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1:38:49

덕수궁 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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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금천교
德壽宮 禁川橋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건축시기 창건연대 미상 (1897년 / 1902년 추정)
파일:덕수궁 금천교.png
<colbgcolor=#e3ba62> 금천교
파일:덕수궁_금천교.jpg
금천교 야경[1]
1. 개요2. 역사3. 금천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덕수궁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2]와 외부와의 경계[3]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래서 금천교 역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과 중문인 조원문[4] 사이에 있다.

2. 역사

덕수궁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궁궐[5]이 모두 불 타 월산대군[6]의 사저를 중심으로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쓴 임시 행궁이었다. 더군다나 인조 이후에는 즉조당 및 그 부속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어준 후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이었다.

그러다 1890년대 후반 고종이 이 곳으로 이어한 후 비로소 제대로 정문, 중문, 침전, 편전 등을 지었다. 그 때 금천도 팠고 금천교도 세웠다.
파일:덕수궁 금천교 원래 자리.png
<colbgcolor=#e3ba62> 초창기 덕수궁 금천과 금천교 자리
대한제국 초기 덕수궁정문인화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 정전은 지금의 즉조당인 태극전[7]이었다. 그래서 금천금천교는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다. 지금의 중화전 마당이다.

약 3년을 그렇게 있다가 1901년(광무 5년)에 제대로 된 정전이 필요하여 새로운 중화전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지의 부족으로 덕수궁 영역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인화문을 헐고 사람들의 통행이 잦던 동쪽의 대안문[8]정문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대안문과 새 중화전 사이에 중문 조원문을 지었으며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팠고 금천교를 놓았다. 이 때 금천교 다리를 옮긴 건지, 새로 지은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colbgcolor=#e3ba62> 덕수궁 금천교 복원 내용을 다룬 〈대한뉴스〉 제 1592호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차량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다. 8.15 광복 후인 1986년에 발굴한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단, 대한문을 1970년에 서쪽으로 14m 정도 이전했기 때문에 현재 대한문과 금천교가 거의 붙은 모습이다.

3. 금천

금천교 밑을 흐르던 덕수궁금천‘정릉동천(貞陵洞川)’이다.

물줄기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옛 러시아공사관 근처에서 발원하여 정동 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다른 한 갈래는 지금의 삼성플라자 부근에서 발원하여 세종대로를 따라 흘렀다. 두 물길은 덕수궁 대한문 근처에서 만났다. 합류한 물줄기를 약간 틀어 덕수궁 경내를 지나게 했으며, 이를 금천으로 삼았다. 이 물은 지금의 서울시청 앞 쪽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인화문정문이던 시절에도 정릉동천을 금천으로 사용했다. 그 때는 정동 길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바로 덕수궁 경내로 끌어들였다.

금천 역시 일제가 금천교와 함께 묻었다가 문화재관리국에서 1986년에 금천교와 같이 복원했다. 그런데 정말 흉내만 냈기 때문에 마치 웅덩이같다. 축대도 측면은 로 쌓았지만 바닥은 시멘트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는 거북이 조각상까지 배치해놓아서 사람들은 거북이 수영장이란(...) 소리까지 했었다. 그래도 시멘트가 훤히 보이는게 좀 그랬던지 최근엔 자갈을 깔아놓았다. 아니 제대로 돌 깔아서 복원을 하라고!

당연히 물도 흐르지 않으며 만약 금천에 물이 차있는 걸 봤다면 이는 온 뒤 고인 물일 가능성이 크다.

정릉동천은 현재 도랑 시늉이라도 나있는(...) 덕수궁 금천을 제외하고 전부 덮혔다.

4. 구조

  •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을 놓았다. 이 길의 너비는 마차 2대가 지나갈 만할 정도로 굉장히 넓다.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딱 봐도 어도의 높이가 양 옆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높다.
  • 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2개의 로 된 엄지기둥[9]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7개의 난간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난간을 고정하기 위해 단면이 8각형인 긴 돌을 얹었다. 기둥 머리 부분은, 모래시계 형태의 가운데를 작은 구슬로 장식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봉오리를 얹었다. 난간의 형태는 연꽃봉오리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기둥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외에는, 다른 궁궐금천교와는 다르게 서수 조각을 포함한 어떠한 장식도 없다. 그리고 높이도 다른 금천교에 비해 굉장히 낮다. 처음부터 제국 황궁의 금천교로 지은 덕수궁의 다리가 왕국 왕궁의 금천교보다 초라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 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10]를 2개 만들었다. 아치를 받치는 을 선단석이라 하는데, 선단석은 전부 금천 바닥 밑에 있어 밖에선 볼 수 없다.

5. 여담

다리 앞에 비석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있다. ‘누구던 다 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인데, 아마 후대에 어디 굴러다니던 걸 그냥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하마비는 관료들이 궁궐에 들어갈 때 가마나 말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반드시 내려야 하는 지점을 나타낸 비석이라 궐 밖에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궁궐의 앞쪽에 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3]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4] 현재는 헐리고 만 남았다.[5]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6] 성종의 형.[7] 중간에 중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2년 2층의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이 되었다.[8] 1906년 이름이 '대문'으로 바뀐다.[9] 계단의 맨 밑이나 계단참 또는 꼭대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10]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