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9176e><colcolor=#fff> 대한제국 고종의 증손 이원 | 李源 | |||
출생 | 1962년 9월 23일 ([age(1962-09-23)]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 일대) | |||
재임기간 |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이사장 | ||
2012년 5월 23일 ~ 현재 | |||
링크[1]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상협(相協) → 원(源)[2] | ||
부모 | 양부 이구 생부 이갑 생모 이경숙 | ||
형제자매 | 남동생 이정 여동생 이은영 | ||
배우자 | 최희정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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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상문고등학교 (졸업 / 6회) 뉴욕 공과대학교 (신문방송학 / 학사) | ||
경력 | HBO 프로듀서 현대방송 프로듀서 현대홈쇼핑 디지털 방송 본부장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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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지명한 대한제국의 황사손이다. '황사손(皇嗣孫)'은 '대한제국 황실의 사손[3]이라는 뜻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3대 의례인 종묘대제, 환구대제, 사직대제와 조선왕릉 제사를 관장하는 제주(祭主)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종의 둘째 황자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아들로 태어났고, 2005년 7월에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의 양자가 되었다.
이구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혈통상 가장 가까운 황실 가문인 이구의 큰아버지 의친왕계에서 양자를 들여야 했고, 황실 서열 1위인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서 사동궁 사손이 되어야 했기에 황실가족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회의를 거쳐 그 다음 서열인 이원이 '황사손(皇嗣孫)'으로 봉직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2. 제정복고에 관한 시각
2020년 궁중문화축전 프로그램에서 이원은 본인을 '황태자'로 칭한 적이 있다. 본인이 설립하고 수장을 맡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 홈페이지와 후원회원 모집 브로셔에도 본인을 '황태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원은 황실 복원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인터뷰에서 자신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본인의 책임을 다한다'고 말했다. 황사손이란 과거 민가에서 가문의 제사를 봉양하기 위해 친척 중에 봉사손이라고 뽑아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대통이었던 이구의 사망으로 발생한 제례 공백을 이원이 물려받아 모든 제례를 '봉행(奉行)'하는 것이다.이원과 달리 황실 복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의친왕의 10남인 이석[4]이나 의친왕의 차녀인 이해원[5][6] 정도가 있다.
다만 이원이 군주의 자리를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황위(왕위) 요구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국제적으로 구 왕족들(특히 유럽) 등의 폐위된 왕손들이 왕가를 잇고 있는데, 유럽의 공화국들은 일단 이들에게 명목상 왕가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요구자(Pretender)'라는 호칭은 그냥 군주였던 사람의 후손 중 군주제가 이어졌다면 그 지위를 계승했을 인물이라는 가정이지 무조건 군주의 자리를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7] 번역어가 본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주장하든 안하든 전부 다 통틀어서 작위(왕위) 요구자로 묶는 측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야 애당초 유럽하고 상황이 다르다.
