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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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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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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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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문 문장
건립일 <colbgcolor=#fff,#1f2023>1392년 8월 13일
창립자 태조 이성계
現 가주 이원
국가 조선
대한제국
본가 전주 이씨

1. 개요2. 고종(대한제국)3. 순종황제4. 의친왕5. 영친왕6. 항렬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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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mperial_family_of_Korea_02.jpg
<colbgcolor=#e3ba62>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大韓帝國 皇室(皇族)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명성황후의 직계비속들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고종(대한제국)

2.1. 적출

이름 익성군(翼成君) → 고종 태황제(高宗) 1852년(철종 4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아내 왕비 민씨(閔氏)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책봉) 1851년 9월 25일 ~ 1895년 8월 20일
자녀 1남 이름(??) 대군 (1871년): 4일 만에 사망[1]
1녀 이름(??) 공주 (1873년): 222일 만에 사망
2남 이름(이척) 황태자 척(皇太子 坧) → 순종 효황제(純宗) 1874년 3월 25일~ 1926년 4월 25일
3남 이름(??) 대군 (1875년): 13일 만에 사망
4남 이름(??) 대군 (1878년): 107일 만에 사망

2.2. 서출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 1843년 ~ 1928년 12월 17일
자녀 1남 이름 완효헌친왕 선 (完孝憲親王 墡), 완효헌왕(完孝憲王), 완화군(完和君) 1868년 5월 31일 ~ 1880년 2월 21일(향년 11세)
1녀 이름 옹주 1871년 ~ 1872년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 생몰년도 미상
자녀 1남 이름 의친왕 강 (義親王 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 1911년 7월 20일
자녀 1남 이름 영친왕 은(英親王 垠) → 황태자 은(皇太子 垠)[2]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후궁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이완덕(李完) 1887년 ~ 1967년 11월 11일
자녀 2남 이름 이육(堉) 1914년 ~ 1916년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 1882년 2월 23일 ~ 1943년
자녀 1남 이름 이우(1915)(堣) 1915년 ~ 1916년
후궁 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 1847년 ~ 1914년 2월 13일
자녀 1녀 이름 옹주 1879년 ~ 1880년
후궁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 1882년 9월 27일 ~ 1929년 5월 30일
자녀 1녀 이름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1989년), 이덕혜(李德惠)
후궁 삼축당 상궁 김씨(三祝堂尚宮 金氏) 김옥기(金玉基) 1890년 ~ 1970년 9월 24일
후궁 정화당 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후궁 궁인 서씨(宮人 徐氏)
후궁 궁인 김씨(宮人 金氏)
후궁 궁인 장씨(宮人 張氏)

3. 순종황제

이름 황태자 척(皇太子 坧) →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5일
아내 순명비 민씨(閔氏)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추존) 1872년 11월 20일 ~ 1904년 11월 5일
아내 황태자비 윤씨(尹氏)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년 9월 19일 ~ 1966년 2월 3일

순종은 아이를 갖지 못 했는데, 그냥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도 하고, 김홍륙의 커피 독살 미수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성불구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했고, 이후 1906년 두 번째 태자비로 순정효황후가 입궁하였다. 따로 후궁은 두지 않았다. 순종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왕실이 끊길 것을 우려한 명성황후는 고종과 귀인 장씨에게서 1877년 태어난 왕자 이강을 입궁시켜 의화군으로 봉하고, 간택을 통하여 연원군부인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의화군 이강의 후견인이 된 명성황후는 의화군 이강(후에 의친왕)이 아들을 낳으면 순종의 양자로 봉하여 왕실의 적통을 잇고자 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시해를 당하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4. 의친왕

4.1. 적출

이름 의친왕 강 (義親王 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아내 의친왕비 김숙(金淑) / 김덕수(金德修)[3] 1880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

의친왕은 적자녀를 갖지 못하였고, 후궁과 첩을 통해 12남 9녀의 자녀를 가졌다. 이 중 일제 이왕직 사무소에서 이건과 이우만을 인정하여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자녀들은 의친왕가를 잇는 6남 이곤과 의친왕비 호적에 입적된 5녀 이해경을 제외하고 종친들에게 입적되었다.

