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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영복당 德壽宮 永福堂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903년 추정 (창건) / 1930년대 (철훼) |
<colbgcolor=#e3ba62> 영복당 터 |
영복당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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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이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처소였다. 함녕전의 동쪽에 있었다.'영복(永福)' 뜻은 '영원한(永) 복(福)'이다.
2. 역사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언제까지 러시아공사관에만 머물 수 없었던 고종은 환궁처를 근처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정했다.1897년(건양 2년) 2월에 고종이 환궁하면서 고종을 모셨던 상궁 엄씨도 같이 경운궁으로 옮겨갔다. 엄 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뒤 정식 후궁이 되어 순빈(淳嬪), 순비(淳妃)를 거쳐 1903년(광무 7년)에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받았다. 황귀비 책봉 후 엄비의 처소로 지은 것이 영복당이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새로 중전을 들이지 않았고, 황귀비 엄씨가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했다. 영복당은 사실상 중궁전으로 기능했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보다 규모도 컸다.
1904년(광무 8년)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불탔다가 곧 재건했다. 복구 과정을 적은 기록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그해 12월에 터를 닦은 뒤 덕언당 건물을 옮겨 지었고 다음해 7월 10일에 현판을 걸면서 공사를 끝냈다는 내용이 있다.##
1911년 7월에 황귀비 엄씨가 사망한 후 그의 신주를 모시는 혼궁이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덕수궁은 비었고 1930년대 초에 덕수궁을 공원으로 바꿀 때 헐렸다.#
3. 구조
<colbgcolor=#e3ba62> 좌측은 《경운궁영건도감의궤》의 영복당. 우측은 같은 책에 실려있는 즉조당으로, 두 건물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