더군다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왕정에 극도로 부정적이어서 황실을 배척하였고, 공화국으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 대부분이 전제군주제는 물론이고 입헌군주제에도 부정적이라 군주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구한국 자체에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북한이 당장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향후 협력에도 걸림돌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형식적으로라도 군주제 복고가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8] 그러므로 남북통일 때 구 황실이 군주제 복고를 주장해봤자 오히려 그나마의 평판도 깎이기 때문에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현재 2000년대 이후로 항상 대한민국 정계에서 나오는 10차 개헌 떡밥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제7공화국이 목표이지 황실 복원(군주제 전환)은 농담으로라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공화정 국가에 존재하는 왕 또는 족장 등 공화국이라도 사실상 관습적 군주로 간주하고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비주권군주제라는 예외도 있으나, 이 역시 국민과 군주 간 오랜 역사와 전통이 빚어낸 신뢰와 합의가 바탕이 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특이한 사례로 대한민국과는 무관하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황제 즉위식 재현을 한 것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이건 본인이 황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황사손으로서 문화 행사에서 황제 역할을 맡아서 수행한 것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있다. 이원이 수장을 맡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본인을 '황태자', 아내를 '황태자비', 아들들을 '황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대한황실문화원에서 배포하고 있는 단체 소개 브로셔에서 본인을 '황태자 이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본인의 양조부인 영친왕이 '황태자'였고, 양부 이구는 '황세손'인데 본인이 황태자가 되는 것은 전혀 예법에 맞지 않지만,[9] 주변이나 언론에서 자신을 '황태자'로 불러서 그리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황사손'보다 '황태자' 명칭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 황태손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3. 생애
3.1. 이구 사망 이전
1962년 9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의친왕의 9남 이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81년 상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아버지 이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공과대학교(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 약칭 NYIT)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졸업 후 미국 케이블 회사인 HBO에서 6년간 PD로 근무했다. 1990년 귀국 후엔 광고 회사 금강기획[10]에서 5년 동안 방송 제작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케이블 채널 현대방송에서 PD로 일했다. 당시 정보통신 발달과 함께 발전한 뉴미디어와 케이블방송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뉴미디어 사업본부로 들어갈때 면접을 본 사람이 바로 정몽헌 前 현대그룹 회장(당시에는 현대전자 대표이사)이었다고 한다.[11]
또한 결혼 관련 케이블 채널인 뷰티TV에 설립 멤버로 참여했고, HOT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관련 캐릭터 사업을 담당했으며, 그들이 주연으로 나온 3차원 입체영화 〈평화의 시대〉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후 2001년 현대홈쇼핑 개국과 동시에 창립멤버로 합류했고, 여러 팀의 부장으로 재직했다.[12]# 2002년경부터는 당시 첨단 기술로 촉망받던 유비쿼터스와 DMB 관련 공부도 열심히 했고# 간간이 언론과 사업 관련 인터뷰도 했다.##
3.2. 이구 사망 이후
2005년 7월 16일, 슬하에 후손 없이 사망한 이구의[13] 사후양자(死後養子)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으로부터 지명받았다. 그러나 현행 민법상 사후양자 제도[14]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양자 지위는 없다.[15] 양자가 된 이후 황사손(皇嗣孫)[16]으로서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전반적인 제사를 맡고 있다.<colbgcolor=#29176e> 《선원계보기략》에 실린 고종 후손의 가계도]] |
의친왕의 장남 이건(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은 일본으로 귀화했고, 의친왕가를 계승한 6남 이곤 외에 2남부터 7남까지는 이미 각각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다른 방계 황족의 후사를 이었고(2남 이우, 3남 이방, 4남 이창, 5남 이주, 7남 이광), 8남 이현은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의친왕의 6남 이곤의 아들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고, 이준 다음 서열이 바로 이원이었다. 또한 명목상이나마 황실의 적통을 잇는만큼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대기업 부장이었던 이원은 그러한 조건에도 부합했다.
양자 입적 후 삼년상을 치렀고, 현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5대 제향 등에서 '초헌관(初獻官)'을 일임하고 있다. 본인은 스스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 혹은 명예총재라고 명명하곤 했지만, 정작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2019년 1대 총재 의친왕 이강, 2대 총재 영친왕 이은, 3대 총재 회은황세손 이구로 이어지는 총재직을 정관에서 삭제한다. 그럼에도 이원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지명을 받은 황사손으로서 그 소임과 책무를 다하려고 하고 있다.[17]
2020년 이후 이원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 '황사손'이라는 직함을 '황태손'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원래 전공인 미디어 컨텐츠를 바탕으로 황실 문화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2012년 5월 23일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을 세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원래는 회사 생활과 황실 의례를 병행하려 했지만, 황실 의례가 너무 빈번하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행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회사의 경영컨설팅(management consulting)을 하는 것으로 수입을 충당한다.#
종묘제례 등 전통의식 수행 외에 황실 관련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18] 이원은 황사손 직위에 오른 이래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으나, 황실의 문화를 전통이자 문화콘텐츠의 일종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9]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2015년부터 개최된 《궁중문화축전》도 기획했다.