4.2. 서출[4]

측실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건(李鍵) 1909년 ~ 1990년[5]
측실 수인당 김씨(修仁堂 金氏), 김흥인(金興仁)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우(李鍝)[6] 1912년 ~ 1945년
자녀 장남 이청(李淸)[7] 1936년 4월 23일 ~
자녀 차남 이종(李淙) 1940년 11월 9일 ~ 1966년 12월 25일
2남 이름 황손 이주(李鑄) 1917년 ~ 1982년
3남 이름 황손 이곤(李錕) 1919년 ~ 1984년 의친왕 후계자
자녀 장남 이준(李準)[8] 1961년 9월 11일 ~
측실 수현당 정씨(修賢堂 鄭氏), 정운석(鄭雲石)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방(李鎊) 1914년 ~ 1951년
측실 조씨(曺氏), 조병숙(曺秉淑)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창(李鎗) 1915년 ~ 미상
측실 수덕당 이씨(修德堂 李氏), 이희춘(李喜春)
자녀 1녀 이름 황손녀 이령(李玲) 1918년 ~ 1981년
2녀 이름 황손녀 이진(李珍)[9] 1919년 2월 24일 ~ 2020년 2월 8일
측실 수완당 김씨(修完堂 金氏), 김정완(金貞完)
자녀 1녀 이름 황손녀 이찬(李瓚) 1920년 ~ 2009년
측실 수길당 박씨(修吉堂 朴氏), 박영희(朴英喜)
자녀 1녀 이름 황손녀 이숙(李琡) 1920년 ~ 미상
측실 송씨(宋氏)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광(李鑛) 1921년 ~ 1952년
측실 수경당 김씨(修慶堂 金氏), 김창희(金昌熙)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현(李鉉) 1922년 ~ 1996년
측실 김금덕(金今德) ? ~ 1975년
자녀 1녀 이름 황손녀 이공(李玜)[10] 1930년 ~
측실 함씨(咸氏), 함개봉(咸開鳳)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갑(李鉀) 1938년 ~ 2014년
자녀 장남 이원(李源)[11] 1962년 9월 23일 ~
측실 김혜수(金蕙洙)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환(李鐶) 1944년 ~
1녀 이름 황손녀 이장(李璋) 1940년 ~
2녀 이름 황손녀 이민(李玟) 1953년 ~ [12]
측실 홍정순(洪貞順)
자녀 1남 이름 황손 이석[13](李錫) 1941년 ~
2남 이름 황손 이정(李錠) 1947년 ~
1녀 이름 황손녀 이용(李瑢) 1944년 ~
2녀 이름 황손녀 이현(李現) 1950년 ~

5. 영친왕

이름 영친왕 은(英親王 垠) → 황태자 은(皇太子 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아내 마사코 여왕자행황태자비(이방자 여사)(紫行皇太子妃/李方子) 1901년 11월 4일 ~ 1989년 4월 30일
자녀 1남 이름 원손 이진(元孫 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2남 이름 회은황세손 이구(李玖)[14]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아내 줄리아 멀록, 이주아(李珠亞) 1923년 3월 18일 ~ 2017년 11월 26일
자녀 양녀 이은숙(李恩淑)[15] 1959년 ~
자녀 양자 황사손(皇嗣孫) 이원(李源)[16] 1962년 9월 23일 ~

순종의 다음 황실 직계적통은 바로 아래 동생인 의친왕이었으나, 당시 이미 성인이고 항일정신이 투철한 의친왕을 껄끄럽게 여긴 일본과 자신의 아들 영친왕이 황통을 잇길 바라던 엄귀비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영친왕은 형인 의친왕보다 20살 정도 어린 동생이지만, 순종이 황태자(皇太子)로 봉하였기에 일단 영친왕으로 황실 적통이 이어졌다. 그 후 영친왕은 일본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 결혼을 하면서 침략자 일본인이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대한황실의 적통이 흔들린다 하여 원칙대로 의친왕으로 황실의 법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흐지부지 되었다.

