 때 같이 헐렸다가, 1990년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흥례문 일곽을 중건할 때 복원되었다. | |
유화문(維和門) 근정문에 들어서기 전 그 서쪽에 있으며, 궐내각사로 통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1916년에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되었다. | |
기별청(奇別廳)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2001년에 복원되었다. | |
근정문(勤政門) 근정전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었으며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 |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며,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2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년) 건설되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
2.2. 편전 권역
사진 | 설명 |
사정전(思政殿)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이후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 |
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의 동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1988년 원 자리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 |
천추전(千秋殿) 사정전의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다. 1452년(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이 37세를 일기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2.3. 궐내각사 권역
사진 | 설명 |
수정전(修政殿) 근정전 서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 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23년~2034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
3. 내조
3.1. 침전 권역
사진 | 설명 |
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희정당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 |
연생전(延生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연길당(延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응지당(膺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교태전(交泰殿)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대화재로 내전 권역이 소실되자 1920년 이건되어 창덕궁 대조전이 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 |
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2]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며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 |
흠경각(欽敬閣)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함원전(含元殿)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 |
대전 소주방(大殿 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대전(大殿)의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3]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되어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
3.2. 연침 권역
사진 | 설명 |
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 근처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4]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복안당(福安堂)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부터 남아있는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 |
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 시내의 택시 중 꽃담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 다만 일제강점기에 찍힌 유리건판과 비교했을 때, 현재의 꽃담의 일부가 미복원되어 벽돌로 막아놓은 흔적이 있으며, 벽돌로 만든 한자와 그림의 순서가 제대로 복원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지적에 문화재청은 유리건판대로 복원하려면, 꽃담을 전면해체하여 복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글자와 그림의 훼손이 심각히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 |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 |
제수합(齊壽閤) 경복궁의 건물이다. 자경전의 동북쪽에 있다. 경복궁의 전각이지만,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 경내에 있으며 용도는 확실하게 모른다. 용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자경전이나 만경전의 별당이라는 의견과, 내전에서 일하는 나인들의 거처라는 의견이 있다. 또한 왕실의 친인척들이 궁에 올 때 대기소로 썼던 곳이라는 견해도 있다.1395년(태조 4년)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는 없었고, 1865년(고종 2년)에 창건되었다. 고종 때 제수합은 지금처럼 건물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에 행각과 문이 있어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형성한 전각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행각과 문이 헐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제수합 본채는 살아남았다.2004년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이 때 땅에 묻혀있던 기단을 발굴하여 복구하였다.경복궁 1차 복원 공사 5단계(2001 ~ 2009)에 제수합의 행각이 복원될 예정이였지만 자료 부족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2차 복원 공사 3단계(2030~2038)로 밀려났다. |
3.3. 동궁 권역
사진 | 설명 |
과거 원경 사진 | 경복궁 주차장에서 동궁 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본래 한국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의 정문이다. 이후 국립 국악원 정문으로 이용되었고, 영추문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로 재건하면서 현자리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원각사의 정문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이라는 이름도 동쪽에 있는 출입문이라며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며, 건물 내역에 대한 관련 표지판조차 없다. 따라서 원 자리인 원각사 터로 이전 복원하겠다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 상황. 원각사 터는 종로구 신문로1가 57번지에 자리한 대우 건설 빌딩 일대이다. 과거 모습 사진에 나오는 흰색 근대식 건물은 1939년에 건청궁 터에 건립한 구 총독부 미술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 미술관, 전승공예관 등의 전시시설로 활용하다가 건청궁을 복원하기 위해 1998년 철거했다. 2020년 5월 경복궁 계조당 복원사업으로 해체되었고 부재는 문화재청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로 이관될 예정으로 계획하였으나 실제로 어떻게 처분되었는지는 공개하지 않아 알 수 없다. |
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생활 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이 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어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으며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 여담으로 이 자선당 건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현대식 난방용 보일러를 개발하는 데 연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들을 참조하면 된다. | |
비현각(丕顯閣)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공부방 겸 집무실로 지어진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자선당의 오른쪽에 자리해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9년 복원했다. | |