이원 본인이 창덕궁 낙선재[20]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매년 제안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배경은 '살아 있는 궁(宮)'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황실 복원 및 입헌군주제 관련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던 이원의 활동 중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2024년에도 국민과 나라의 평안을 염원하며 환구단 복원과 낙선재 활용에 대해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낙선재 거주를 언급했다. 직접적인 황실 복원은 아니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일반 국민들에게 황실 수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인 만큼 본인의 활동 중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가족과 후계
슬하에 아들이 2명 있다. 아들들은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을 때까지 자신들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인 것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애초에 이원 본인도 1981년 미국에 이민을 가던 시점에서야 자신의 뿌리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고 한다. 이민을 가면서 한국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어 아버지 이갑이 그때서야 제대로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이원은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황사손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아들들의 뜻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만약 승계 의사가 있다면 이원의 장남인 이권(1998년생)이 황사손이 될 것이고, 승계 의사가 없다면 차남 이영(1999년생)이 될 것이다.5. 황실적통에 대한 논란
이원은 본인이 조선왕실과 대한황실의 법통을 이어 황실의 수장이라고 주장하는 세 명의 인물 중 한 명이다. 이원을 대한제국 황실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그를 황사손으로 지명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민간 종친단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5대 제향 및 왕릉 제향의 초헌관을 일임하는 제주 역할은 인정하나, 그가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을 이은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그를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인물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의 지원을 받고 있는 황실문화재단의 총재이자 의친왕의 10남인 이석이다. 그는 "애초 순종황제 다음 황위가 바로 손아래 동생인 의친왕이 아닌, 당시 10살에 불과한 영친왕을 옹립한 것 자체가 일본의 결정이었고, 황실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으며, 그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이 침략국 일본의 왕족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결혼하여 일본인 혼혈 아들을 낳아 대한 황실의 적통을 잇게 하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래 황실의 위계대로 황통이 영친왕이 아닌 형인 의친왕으로 돌리자는 주장은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로 대중의 설득력을 얻기는 했으나, 의친왕으로 황통이 이어진다고 한들, 의친왕의 10남에 불과한 이석 본인이 황통을 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의친왕의 후계자는 6남인 이곤이고, 황실의 예법 상 이석의 조카들이 황위 서열에서 본인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당장 의친왕의 후계자 이곤의 장남인 이준이 황실 서열 1위이고, 이준의 사촌 동생인 이원이 영친왕계로 출계하여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황사손으로 봉무하고 있고, 그 외 본인보다 승계 서열이 높은 조카[21]들이 살아있다.
그러나 이석은 본인이 황실 적통이라 주장하고 있고,[22] 아들이 없이 딸만 둘[23]인 이석은 2018년 재미교포 앤드류 리(한국명 이상민)을 양자로 들여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즈에서 그를 황태자로 임명하는 의식을 치르며 이원이 황실의 수장이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한국일보》:대한제국 황세손 남가주 대저택 사다.《조선일보》:138억 미국 대저택 매입 알고보니 대한제국 황태자
이원을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단체는 대한제국황족회[24]라는 이름의 기독교계열 종교단체이다. 2005년 이구 황세손이 후사없이 죽고, 이원을 양자로 들여 황실 적통을 잇게 하자, 의친왕의 차녀 이해원은 이원의 아버지 이갑(아명 이충길)의 어머니 함씨가 당호를 받지 못한 첩이라는 점과 의친왕의 아들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이원이 황실의 적통을 잇는 것을 반대했다. 이 단체는 2006년 당시 살아있는 황실의 후손 중 가장 연장자였던 이해원(의친왕의 차녀)를 여황제로 옹립하고 대관식을 열어 대한제국 황실이 부활했다고 선언했다.KBS 뉴스:대한제국 황위 이해원 옹주 승계…‘황실 부활’ 선언 그러나 대한제국황족회라는 단체에는 정작 대한제국 황실 후손이 없고, 기독교 계열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것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들이 이원을 황사손 혹은 황실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순종효황제 다음으로 손아래 동생인 의친왕이 황통을 이었어야 했는데, 일제의 농간과 순헌황귀비의 희망, 그리고 항일정신이 투철한 의친왕을 껄끄럽게 여긴 이토 히로부미의 전략으로 20살이나 어린 영친왕이 황태자로 임명되었고, 영친왕은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이방자와 결혼해서 혼혈 아들 이구를 낳았다.영친왕이 황태자로 임명된 것은 일제가 개입하였기에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다시 황통을 의친왕으로 되돌려야 한다.
