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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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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79호 | ← | | → | | ||||||||||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 | | |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8cb2d> 덕수궁 석조전 德壽宮 石造殿 | ||
석조전 내실 이화문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수량 / 면적 | 1동 2층, 바닥면적 1,290㎡, 연면적 3,403㎡ | |
공사기간 | 1900년 ~ 1910년 | |
건립 발의자 |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 | |
설계자 | 존 레지날드 하딩(J. R. Harding) / (외부) 로벨(Lovell) / (내부) | |
시공사 |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B] / (건물 구조체) 크리탈 회사(Crittall & Co. / (내부 인테리어) |
석조전 및 야경 사진[4] |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석조전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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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의 전각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건립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다.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 석조전 서관[5]의 북쪽에 위치한다. 1897년(광무 원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에 완공되었으니 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근대에 지은 덕수궁에는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도입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상징하고 황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서양식 궁전이 석조전이다. 동양의 전통 궁궐에서는 정전, 편전, 침전의 기능이 각각 구분되어 있던 것에 비해, 석조전은 서양의 주거 양식을 도입하여 그러한 기능을 하나의 궁전 내부로 통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2. 이름
'석조(石造)'는 '돌[石]로 만들었으므로[造]' 붙은 이름으로, 전통적인 궁궐이 목조에 기초한 것에 대비되는 이름이다. 사실 석조전은 정식으로 부여된 전각의 명칭이 아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전각의 이름을 지을 때는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석조전은 정전이나 침전의 일부가 아니며 위에 언급했듯 그 자체로 하나의 황궁이기 때문에 굳이 전각의 이름을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건축 당시에는 '석조궁전(石造宮殿)', '석궁(石宮)', '석조전당(石造殿堂)'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석조전(石造殿)'은 나중에 이러한 통칭을 정리해 붙인 것이다. 링크. 그동안 나무를 주요 건축 자재로 썼던 한국인들에게 서양처럼 건물 전체를 돌로 지었다는 것이 아마 굉장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석조'는 한국이 서양식 건물을 짓는 사회가 된, 즉, 근대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링크. 단, 2009년부터 진행한 복원 공사 도중 붉은색 벽돌을 쌓은 뒤 석재로 외관을 포장하여 건축했음을 확인했다. 즉, 이름처럼 완전히 돌로만 지은 건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식당에 가면 불투명 유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역사
3.1. 건립 단계
대한제국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건립을 발의했다. 처음에는 경희궁에 지으려 했으나 브라운 권유로 경운궁에 세웠다.[6]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의 예전 이름)으로 환궁[7]한지 한 달 채 못지난 1897년(건양 2년) 3월에 브라운이 통역관과 함께 경운궁 안 지형을 측량했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보아 이미 그 때부터 서양식 궁전 건설을 기획한 듯 하다.공사 진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었다. 1897년(건양 2년) ~ 1901년(광무 5년)에 설계 및 기초공사를, 고종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3년(광무 7년) ~ 1906년(광무 10년)에 구조공사, 마지막으로 1907년(광무 11년) ~ 1909년(융희 3년)에 내부공사를 했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명분삼아 세계 각국을 초청하여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일환으로 경운궁 내에 석조전을 건축하였다.
<colbgcolor=#e8cb2d> 하딩이 제작한 모형. 중앙 계단 등을 빼고는 현재와 유사하다. |
기초공사는 1900년(광무 4년)부터 시작했다.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8]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 陽吉) 기사를 초빙하여 1901년에 마무리했다. 자재는 창의문 근처 돌산에서 나는 화강암을 활용했다.
1902년(광무 6년)에서 1903년(광무 7년)에는 공사를 멈췄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그 이유로 정변(政變)을 꼽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9] 이후 1903년에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때 건축 주도권이 브라운에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 種大郞)[10]에게 넘어갔고 공사도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B]에서 맡았다. 이시이 슈헤이(石井周平)를 감독으로 하고 두 일본인 기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으며 1905년(광무 9년)부터는 영국인 헨리 윌리엄 데이비슨(Henry William Davidson)이 합류하여 함께 작업했다.
