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7:43:57

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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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대한제국 고종의 손자
이석 | 李錫
파일:이석.jpg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
<colbgcolor=#29176e> 출생 1941년 8월 30일 ([age(1941-08-30)]세)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 사동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1]
거주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최명희길 12-6 (풍남동 3가)
승광재(承光齋)[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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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전주 이씨
해석(海錫) → 석(錫)[3]
아명 영길(英吉)
부모 부친 의친왕 이강
적모 의친왕비 김씨
생모 홍정순
형제자매 이복형제: 이건, 이우, 이해진[4], 이해직[5],
이수길[6], 이곤, 이해청[7],
이경길[8], 이해룡[9], 이해선[10]
이복남매: 이해완[11], 이해원[12], 이해춘[13],
이해숙[14], 이해경[15], 이희자[16], 이창희[17]
친남동생: 이해준[18]
친여동생: 이해란[19], 이해련[20]
배우자 최희정
자녀
슬하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이홍
차녀 - 이진[21]
학력 서울 창경초등학교
경동중학교
경동고등학교[22]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23] / 학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바오로)[24]유교(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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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련4. 여담5. 미디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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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남. 이석(李錫)은 황실 족보 상 이름이고, 본명은 이해석(李海錫)이다.

황실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그리고 현재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의 손자 중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가장 연장자이다.

2. 생애

의친왕이 65세에 낳은 늦둥이 자녀다.

196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에 입학했다. 스페인어과에 입학한 이유는 "왕실이 존재하는 스페인 공주와 결혼하기 위함"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석이 결혼하려 했던 스페인 공주라는 사람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누나인 팔라르 공주(1936 ~ 2020) 또는 여동생 마르가리타 공주(1939~)일 가능성이 높다. 팔라르는 이석보다 5살, 마르가리타는 이석보다 2살 연상이다. 참고로 팔라르 공주는 1967년에, 마르가리타 공주는 1972년에 각각 결혼했다. 이석이 대학에 입학했던 1960년[25] 당시에는 팔라르 공주와 마르가리타 공주 둘 다 미혼인 상태였다.

황족이라고 하지만 이미 황실의 모든 재산은 이승만 정권이 헌법을 어기며 강탈하여 비리에 거의 다 썼고, 그나마 남은 극소수의 재산도 순종황제 사후에 황실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 그리고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에게 돌아갔다. 이것 때문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방자 여사가 박정희로부터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받은 자금을 이방자 자신의 자선 활동에만 썼다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26] 실제로 해당 자금의 목적이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의친왕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 옥살이하는 수모를 겪고 재산을 몰수당해서 6.25 전쟁때 영양실조에 걸리며 막내딸을 얻은지 2년만에 사망했다.

생활고로 인해 대학 재학 중에도 DJ 일을 보았고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커힐 호텔에서도 밤무대 가수를 했다. 이후 방송 MC와 건전가요 가수로서 계속 활동했다. 이때 황족이 광대를 해서 돈을 번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매우 혼이 났다고 한다. 특히 당시 살아 있던 본인의 큰엄마인 순정효황후에게도 크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시아버지인 고종황제와는 다르게 사진 찍는 것까지 싫어했던 순정효황후 입장에선, 망한 황족이라지만 가수 노릇을 한다는 게 곱게 보이지 않았을 듯. 참고로 아버지인 의친왕은 1955년에 사망해서 아들이 가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순정효황후 문서를 보면, 이후 TV에 나오는 이석을 보며 상궁들이 망측해하자 "시대가 변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조카를 완전히 내치지는 않은 듯. 같이 연예계 생활을 한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가렸고(구분했고), 어떤 경우에도 서로 감정 상할만한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연예병사로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예비역 병장으로 제대했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 귀국하는 바람에 상심한 모친 홍정순 여사는 신경성 위암을 얻어 손녀인 이홍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비둘기집〉이라는 건전가요를 불러 유명해졌다. 1979년 황실을 챙겨줬던 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전두환은 이들을 궁에서 쫓아냈다. 결국 이석은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어찌어찌 영주권까지 취득했지만 결국 1989년에 귀국하여 청담동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부터 전주대학교 사학과 강사로 일하면서 전주시 소유의 승광재[27]에서 가이드를 해주고 얼마간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2월 2일 KB국민카드 광고에서 세종대왕 역할을 했다.

