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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흠문각 德壽宮 欽文閣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5 (정동 1-45) | |
건축시기 | 1897년 이후 (창건) / 1904년 (이건) / 철훼시기 미상 (1910년 이후 추정) |
<colbgcolor=#e3ba62> 흠문각 현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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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이다.이름 ‘흠문(欽文)’은 ‘문장(文)을 공경(欽)하는 건물’ 이란 뜻이다.#
2. 위치
1904년(광무 8년) 이후에는 중명전 서쪽으로 자리가 바뀌었는데, 그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일본인 역사학자 오다 쇼고(小田 省吾)가 지은 《덕수궁사》에는 정관헌의 남쪽에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증보문헌비고》에는 즉조당 북쪽에 있었다고 쓰여있다. 그런데 당시 정관헌 남쪽에는 함유재란 건물이 있었다. 함유재 남쪽으로는 경효전(지금의 덕홍전)이 자리했는데 정관헌과 경효전 사이에는 지형 특성 상 건물이 한 채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즉조당 북쪽에 있었다는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르나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덕수궁 건물 대부분이 1897년(건양 2년, 광무 원년)에 처음 지어진 것을 볼 때 흠문각도 그 이후에 건립한 듯 하다. 흠문각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1년(광무 5년) 9월 1일(음력 7월 19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로, 문화각에 있던 어진을 흠문각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1902년(광무 6년)에는 고종이 51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였던 순종의 예진[2]을 새로 그렸다. 그해 6월에 새 그림의 표제를 서사할 때, 고종은 어진 밑그림과 1872년(고종 9년)에 그렸던 어진을 세초하도록 지시했고 도자기에 세초한 후 남은 그림을 넣어 흠문각에서 보관하게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새 어진 중에서 면복을 입고 그린 대본(大本)과 익선관을 쓰고 그린 소본(小本)을 각각 1본 씩 흠문각에 모시게 했다.#
1904년(광무 8년)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불탔다. 흠문각에 있었던 어진과 예진들은 준명전으로 옮겨 무사했다.##
흠문각 복구 공사는 꽤 속도있게 진행되었다. 화재가 난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그해 7월 2일에 상량문 제술관 및 서사관, 현판 서사관에 각각 이근명, 김성근, 박기양이 임명받았고#, 그해 8월 20일(음력 7월 10일)에 준공했는데 이때 자리를 중명전 서쪽으로 옮겼다. 완공 5일 후 준명전에 임시로 옮겼던 어진과 예진을 새로 지은 흠문각으로 다시 옮겼다.#
4. 구조
<colbgcolor=#e3ba62> 《경운궁영건도감의궤》의 흠문각[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