내부 공사는 2년이 걸렸다.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다. 배관 및 난방 시설 설치는 영국의 크리털 회사(Critall & Co.)에서 담당했고, 내부 장식과 가구 등은 역시 같은 영국의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3.2. 일제강점기
<colbgcolor=#e8cb2d> 완공 직후 모습 |
그런데 약 3달 전인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멸망했다.
그래서 처음 계획처럼 황궁으로 쓰지 못했다.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은 석조전이 불편하다며 거주하지 않았다. 단지 귀빈 접대 및 만찬을 행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colbgcolor=#e8cb2d> 1918년 석조전 로비에 모인 황실 가족. 왼쪽부터 의민태자(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 <colbgcolor=#e8cb2d> 1918년 촬영한 사진.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왼쪽이 의민태자(영친왕), 오른쪽이 순종, 순종 옆이 의친왕 |
<colbgcolor=#e8cb2d> 이왕가미술관으로 쓰이던 석조전 |
<colbgcolor=#e8cb2d> 새 이왕가미술관 건물.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
3.3. 광복 이후
<colbgcolor=#e8cb2d>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당시 중화전에서 바라 본 석조전. 가운데에 태극기가 있고 왼쪽에 성조기, 오른쪽에 소련 국기가 걸려있다. |
<colbgcolor=#e8cb2d> 석조전에서 회의하는 UN한국위원단 |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를 입어 1954년 5월에 보수했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는 국립 박물관으로,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그리고 1987년부터 2004년까지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0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덕수궁을 이미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어서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2005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개편한 뒤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석조전은 비었다.[14] 이에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할 지 아니면 원래 황궁으로 복원할 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복원하기로 하여 2009년부터 공사를 개시했다.
<colbgcolor=#e8cb2d> 석조전 내부 복원 완료 내용을 다룬 2014년 10월 7일 자 YTN 뉴스 |
4. 관람
관람장소 | 관람시간 | 관람방법 | 요금 | 휴관일 |
1, 2층 전시실 | 09:30 ~ 17:30 | 인터넷사전예약제 (제한관람, 해설사 동반) | 무료 | 매주 월요일 |
지층 전시실 | 09:30 ~ 17:30 (입장마감 17:00) | 자유관람 |
5. 구조
지층, 1층, 2층으로 나누었다. 정면 54.2m, 측면 31m, 높이 17.5m이며 연면적 약 4,122㎡(약 1,226평)의 규모이다.5.1. 외부
<colbgcolor=#e8cb2d> 신고전주의 양식. 왼쪽은 영국 버킹엄 궁전, 오른쪽은 신고전주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다. |
<colbgcolor=#e8cb2d> 정면 계단 |
- 가운데에 지층만한 높이의 계단이 있고 양 옆에는 큰 좌대를 놓았다. 계단은 맨 밑에 반쯤 땅에 묻힌 단까지 합쳐 총 18단이다. 계단 위에는 현관이 있으며 좌, 우로 방과 베란다를 둔 모습이다.
<colbgcolor=#e8cb2d> 이오니아 양식인 기둥머리 | <colbgcolor=#e8cb2d> 동측 현관과 현관의 열주 |
정면 현관과 현관의 열주 |
- 모든 기둥머리는 양 끝이 아래로 회오리 치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건물 정면과 좌, 우면 가운데 앞에 시원하게 뻗은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받친 모습으로 현관을 구성했다. 이런 현관을 포티코(portico)라고 한다. 포티코는 기둥 숫자에 따라 더 자세하게 나뉘는데, 정면 현관처럼 기둥이 6개인 경우를 헥사스타일(Hexastyle), 측면 현관처럼 4개인 건 트리스타일(tristyle)이라 한다. 석조전 포티코에 세운 기둥은 줄지어섰다(列)하여 열주(列柱)라고 하는데, 열주는 둥글지만 좌, 우 회랑의 기둥은 네모나게 각진 모습이라 차이가 있다.#
<colbgcolor=#e8cb2d> 현관 1층의 기둥 |
- 현관 1층의 가장자리 바깥 기둥은 둥글다. 기둥의 3/4는 바깥으로 나와있지만 1/4는 벽 속에 있다. 가장자리 안쪽 기둥은 반대로 1/4가 나와있고 3/4가 벽 속에 있다.