2013년 10월 9일, 채널A 프로그램 〈쾌도난마〉에 출연해서 자신만이 황위 계승권이 있는 정통 황손이라느니,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할 당시에 모델이 필요하자, 현존하는 황족인 이석을 모델로 삼았다는 언급을 했다.[28] 일본 천황 아키히토아베 신조 총리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역사가 바로 선다고 하면서, 일본 때문에 사라진 우리나라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죄를 받는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건 시대 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29] 거기다가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팔아댔으니 더 문제. [30] 거기에다 자기 조상 이성계왕씨 몰살을 저질렀으니 살아남은 개성 왕씨의 후손들에게 사과부터 해야한다는 비판여론도.[31]

여기까지면 노인네 망령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텐데, 명성황후 시간설을 사실인양 방송에서 주장해 버렸다. 정작 본인은 명성황후가 살아 있던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밖에도 자신의 초등학교 운동회 때 사동궁 상궁과 나인들이 잔치상을 줄줄이 내왔다고도 회고하는데 1941년생인 그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시절이 미군정 ~ 정부 수립(1948년) ~ 한국전쟁 기간인 점을 감안하면... 찾아보면 아침 방송 등에서 풀어대는 이러한 거짓 썰(?)이 한둘이 아니다. 다른 황손들이 이석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한 황족 중에 이석이 그나마 제일 웃어른인 탓도 크다.

아들이 없이 딸만 두 명인 이석은 2018년 10월 재미교포 인터넷 사업가 앤드류 리(Andrew Lee)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세자로 책봉했다. 기사에 따르면 앤드류 리를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고만 소개할 뿐, 구체적인 혈연관계는 밝히지 않았다. 앤드류 리는 2020년에 저택을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 앤드류 리가 소유한 롤스로이스 차량이 권총강도를 당했고, 운전자는 중태라고 한다.#. 앤드류 리는 최근 King Lee라는 예명의 래퍼로 활동하고 있다.