영친왕과 일본인 이방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 회은황세손(사시) 이구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줄리아 멀록과는 1982년 이혼했다. 양녀로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1959년 ~ )이, 사후 입적으로 황사손 이원(李源)이 있다.

2005년 이구가 타계하자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대한황실 후손들이 회의를 거쳐, 서열상 가장 높았던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이준의 사촌동생 이원이 이구에게 입적되어 제사를 책임지는 황사손에 봉무 중이다.

6. 항렬

항렬자는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로 대표되는 오행상생법을 따른다. 다만, 원래 조선 왕실에서는 효종 - 현종 - 숙종 3대를 제외하면 작명에 오행상생법을 따르지 않았다.# 당장 고종의 법적 아버지인 문조(효명세자)의 휘는 '영(旲)'인데, 그 부수인 '日'은 불 '화(火)'로 간주된다. 그러나 주자 가문이 오행상생법 작명을 따랐던 선례로 인하여, 민간에서도 성리학이 교조화되는 조선 후기가 되면, 오행상생법 작명이 절대적 기준 수준으로 일반화되었고, 황실에서도 이를 재도입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오행상생법 작명이 없던 건 아니었고, 그 후로도 오행상성법 외의 기준을 적용한 집안도 적지는 않았다.
  • 초대 황제 고종의 휘는 '형(㷗)'으로 '불 화(火)' 변이다.
  • 아들 순종의 휘는 '척(坧)', 영친왕의 휘는 '은(垠)', 의친왕은 '강(堈)', 완친왕은 '선(墡)'으로, '흙 토(土)' 변을 공유한다.
  • 손자녀 '(玖)', '(鍵)', '(鍝)', '(錕)', '(鎤)', (珍)', '(玜)', '(鉀)', '(錫)' 등은 '구슬 옥(玉)', 또는 '쇠 금(金)' 변을 공유한다. 의친왕의 자녀들 중 아들들은 '쇠 금' 변, 딸들은 '구슬 옥' 변을 썼다. '玉'은 오행상 '金'에 해당한다.
  • 증손자 '(淸)', '(淙)', '(源)', '(準)' 등은 '물 수(水)' 변을 공유한다.
  • 현손자 항렬은 '나무 목(木)' 변을 공유한다.

특기할 점은, 황실 방계들이 공유하는 항렬자(1868년 이후 덕흥대원군의 후손 전체가 사용하게 된 항렬자)와 황실 직계 항렬자의 오행이 한 단계 씩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순종의 이름은 '흙 토(土)'가 들어간 '척(坧)'이지만, 사촌형 이준용의 두 번째 명자(名字)인 '용(鎔)'에는 '토(土)' 다음 오행 성질인 '금(金)'이 들어갔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은 황실 직계에서 숙종의 아들(경종, 영조) 대의 이름부터 오행상생법을 적용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본래 효종 대부터 숙종 대까지 직계와 방계의 항렬 오행은 같았다. 그런데 경종이 태어날 때 신하들이 오행상생의 순서를 따라 작명할지 물었으나, 숙종은 단호히 거절하였다.[17] 그래서 이후 오행상생법은 적용되지 않았다가, 고종에 의해 재도입되었다. 고종은 양형 헌종의 휘 '환(烉)'의 '불화 발'을 따라 '火'를 자신 대 항렬의 오행으로 삼고, 이를 기준으로 자녀들과 후손들의 항렬 오행을 정하였다.