* 이원의 아버지 이갑(의친왕의 9남)의 어머니 함씨는 사동궁에서 당호를 받지 못한 첩이다.
* 이갑은 사동궁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외부에서 태어나 생모와 생활했었기에 정작 황실의 예법이나 문화를 모른다.
* 이원은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정작 황실가의 후손들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황실가의 중심이 될 수 없다.
* 대한민국은 사후양자제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원은 합법적으로 이구의 가계를 잇지 못하는 명목상 양자이다.
* 전주 이씨의 종친단체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의친왕을 1대 총재, 영친왕을 2대 총재, 이구 황세손을 3대 총재로 인정했으나, 이원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총재 혹은 명예총재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 이원의 아버지 이갑(의친왕의 9남)의 어머니 함씨는 사동궁에서 당호를 받지 못한 첩이다.
* 이갑은 사동궁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외부에서 태어나 생모와 생활했었기에 정작 황실의 예법이나 문화를 모른다.
* 이원은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정작 황실가의 후손들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황실가의 중심이 될 수 없다.
* 대한민국은 사후양자제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원은 합법적으로 이구의 가계를 잇지 못하는 명목상 양자이다.
* 전주 이씨의 종친단체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의친왕을 1대 총재, 영친왕을 2대 총재, 이구 황세손을 3대 총재로 인정했으나, 이원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총재 혹은 명예총재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통성 논란이 있다. 굳이 장자우선원칙에 따라 《선원계보기략》의 황실 가계도를 근거로 적통을 꼽자면, 고종의 장증손이자 의친왕가의 종손인 이준이 황통 승계 서열 1위가 된다. 그러나 정작 그는 황실 적통 승계에는 관심이 없고, 의친왕의 선양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우리가 잘 모르는 의친왕의 삶, 역사적 재평가 꼭 해야죠) 2005년 이구의 사망 후, 이준도 이구의 양자 후보로 언급되었으나, 황실의 어른들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논의 끝에 자신은 의친왕가 황실 가계를 계승하고, 손아래 사촌동생인 이원이 영친왕계 이구의 사후양자로서 황사손에 봉무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리고 이준은 영친왕계가 황통을 잇는 것을 존중하는 입장이다. 그는 '광복 후 많은 정치인, 학자, 독립운동가 등이 의친왕으로 황통을 복구하자는 건의를 드리러 사동궁으로 조부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비록 후계자가 되는 데 일제의 영향이 있었다고 해도 영친왕은 엄연히 순종황제가 임명한 후계자이고, 민주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선원계보》 변경은 의미도 없으며,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었기에 조부님은 황통 변경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라고 하면서, '아픈 역사도 역사로서 존중해야 한다.'라고 밝혔다.[25] 그리고 의친왕의 5녀 이해경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에서, '해방 직후 영친왕이 친일파이니 황통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두고, 황실 어른들은 "영친왕이 어려서 볼모로 끌려갔는데 이제 와서 친일파라고 세자가 아니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분노했다.'라고 서술했다.[26]
따라서 이원을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부 단체와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들은 대체적으로 이원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황사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6. 여담
- 상문고등학교 출신으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든 유하 감독이 동기라고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상문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만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유하 감독이 본인의 고교 시절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 현대홈쇼핑 아동레포츠팀 부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부하 직원들에게 젊은 감각으로 대했다고 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서 이승철의 〈희야〉와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회식 때 술을 많이 마시면 주사 없이 조용히 잤다고 한다. 물론 일할 때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 현대홈쇼핑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쉬는 날마다 맛집 탐방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colbgcolor=#29176e> 〈헬로우 황태자〉 Ep2) 〈오상진, 낙선재에 무슨 일로 오셨소? - 낙선재, 슬프지만 아름다운〉 | <colbgcolor=#29176e> 〈헬로우 황태자〉 Ep3) 〈전하! 대한제국 오얏꽃에 무슨 일이? - 못다 핀 오얏꽃, 대한제국〉 |
- 《궁중문화축전》 홍보 차원에서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일매일 불금쇼〉에 출연했다. 〈헬로우 황태자〉 프로그램과 해외 문화재 환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MC들과 여러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짓궂은 농담에도 호쾌하고 여유롭게 대했다.