3. 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련

  • 방송인이자 미국에서 돌아온 1990년대 이후부터 방송에 종종 출연하여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주장해왔기 때문에, 구황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자주 인터뷰를 했고, 그래서 심지어는 이 사람을 제위 요구자로 아는 사람들도 많다. 이건 언론 탓도 크다. "마지막 황족 이석" 혹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후손"식으로 보도를 했지만, 실상은 대한제국이 재건된다고 해도 이 사람이 황제가 될 일은 없다. 마지막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자식 없이 죽었는데, 이구의 후계자는 이원(의친왕의 9남 이갑의 장남, 이석은 10남)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이다.[32] 의친왕계만 따진다고 해도 의친왕의 6남 이곤(의친왕의 1남 이건은 일본 귀화, 2남~5남은 종친 집안으로 양자출계하며 6남 이곤이 의친왕 가문을 잇는다.)의 아들이자 의친왕가의 종손 이준과 그 자녀들이 이석보다 제위 계승권 서열 상위에 있다. 큰형인 이우의 아들이자 본인의 장조카인 이청보다도 연하이다.
  • 현재 황실 복원 주장을 계속해서 해오고 있지만, 이에 대해 전주 이씨 종친회 내부에서는 아무런 합의 없이 혼자 일방적으로 튀는 행동을 한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많다. 특히 이석의 바로 위의 이복형인 이갑은 "황손이 스스로 이름을 파는 추태를 부리지 말고 정신차리라"는 요지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 드라마 〈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쯤 여론의 관심에 자극 받아서인지, 2006년 9월 25일에 대한제국황족회가 대한제국 존속 당시 작위를 받았으며 현존하는 의친왕의 자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던 이해원을 87세의 나이로 30대 황제에 추대했다. 관련 기사 - 한겨레 : 대한제국 황위 이해원 옹주 승계… ‘여황’ 대관식 거행 물론 이것은 정식 승계가 아닌 일종의 쇼에 불과했고, 이를 통해 여론의 지원을 얻어보려는 시도에 불과했다.[33]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대동종약원, 전주 이씨 종친회, 황실문화보존회 등은 반대 논평을 냈다.
  •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크게 이석의 황실문화보존회[34]와 갈등 가능성이 있는 구 황실 단체로는 대동종약원, 전주 이씨 종친회, 대한제국황족회 등이 있다.
  •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살아있는 대한민국의 왕자라고 칭한 적도 있다.진정한 왕자병이다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대한제()국이면 몰라도 대한민()국은 이름에서 나오듯이 엄연한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데 당연히 왕자 같은 게 있을 리가... 옳은 표현은 구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 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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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이 BBC 코리아와 가진 인터뷰 영상
  • BBC 코리아의 인터뷰에 등장 했는데, 영상에 싫어요 수도 많고 댓글들의 여론이 꽤나 싸늘하다. 특히 영상 중반부 쯤에 노인[35]경복궁 근정전옥좌를 보고 황실을 비판하며 "옛날에 도둑놈이 앉았던 자리야 저기가. 청와대랑 똑같다."며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황실을 비판했다. 이 노인은 그냥 지나가듯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며 권력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감상을 한 것 뿐이었는데, 이에 옆에 있던 이석이 대뜸 "당신은 역사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도둑놈이 앉았다고 그러냐? 나 고종황제 손자다! 도둑놈이라고 하면 어떡해. 임금을!"이라며 분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연히 현대에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고, 본인이 아직도 신분제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인 것 마냥 반말로 호통을 치는 걸 보고 많은 댓글 여론은 등을 돌렸다.

4. 여담

  • 가정적으로 평탄하지 못해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기 때문에 부인이었던 사람이 4명이다. 첫째 부인 독고정희와의 사이에서 前 탤런트 이홍(1971년생)을, 이혼 후 둘째 부인 김진옥과의 사이에서 도예가 이진(1976년생)을 얻었다. 장녀 이홍은 연예인으로 데뷔한 적이 있고[36] 황실문화선양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차녀 이진은 도예가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렇게 두 딸은 언론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차녀 이진의 인터뷰 기사[37] 이석은 〈쾌도난마〉에 출연했을 때 아들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둘째딸인 이진은 동복남동생이 있다고 했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아들이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 2019년 8월 17일 〈생방송 행복드림 로또 6/45〉 - 872회에 37대 황금손으로 출연하여 추첨 버튼을 눌렀다.
  • 2019년 12월 전주시에서 별 다른 법적 근거 없이 〈황실 관련 콘텐츠 지원〉 명목으로 연 9천만 원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원금의 대부분은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의 강의료와 활동비, 재단의 물품구입비와 홍보비 등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한옥 민박인 '승광재'를 무상으로 제공, 이 이사장이 활용토록 하고 있다. 평일 7만 원, 주말 11만 원인 이곳의 숙박료는 재단이 관리한다. 전주시는 "2010년부터 시작한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은 엄연한 문화적 활동인 만큼 '문화예술진흥에 관한 조례'를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5. 미디어에서

  • 1995년 KBS1 4부작 단막극 〈인간극장 - 왕자의 노래〉에서는 박철호가 연기했다.