계조당(繼照堂) 1443년(세종 25년) 당시 세자인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목적으로 건춘문 안쪽에 세워졌으나. 에초에 세자의 대리청정이란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지은 건물이다보니 1452년(단종 즉위년)에 철거되었다가 400년뒤 1866년(고종 3년)에 다시 동궁 남쪽에 배치해 세운뒤 동궁의 행사장으로 사용했다. 이후 1907년 이전 북궐도형 작성전에 철거되었다가 2023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4년에 칠할 예정이다. |
3.4. 내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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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전(興福殿)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씨가 1890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 간 재공사를 시행하여# 2019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025년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 |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회광당(會光堂), 다경합(多慶閤),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 |
서장고(西醬庫) 경복궁의 장독대를 담으로 둘러싼 곳이다.경복궁의 장고는 함화당과 집경당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 나뉘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 헐린 뒤에 현재는 서쪽의 장고만을 2005년 태원전 일대를 복원할 때 같이 복원했고 용도별과 지역별로 장독을 가져다두었다. 평소에는 담장이 잠겨있어서 볼수없고 간혹가다 특별관람 때만 공개한다. | |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회루 문서 참조. | |
하향정(荷香亭) 경회루 뒤에 있는 작은 정자인데, 원래는 경복궁에 없던 건물이다. 이승만이 집권 시절 낚시와 휴식을 위해 만든 건물이다. 철거 논란이 있다. |
3.5. 빈전·혼전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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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전(泰元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남쪽에는 건숙문(建肅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숙문당(肅聞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효자로에 잠식된 서쪽의 세답방 절반을 제외하고 2005년 복원되었다. |
3.6. 건청궁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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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 |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 |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하여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6.25 전쟁 때 불탄 후 1953년에 재건할 때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었으나 2020년 복원 공사를 통해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5]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년간 진행될 예정이며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를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을 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향원정 남쪽에 발전기가 설치되었던 역사가 있다. |
4. 이건된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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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康寧殿) 1917년 11월에 창덕궁 희정당이 대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에 복원하면서 강녕전을 헐어다 세웠다. 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원래는 없던 용마루를 시멘트로 올리고 트여 있던 툇간에 문을 달았으며, 창호지를 없애고 유리창을 끼우고 내부를 서양식으로 단장하는 등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 |
교태전(交泰殿)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기 위해 1920년에 이건하였으며,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으며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이 쪽널마루로 바뀌는 등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 |
만경전(萬慶殿)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화재 이후 한동안 고종이 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가 열리기도 했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경훈각으로 변하여 현재까지 창덕궁에 남아 있다. 2차 복원 공사 3단계(2030~2038)에 복원될 예정이다. | |
문경전(文慶殿) 왕이나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魂殿)이었다. 고종초에 서쪽에 옆에 있는 회안전(會安殿)과 함께 중건되었고 1890년 신정왕후의 국장 때 신주를 모시는 용도로 사용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회안전과 함께 경운궁 선원전 권역으로 이건되어 이름이 의효전(懿孝殿)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창덕궁 신선원전 권역으로 다시 옮겨지면서 현재까지 창덕궁 의효전으로 남아 있다.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5~2041)에 복원될 예정이다. | |
만화당(萬和堂) 만경전 북쪽에 있던 건물로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건되어 함녕전으로 남아있다.[6] | |
융문당(隆文堂) 원래 신무문 밖 후원지역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군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옮겨져 있다.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하대(下臺)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감독하는 문전시(文殿試)나 망배례(望拜禮), 계회(契會)나 연회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군영의 사열식을 열기도 했다. | |
융무당(隆武堂) 융문당과 함께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옮겨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무전시(武殿試)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국왕이 시사(試射)를 하거나 군사들의 연무(鍊武)를 행하기도 했다. | |
월궁전(月宮殿)? 무량수각(無量壽閣)?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고토쿠인(高徳院)에 경복궁의 건물이라고 전해지는 간게츠도(観月堂)가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금융담보로 조선척식은행에 제공한 것을,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설립자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의 저택으로 옮겼다가 1924년 고도쿠인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신미년 봄 정학교(丁學敎)가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학교는 광화문 현판을 쓴 조선 후기의 명필로, 1871년경 현판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무량수각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복궁 내 명성황후의 원당(願堂)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북궐도형, 궁궐지, 경복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고[7], 일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월궁전(月宮殿)이라는 이름 역시 확인되지 않아 경복궁의 전각이 맞는지조차 확인이 어렵다. 정면 3칸, 측면 2칸[8]의 아담한 전각인데 경복궁배치도 및 북궐도형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러한 건물은 면복각(冕服閣), 수문장청(守門將廳), 문경전 재실(齋室) 등 몇 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전각들 위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는 시멘트와 유리창이 발라져 있어 훼손 및 변형이 심하다. 2010년 간게츠도를 한국으로 반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2022년 현재는 흐지부지되어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
