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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건극문 德壽宮 建極門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창건시기 미상 / 1954년 이전 (철훼) |
<colbgcolor=#e3ba62> 건극문 |
건극문과 중화문, 중화전. 맨 아래 담장에 보이는 문이 건극문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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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궁문으로 남쪽 담장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2. 역사
건극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관련 내용이 아예 없다. 원래 덕수궁 남쪽 담장에는 정문 인화문이 있었는데 1901년(광무 5년) ~ 1902년(광무 6년)에 궁 영역을 남쪽으로 넓히면서 인화문과 기존 담장을 헐고 새로 정비했다. 확실하진 않으나 아마 그 이후에 지은 듯하다. '인화문의 이름을 건극문으로 바꿨다', 또는 '인화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건극문을 세웠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인화문 문서 참조.일제강점기까지는 남아 있었는데 어느 샌가 헐렸다. 철거 시기도 알려진 게 없다. 다만, 1954년에 동국문화사에서 발행한 이철원이 지은 책 《왕궁사》에 실린 〈덕수궁지도〉에는 안보이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없앤 듯 하다.
3. 구조
- 정면 1칸, 측면 1칸이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에 용두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 공포는 초익공이었으며 기둥은 원형이었고, 주춧돌은 사각이었다. 중앙 열에 문짝을 달았으며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4. 여담
- 1926년 3월에 한 행인이 건극문 밖에서 변사체를 발견하고 서대문경찰서[2]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자살로 추정했으나#, 조사한 결과 살해당한 것이었다. 피해자는 중국인 호떡 장수 부보경이었고 범인은 땅콩[3] 행상을 하던 중국인 류보산이란 사람이었다. 류보산은 자신의 딸을 시켜 일방적으로 매음하던 중, 마침 부보경이 여성 한 명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자기 집으로 부보경을 데려갔는데, 돈이 많아 보여 술에다 초산(醋酸)을 섞어 먹인 후 부보경의 몸을 뒤져 돈을 갈취했다. 그리고 부보경이 빨리 죽지 않자 곤봉으로 때려 죽였고 그 시신을 건극문 앞에 내다 버린 것. 이후 류보산은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한 후 전라남도 영광에 숨어있다가 근 한 달 만에 잡혔고 서대문경찰서에서 인수해 갔다.#
[1]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2] 당시 덕수궁이 있는 정동은 서대문 쪽 관할이었다. 구제 실시 후에도 서대문구 소속이었다가 1975년에 중구로 편입했다.[3] 당시에는 '낙화생(落花生)'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