6. 관련 문서



[1] #[2] 전주 한옥마을에 있으며, 건물 이름은 본인이 지은 것으로 광무제(光)의 뜻을 잇는다(承)는 의미라고 한다.[3] 원래는 항렬자에 맞춰서 이해석(李海錫)이었으나 현재는 황실 이름으로 개명했다.[4] 황실명 이방.[5] 황실명 이창.[6] 황실명 이주.[7] 황실명 이광.[8] 황실명 이현.[9] 황실명 이갑. 아명 충길. 이원 황사손의 생부이다.[10] 황실명 이환.[11] 황실명 이영.[12] 황실명 이진.[13] 황실명 이찬.[14] 황실명 이숙.[15] 황실명 이공.[16] 황실명 이장.[17] 황실명 이민.[18] 황실명 이정.[19] 황실명 이용.[20] 황실명 이현.[21] 출처 둘째 딸에 따르면 셋째 부인에게서 이미 결혼 전 낳은 아들 1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석 본인은 쾌도난마에 출연했을 때 친아들이 없다고 발언했다.[22] 17회 졸업생이다. 동창이 요시 그란도시즌으로 매우 유명한 백인천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있다.[23]서양어대학 스페인어과[24] 아버지를 따라 영세를 받았지만 현재는 성당을 잘 나가지 않는다.[25] 스페인은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 스페인국으로 명목상 왕정에 불과했다.[26] 실제 이방자 여사의 자선활동은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지원이 매우 많았다.[27]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28] 근데 이건 진행자가 은근 유도를 한 부분이며, "동상 제작자가 세종대왕 초상화에 나온 용안이 유약한 느낌이 들어 고민할 때 텔레비전에 나온 이씨를 보고 동상의 형상을 만들어 갔다"는 내용이다.[29] 황실 수장인 이원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황위와 관련 없는 이석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원의 발언을 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발언들이 많은데 이석의 발언들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기 어려운 점을 봐도 그렇다.[30] 일본이 적어도 자기들이 멸망시킨 대한제국 황족들을 후우(厚遇)하긴 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백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함이었다.[31] 물론 왕씨 몰살은 실제로는 일반적 추정보다는 규모가 작았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대략 130명대~150명대 정도로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 죽인 왕씨 외의 나머지 왕씨는 성을 바꾸거나 외가쪽 성을 따른 왕씨는 친가쪽 성으로 바꾸고 사성 왕씨는 원래 성을 쓰게 하는 조건으로 살려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조선 이씨의 몰락에 비하자면 훨씬 잔인하기는 하다. 그도 그럴게 최소한 일본은 순종을 죽이진 않았지만 이성계는 공양왕은 물론 그 후계자들까지 학살했기 때문, 심지어 자신이 즉위시킨데다가 자신의 친척이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 몰살 전에 이성계는 조작사건에 조작투표까지 벌여가며 본심이 아니었다는 쇼를 했다. 애초 조선 건국 자체가 선양도 찬탈도 아닌 애매한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과 선양이라 쳐도 그 전에 이미 피를 엄청나게 흩뿌렸다는 점에서 예견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32] 영친왕의 후사가 끊긴 상황에서, 형제인 의친왕의 손자가 황실 후계자가 되는 것 자체는 적절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왜 9남 이갑의 장남인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서열상으로 의친왕을 계승한 6남 이곤의 아들 이준 다음으로 이원이 가장 높았다. 왜냐하면 장남 이건(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은 일본으로 귀화했고, 의친왕을 계승한 6남 이곤 외에 2남부터 7남까지는 이미 각각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다른 방계 황족의 후사를 이었고(2남 이우, 3남 이방, 4남 이창, 5남 이주, 7남 이광) 8남 이현은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목상이지만 황실 후계자이니만큼 나름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다. 또한, 2020년 10월에 이원은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하여 황사손으로 지명받은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이구가 한국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열과 현실적인 이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가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33]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 여론의 반응은 냉담하거나 대부분은 무관심한 반응이었다. 결과적으로 여론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34] 과거 이 단체 이름은 황실재건XXX.[35] 모자 때문에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말이 많으나, 쓰고 있는 모자는 DMZ 모자로 파주시에서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참전용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는 별도로 이석은 할매부대를 몰고 다니는 남진처럼 베트남 전쟁에 연예병사 신분으로 끌려갔다. 이때 부상을 당하고 귀국하더니 모친이 쇼크를 받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때부터 인생이 꼬였다고 한다.[36] 2006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는 못했고, 2009년에 출연한 불꽃처럼 나비처럼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예 활동을 접었다.[37]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황실 복원을 주장하는 아버지와 이복 언니 이홍과는 달리 황실 복원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