5. 소실된 미복원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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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십자각(西十字閣)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처음 지으면서 같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27년(세종 9년)에 심하게 기울어져 철거했고 이후 관련 기록은 없으나,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건물인 만큼 머지않아 재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구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에 전차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제가 다시 헐었다.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서십자각을 복원 계획하려 했지만 교통 문제가 있어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했고 2차 복원 공사 5단계(2039~2045)에 복원될 예정이다. | |
| 숭양문(崇陽門) 수정전을 처음 세운 1867년(고종 4년)에 같이 지어졌다. 수정전은 건물도 크고 궐내각사와 내전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곳으로 받아들여져 부속 건물들과 영역의 격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일환으로 남쪽에 무려 3중의 행각을 두었는데 수정전 기준으로 바로 남쪽에 수정문, 그리고 그 남쪽에 영화문, 제일 바깥쪽에 숭양문(崇陽門)을 세웠으며 이 중 숭양문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부속 건물, 행각들과 함께 철거되었고 지금은 수정전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행각 내부자료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
선전관청(宣傳官廳) 무관들이 근무하면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까진 벽체가 변형된 상태로 남있었으나 도중에 훼철당하고 없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하필 아래에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기계실이 있어서 취소되었다. | |
선원전(璿源殿)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1868년 창건된 이후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선원전이 두 곳으로 늘어나면서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함께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을 훼철하면서, 1931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장충단에 짓고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고리(庫裡)로 사용하다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2차 복원 공사 3단계(2030~2038)에 복원될 예정이다. | |
경안당(敬安堂) 선원전에 딸린 부속건물로 어진을 모사하거나 선원전의 보수를 할 때 임시로 어진을 보관하는 이안청(移安廳)이다. , 1966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문화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당히 낮았던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건립을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손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경안당의 자재는 일부가 1978년 향원정의 보수에 쓰인 것으로 확인된다.선원전과 마찬가지로 2차 복원 공사 3단계(2031~2038)에 복원될 예정이다. |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조선 전기 중앙군인 오위를 통솔했던 청사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사진자료가 남아있다보니 2차 복원 공사 5단계(2039~2045)에 복원될 예정이다. | |
육우정(六隅亭) 경복궁 북쪽 서녹산에 있던 정자로, 을미사변 이후로 철거되고 없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지만 취소되었다. 정황상 복원 중요성이 떨어지고 유구를 찾아 복원하기 어려워서 그런듯하다. | |
건청궁 관문각(觀文閣) 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건립되었던 유럽식 2층 건물로 원래는 건청궁이 지어질 때 단층 한옥 건물로 관문당으로 불리다가 관문각으로 개칭했으며, 1888년 우크라이나 건축가인 사바틴의 설계하에 유럽식 2층 건물로 준공되었다. 고종이 관문각에 거처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던 대전의 계유년 옥책(玉冊)과 옥보(玉寶), 대왕대비전의 계미년 옥책과 기묘년 옥보, 중궁전의 병인년 교명(敎命)과 옥책·금보(金寶) 및 계유년 옥책, 세자궁의 을해년 교명과 죽책(竹冊) 등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었다. 또한 어진도 보관하였는데, 1897년(광무 1) 6월 15일자 관보에 경복궁 내 어진 장소로 관문각이 거론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대령이 관문각 2층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했고, 이후 경복궁이 버려지면서 관문각도 같이 버려지다가 1901년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도면 등이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기에 건청궁이 복원될 때 같이 복원되지 못했다. 참고로 2층 양관으로 준공되면서 사진에서 보다시피 2층 창문이 깨지는 등의 실무자들의 부실 시공으로 인해 훼철될 때까지 수 없이 보수 공사를 해야 했으며, 이것이 훼철의 원인으로 보인다. | |
시계탑(時計塔) 경복궁 집옥재 남쪽에 위치한 시계탑으로, 1887년 무렵에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된 시계탑이다. 설계자는 관문각을 지은 우크라이나 건축가인 사바틴이며 북궐도형에는 종각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날씨가 좋지 않을 때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위에 종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후 관문각과 같이 훼철되었으며 관문각처럼 도면이 나타나지 않으면 복원될수 없다. | |
경농재(慶農齋) 궁궐 안에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농삿일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는 '관경(觀耕)'을 행하기 위한 곳이었다. 관풍루(觀豊樓)와 대유헌(大有軒) 등 부속 전각이 딸려 있어 궁궐 내부에 조성한 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대화재 이후 경농재를 편전(便殿)처럼 사용했다. 1939년 총독 관저 신축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
6. 행방이 묘연한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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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헌(大有軒) '대유(大有)'는 오곡이 익어가는 모습을 일컫는 말로 풍년 기원에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관풍루와 나란히 경복궁 북원에 지어졌는데, 1939년 조선총독 관저 부지 신축사업으로 인해 삼청동 약수터 부근으로 이건되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그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다. 삼청동에 있는 칠보사(七寶寺)의 요사채[9]가 변형된 대유헌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 |
옥련정(玉蓮亭) 북악산 중턱에 조성한 별원 권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전망이 매우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의 어제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 경복궁은 물론 멀리 남산까지 조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련정은 총독 관저가 들어서면서 헐린 것으로 추정되는 주변 전각들과는 달리 1938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그 이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조선총독 관저 부지의 배치도와 <경무대 소식>에서 확인되는 지형지물, 그리고 남아 있는 사진들을 대조해 보았을 때 현재 청와대 경내에 있는 오운정(五雲亭)이 옥련정일 가능성이 높다. |