<colbgcolor=#e8cb2d> 출입문. 왼쪽은 서쪽, 가운데는 중앙, 오른쪽은 동쪽이다. |
<colbgcolor=#e8cb2d> 1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
2층 베란다 창문과 창의 윗부분 |
- 1층 베란다 창문은 위, 아래로 긴 모습이다. 창틀은 십(十)자로 만들었고 위에 삼각형 모양 박공을 단 뒤, 그 아래 양쪽에 돌 받침대를 놓았다. 창틀 상부는 아치형으로 만들고, 하부엔 두 직선 틀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작은 원형 틀을 각각 5개씩 둔 뒤 그 위에 대각선과 직선으로 무늬를 넣어 마치 부채처럼 보이게 했다. 2층 베란다 창문은 1층과 거의 같다. 그러나 창틀 위에 박공이 없고 단지 가로로 긴 석재 부재를 달았으며, 창문 윗부분이 깔끔한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다르다.
<colbgcolor=#e8cb2d> 기둥머리 위부터 순서대로 처마도리, 프리즈, 코니스 순이다. |
- 기둥머리 위로 처마도리(architrove), 프리즈(frieze), 코니스(cornice)를 얹었다. 코니스와 프리즈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네모난 부분은 마치 치아처럼 생겨서 덴틸스(dentils)라고 부른다.
<colbgcolor=#e8cb2d> 페디먼트 |
- 코니스 위, 지붕 부분은 가운데 현관과 나머지 부분이 다르다. 중앙 현관 코니스 위에는 삼각형 모양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본래 그리스 건축 양식의 페디먼트는 아르테미스 신전 항목 복원도에서 볼 수 있듯 건물 전체의 지붕으로 설치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신고전주의 양식에 와서는 건물 폭에 다 맞추지 않고 건물 중간 부분에만 돌출시키는 부분 장식 형태로 변했는데, 석조전 역시 건물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중앙 현관을 돌출 시킨 뒤 그 위에만 설치하였다.# 페디먼트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오얏꽃 잎을 장식했다.
<colbgcolor=#e8cb2d> 피니얼[15] |
- 현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코니스 위에는 중간 부위가 호리병처럼 생긴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뒤 그 위에 세로로 무늬를 낸 항아리 모양 장식을 올렸다. 이런 장식을 피니얼(finial)이라고 한다.
<colbgcolor=#e8cb2d> 기반부에서 보이는 러스티케이션 양식 |
<colbgcolor=#e8cb2d> 베란다. 왼쪽은 1층, 오른쪽은 2층이다. |
- 뒷면을 제외하고는 동, 서, 남쪽으로 베란다가 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나 아시아권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서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를 건축 양식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사실 한국 날씨는 동남아시아와 다르나 하딩이 아시아권에서 널리 쓰이던 양식대로 설계한 것이다.#
다만 한국도 여름 한정으론 필요하다
<colbgcolor=#e8cb2d> 난간. 왼쪽이 1층, 오른쪽이 2층의 난간이다. |
<colbgcolor=#e8cb2d> 지층 회랑 |
- 지층 주변을 기단부 기둥으로 둘러쌓았다. 지층도 베란다처럼 뒷면을 제외한 동, 서, 남쪽에 있다. 지층의 출입문은 가운데 가장자리 2칸과 동, 서 양쪽 끄트머리에 각각 1칸 씩 위치해있다. 지층의 창문은 별다른 장식이나 구조물이 없다.