반면, 방계들은 직계의 항렬자와는 상관없이 계속하여 오행상생법으로 항렬자를 정하였다. 효종 대 항렬부터 이어진 오행 순서를 살펴보면, 효종 항렬(水)-현종 항렬(木)-숙종 항렬(火)-영조 항렬(土)-사도세자 항렬(金)-정조 항렬(水)-순조 항렬(木)-효명세자 항렬(火)-고종 항렬(土)-순종 항렬(金)이다. 그래서 황실 방계(고종 즉위 후로도 법적으로 계속 방계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종이 익종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인 흥선대원군의 이름(이하응: 李昰應)에 '화(火)'행인 '응(應)'이 들어갔고, 고종과 같은 항렬의 종친들 이름에 '토(土)'행인 '재(載)'가 들어간 것이다.[18] 즉, 방계는 효종 대부터 규칙을 끊김없이 지켰고, 직계는 규칙을 끊었다가 고종 대에 부활시켰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족보상으로는 방계인 흥선대원군의 일족은, 임금의 친생가라는 위치 때문인지 방계의 항렬자를 쓰면서도, 나머지 이름 글자에 황실 직계의 항렬 규칙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순종과 같은 항렬의 인물들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항렬 대 방계의 항렬자는 'O용(鎔)'인데, 항렬자가 아닌 다른 이름 글자로 직계의 항렬 오행인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사용했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 이문용(李𪣢(土 + 汶)鎔),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이 그렇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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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호를 폐작한 후에 혼인했으므로 영친왕비가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 }}}}}}}}}}}}

[1] 항문이 막힌(쇄항증) 기형아로 태어났다.[2] 사단 법인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사적으로 '의민(懿愍)'이라는 시호를 올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종묘 정전에 배향이 되어 종묘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 모셔져 있다.[3] 의친왕의 여러 서자녀를 검증, 가계를 정리했다. 서자녀들로부터는 '지밀 어머니'로 불렸다.[4] 이후부터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으로 불린다. 의친왕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아명, 호적명, 황실명을 지어줬는데, 황손들 각자의 입장, 경우에 따라 통용하는 이름이 제각각이므로 아래의 표 역시 성명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외자 이름이 황실명, '이해○'으로 된 이름이 호적명(李海○, 명목상 덕흥 대원군파 17손 항렬)이며, 그외 2음절 이름이 사동궁에서 집안 사람들끼리만 쓰던 아명이다.[5] 1930년 부친으로부터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2차대전 후 재일 한국인으로 남은 작은 아버지 영친왕과는 달리 아예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6] 6살 때 당숙인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일본군 복무 도중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해 병원에서 투병 중에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7] 운현궁을 법적으로 상속받은 흥선군의 직계이기도 하고(이우의 입적으로 인해), 이우의 공 작위도 짧게나마 물려받았던 사실상의 마지막 왕공족이다.[8] 의친왕 가문의 종주로 사동궁의 사손. 장자승계원칙상 황실 서열 1위이나, 본인은 의친왕가를 이어야 하기에 사촌동생 이원이 당숙인 이구 황세손이 후사가 없어 사후 양자로 출계하여 황사손에 봉무하게 하였다. 현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의친왕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9] 이 사람이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에 나오는 여황(女皇)이다. 이해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0] 미국 대학 강연에서 "나는 프린세스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또 황실복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해경 여사로 알려져 있다.[11] 이 사람은 황사손(皇嗣孫)으로 불리는 명목상 대한제국 황실 수장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의 명예총재이다. 봉사손은 이원을 황사손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 사용하는 명칭. 본명은 이상협이다. 2005년 당시 이구의 사후 양자로 들어가서 화제가 됐었다. # 다만 1991. 1. 1. 부터 시행된 민법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은 2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12] 큰오빠인 이건과 무려 44세나 차이난다.의친왕이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막내딸이다.[13] 가수, 방송인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 이해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 회은황세손 이구가 타계할 때 자신과 상의없이 의친왕의 9남 이갑씨의 아들 이상협(이원)을 멋대로 사후양자로 입적했다고 노발대발하여 전주이씨대종종약원 사람들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려니 해서 지금은 별다른 마찰은 없다.[14]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는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15] 이구와 이주아의 양녀.[16] 전주이씨대종약원으로부터 사후 양자로 지명되어 원래는 의친왕의 손자였으나 영친왕의 아들인 황세손 이구에게 사후 입적되어 상징적인 계승자(왕위 요구자)로서 법통을 잇게 되었다.[17] 출처: 한국고전번역원.[18] , , , , , , , , , , 등.[19]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가까운 집안은 왕공족이 되었다.[20]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먼 집안은 조선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