7. 박물관
- 경복궁에는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서남쪽 부근에 있는 경복궁역과 인접해 있다. 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동쪽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어 상대적으로 후자가 전자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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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전신은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다.[11] 1909년 순종이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 박물관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간 뒤 1945년 광복 후부터는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운영되었지만 공간이 협소해 전시와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의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 관련 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자격루의 실물 크기 복원 모형과 창덕궁에 있던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 부부의 어차가 이곳에 있다. 경복궁 전각들은 근대 이전의 나무 건축이라 전기 배선에 노출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현대적인 난방, 냉방 기구의 설치와 전시 시설을 갖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 박물관은 왕실 유물 전시실로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건물도 민속 박물관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다. 터의 경우 원래는 마굿간이었던 내사복시가 있던 자리이다. | |
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립 민족 박물관'으로 출범, 남산 구 통감 관저에 있었다가 1950년에 국립 박물관에 통합되며 자취를 감췄다가 1965년에 '한국민속관'으로 재출범하면서 경복궁 수정전에 자리잡았다가 1975년에 경복궁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입주하였다가 1993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억지로 섞어서 콘크리트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2]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박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후술하지만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해체되게 되었다. 또한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모신 건물인 선원전이 있었던 곳이다. 선원전은 일제 시기인 1932년에 장충단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절인 박문사로 팔려나갔고, 더욱이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지을 당시에 공사 과정에서 선원전의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비롯해 선원전과 주변 전각들의 복원을 위해 2030년에 철거될 예정이다. |
8.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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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관리소 현재 경복궁의 관리소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시정오주년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박물관 창고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해당 건물은 1915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쓰이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국립박물관 창고로 쓰였으며, 1953년부터는 한국전쟁으로 국립박물관이 남산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구 왕궁사무처 경복궁 관리부서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1961년부터는 문화재관리국 별관, 1971년부터 지금까지는 경복궁 관리소로 개조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은, 조선총독부 부속 건물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2010년도때 정장선 의원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는 그해에 철거하겠다고 하였지만, 아무 소식도 없고, 그자리에 계속 있는 걸로 보아 흐지부지 된걸로 보인다. |
9. 문화재
-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 국보 제223호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4호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 - 보물 제809호 경복궁 자경전(景福宮 慈慶殿)
보물 제810호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景福宮 慈慶殿 十長生굴뚝)
보물 제811호 경복궁 아미산 굴뚝(景福宮 峨嵋山 굴뚝)
보물 제812호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보물 제847호 경복궁 풍기대(景福宮 風旗臺)
보물 제1759호 경복궁 사정전(景福宮 思政殿)
보물 제1760호 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
보물 제1761호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2호 오운정(五雲亭)
[1] 중종이 조광조를 숙청하기로 결심한 후,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남곤, 심정 등 훈구 세력들을 신무문을 통해 승정원도 거치지 않고 왕궁에 들여보냈다.[2] 다만 이 설은 잘못된 설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교태전 자체는 세종 때 만들어졌고 경회루 연못을 판 것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때이기 때문[3] 북궐도형 등의 자료를 보면 처소마다 소주방이 따로 있다. 한자로는 수자간이라 음차한다.[4] 이후 자미당은 경복궁 중건때 창경궁 자경전을 옮겨서 경복궁 자경전 서쪽에다가 지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5] 대한민국 미술 대전. 문화 예술 진흥원이 주관하는 종합 미술 전시-관람 행사로 1982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로 불리기도 했다.[6] 다만 현재 건물은 1904년(광무 8년)에 화재로 탄걸 1906년(광무 10년)에 재건한 것이다.[7] 정조가 궁궐 내 원당 설립을 금지했던 일 때문에 그림에서 나타내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는데 민간신앙의 공간인 신당(神堂)이 북궐도형과 동궐도형 곳곳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북궐도형은 대한제국 말 일제가 경복궁 전각 및 재산의 효율적인 처분과 관리, 그리고 왕실 감시와 경호를 위해 주문하여 매우 상세하게 작성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 따라서 원당 건물이라고 하여 도면에서 누락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8] 한 칸은 툇간이고 한 칸만이 방(房)이다.[9] [10] 해당 사진은 옥련정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옥련정 구역의 건축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할 수 없다.[11] 국립 중앙 박물관도 제실 박물관을 전신으로 삼고 있다.[12] 이 때문에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뿌리깊은 나무(마지막회에 한함) 등 실제 경복궁에서 촬영된 드라마에는 민속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조선시대에 20세기 건축물이 목격되는 기괴한 풍경이 연출된다. 사실 세트가 아닌 실제 궁에서 촬영된 사극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는 드라마 제작진들 본의 아니게 생기는 오류다. 찬란한 여명에서는 민속박물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매표소가 노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