<colbgcolor=#e8cb2d> 국립현대미술관과 이어지는 복도 |
5.2. 내부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석조전/내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colbgcolor=#e8cb2d> 2020년 덕수궁 석조전 우표 |
- 2020년 대한민국 우표의 도안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 석조전 건립에 든 돈은 약 300만 원으로, 현대 가치로 약 2500억 원이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5월에 도둑이 들어 비단 10여필을 훔쳐갔다. 고종의 유물이었다고 하며 당시 돈으로 500원 어치[16]였다고 한다.# 약 한 달 후 창덕궁경찰서[17]에서 범인을 잡았는데 알고보니 모 남작의 사위 윤형구로, 모르핀[18]에 중독되어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이후에도 공범자들을 색출하여 잡았는데 수괴는 중국인 왕림탄이며 궁전의 용품을 훔쳐서 비싸게 팔려던 목적이었다고 한다.#
<colbgcolor=#e8cb2d> 경희대학교/서울캠퍼스 본관 | <colbgcolor=#e8cb2d>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 |
계명대학교/성서캠퍼스 본관 |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 |
- 국내에 신고전주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한 비슷한 건물들이 몇 채 있다. 석조전을 모티브로 한 건물들도 있지만, 백악관 등 다른 건물들을 오마주하여 지은 것도 있다. 공교롭게 대부분 학교 건물들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경희대학교 본관과 한양대학교 구본관[20]을 비롯하여 경북대학교/대구캠퍼스 본관#과 계명대학교 본관 및 광주동신고등학교 본관을 들 수 있다. 다만 현대적인 건축물의 전면에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의 파사드만을 가져와 붙이는 형태가 많아서 대체로 건물의 모든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례나 비율 또한 어색한 경우가 많다.
<colbgcolor=#e8cb2d> AR[21] |
- 2020년 3월 SK텔레콤이 덕수궁관리소와 함께 덕수궁을 3차원 입체 표현한 어플 'AR(증강현실) 덕수궁'을 시범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 그 중 석조전과 덕수궁 대한문, 중화전과 석어당 등 네 곳을, AR로 재현한 판다 · 고양이 · 웰시코기 등과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든 AR 포토존으로 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colbgcolor=#e8cb2d> 2016년 석조전 음악회[22] |
- 2015년부터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마다 중앙홀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시간은 오후 7시부터 8시까지이다. 무료이지만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덕수궁 홈페이지나 02-751-0740로 전화하면 된다.
- 《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총영사관에서 이왕직[23]에 '석조전 2층에서 자신들의 공사관이 내려다보인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 무렵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하여 일반인들이 자연스레 석조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석조전 뒤편과 영국총영사관은 바로 마주보는 위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의 외교공관이 노출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주한영국대사관(구 영국총영사관)과 덕수궁 사이에는 나무가 대량으로 심어져있어 덕수궁에서 영국대사관을 바로보기 힘들다.#
-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궁전목적으로 지었으나 궁전으로 활용되지 못한 궁전이다.
- 의친왕의 6남이자 사동궁 제3대 궁주인 이곤(李錕)의 장남 이수는, 걸음마를 갓 땐 아기 때 덕수궁 안을 돌아다니다가 석조전 분수대에 빠져 요절하였다고 한다.
- 덕수궁 인근에 있는 웨스틴 조선 서울에선 재능기부의 형태로 석조전 건물 내외부를 청소하고 정비하는 봉사활동을 행하고 있다.
7. 대중매체
<colbgcolor=#e8cb2d> 〈명성황후〉에서 등장한 석조전 |
<colbgcolor=#e8cb2d> 석조전 로비에서 촬영한 〈덕혜옹주〉 포스터 |
석조전 로비를 재현한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화 속 장면 |
<colbgcolor=#e8cb2d> 〈차이나는 클라스〉 34회 예고편 | <colbgcolor=#e8cb2d> 〈차이나는 클라스〉 152회에 나온 석조전 |
*
<colbgcolor=#e8cb2d> 석조전 입구에서 촬영한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한 장면 |
- 의외로,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시즌 1에, 그것도 첫 회 첫 장면에 등장했다. 결혼을 앞둔 부부들이 웨딩 촬영을 하는 배경으로 나온 것. 이혼조정위원장 역의 신구가 이들을 바라보면서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A] 2008년 6월 23일 지위 박탈, 사적 124호로 통합.[A] [B] 일본 타이세이 건설의 전신.[4] 윗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석조전 문서.
아랫 사진 출처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5] 다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1938년에 일제가 지은 건물로 덕수궁의 내부에 있음에도 덕수궁의 일부라기엔 무리가 있다.[6] 경희궁은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과 운교로 연결될 정도로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어서 그곳에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7]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8] 沈宜錫. 1854 ~ 1924. 탑골공원 팔각정, 원구단, 광화문 기념비전 등을 지은 도편수로 이외에도 배재학당 강당을 비롯하여 독립문, 손탁호텔 등의 서구식 건축 공사에도 참여했다. 정동 토박이였기에 서양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일찍이 서양 건축에 눈 뜬 듯 하다.[9] 시기상 그해에 일어난 유길준 쿠데타 모의 사건일 수도 있다.[10]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한 그 사람 맞다.[B] [12] 이남주(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현손녀) 전 성심여자대학교 교수는 2014년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과 한 인터뷰에서 이방자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한) 석조전에 피카소 그림을 보러갔는데, 이방자가 아주 담담하게 "저기 저 방에서 진이 죽었어"란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13] 그 후 의민태자(영친왕) 부부가 조선에 올 때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39년이며, 이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저로부터 24년이 지난 1963년이었다.[14] 2004년과 2005년 사이 텀이 있는데, 2004년 11월 '조선 왕실 역사 박물관 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인 200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 해 8월에 개관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15] 사진 출처 - TBS 〈대한제국의 상징 "덕수궁 석조전"〉.[16] 대략 5천만원 정도.[17] 대한제국 황실(당시 이왕가)에 관한 경찰 업무를 담당하던 곳.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 1949년에 폐지되었고 경무대경찰서로 바뀌었다.[18] 당시에는 모루히네라고 불렀다.[19] 나머지는 경복궁 교태전 일곽, 창경궁 옥천교 일대,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 성정각이며 능, 원, 묘 중에서는 융건릉과 덕혜옹주 묘(홍유릉 구역) 산책로를 꼽았다.[20] 이후 역사관[21] 사진 출처 - 〈아시아투데이〉.[22] 사진 출처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3] 李王職.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의 의전 및 관련 사무 담당을 위해 설치한 기구.[24] 주인공 명성황후 역의 이미연이 하차하고 대신 최명길이 캐스팅되면서 오프닝 역시 바뀌었다.[25] 2017년 11월 1일 방송.[26]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27] 2020년 4월 8일 방송.
아랫 사진 출처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5] 다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1938년에 일제가 지은 건물로 덕수궁의 내부에 있음에도 덕수궁의 일부라기엔 무리가 있다.[6] 경희궁은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과 운교로 연결될 정도로 가깝고, 다섯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가 비어있어서 그곳에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7]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8] 沈宜錫. 1854 ~ 1924. 탑골공원 팔각정, 원구단, 광화문 기념비전 등을 지은 도편수로 이외에도 배재학당 강당을 비롯하여 독립문, 손탁호텔 등의 서구식 건축 공사에도 참여했다. 정동 토박이였기에 서양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서 일찍이 서양 건축에 눈 뜬 듯 하다.[9] 시기상 그해에 일어난 유길준 쿠데타 모의 사건일 수도 있다.[10]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한 그 사람 맞다.[B] [12] 이남주(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현손녀) 전 성심여자대학교 교수는 2014년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과 한 인터뷰에서 이방자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변한) 석조전에 피카소 그림을 보러갔는데, 이방자가 아주 담담하게 "저기 저 방에서 진이 죽었어"란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13] 그 후 의민태자(영친왕) 부부가 조선에 올 때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39년이며, 이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은 저로부터 24년이 지난 1963년이었다.[14] 2004년과 2005년 사이 텀이 있는데, 2004년 11월 '조선 왕실 역사 박물관 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인 200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 해 8월에 개관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15] 사진 출처 - TBS 〈대한제국의 상징 "덕수궁 석조전"〉.[16] 대략 5천만원 정도.[17] 대한제국 황실(당시 이왕가)에 관한 경찰 업무를 담당하던 곳.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 1949년에 폐지되었고 경무대경찰서로 바뀌었다.[18] 당시에는 모루히네라고 불렀다.[19] 나머지는 경복궁 교태전 일곽, 창경궁 옥천교 일대,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 성정각이며 능, 원, 묘 중에서는 융건릉과 덕혜옹주 묘(홍유릉 구역) 산책로를 꼽았다.[20] 이후 역사관[21] 사진 출처 - 〈아시아투데이〉.[22] 사진 출처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3] 李王職.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의 의전 및 관련 사무 담당을 위해 설치한 기구.[24] 주인공 명성황후 역의 이미연이 하차하고 대신 최명길이 캐스팅되면서 오프닝 역시 바뀌었다.[25] 2017년 11월 1일 방송.[26]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27] 2020년 4월 8일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