<colbgcolor=#29176e>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한 황사손(이원) |
- 현대판 궁 복원되면 황제는 이사람.."17년째 적통 임무중"이라는 기사가 올라왔으나 영 반응은 좋지 않다.
- 증조할아버지인 고종을 개명군주(開明君主)로 평가했다.# 다만 "내 할아버지가 나라를 제대로 못 지켰다"는 말을 한 적도 있어서# 고종을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아닌 듯 하다. 두 기사 사이에 8년의 시차가 있어서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왕으로서 좀 적극적으로 잘했어야지 정도의 아쉬움의 표현으로 해석하면 말은 된다.
7. 참고
[1] 대한황실문화원 홈페이지 및 SNS[2] 2005년 7월 16일 황세손 이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황실의 후손들과 상의 끝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으로부터 공식 양자로 지명받고, 황사손이 되면서 항렬에 맞춰 개명하였다.[3] 가계를 계승하는 자손을 사손이라고 한다.[4] 황실 복원 및 본인 황위 계승을 가장 열정적으로 주장하며 BBC 인터뷰 등에서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대표적으로 상술한 BBC 인터뷰와 채널A 〈쾌도난마〉에서의 낭설 주장 등 구 황실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남겼다.[5] 2020년 사망했다. 드라마 〈궁〉 열풍이 불던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대한제국황족회'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의해 '제30대 대한제국 여제'로 옹립되었지만,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수가 '30대'인 것은 순종(27대)에 이어 영친왕과 이구를 각각 28대, 29대 황제로 간주한 것.[6] 엄밀히 말하면 족보와 계보도가 중요한 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이해원은 의친왕의 차녀로 태어나긴 했지만, 계동궁의 이기용에게 양녀로 가면서 황실 계보도에서는 의친왕의 딸이 아닌 남연군의 종가인 이기용의 딸이다. 어차피 의미는 없지만, 설사 여황제를 인정하더라도 황실족보상 의친왕의 딸이 아닌 이해원이 대통을 잇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딸 중에선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이 의친왕 '가문'의 첫 딸이 된다. 이해경이 미혼이었기에 의친왕비 김씨의 호적으로 들어간 유일한 딸이기 때문이다.[7] 심지어 작위 요구자 항목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군주의 자리를 거부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하일레 셀라시에의 장남이었던 암하 셀라시에. 물론 암하 셀라시에의 경우는 옹립자들(데르그 쿠데타 세력의 온건파)이 막장이라 그런 것이었지만.[8] 북한 주민들이 황실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면 통일의 구심점으로 영국, 일본처럼 나라의 상징성으로 활용하는 것 정도는 고려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므로 할 명분도, 이득도 없다.[9] 다만 이원 본인은 오히려 '황사손'이라는 명칭이 예법에 맞지 않으며 '황태자'나 '황태손'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한 것 같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사실 영친왕이나 이구의 칭호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만큼 애초에 폐지된 황실의 칭호에 대해서 예법을 따지는 것이 다소 복잡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원이 정식으로 '황태자' 또는 '황태손'을 칭하기 위해서는 양부 이구 황세손을 먼저 '황태자'나 '황태손'으로 변경해야 순서가 맞겠으나,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문화재청은 개칭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10] 정주영 시절 현대그룹의 광고기획을 위해 1982년에 설립된 기업.[11] 출처 : #.[12] 후술할 황사손 결정 당시에는 상품 제2본부 아동레포츠팀 부장이었다.#[13] 자신이 태어난 도쿄 구저택이 있었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신관 객실에 머물다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4] 직계비속 없이 사망한 사람의 입후를 위하여 배우자, 직계존속 또는 친족회 등 선정권자가 양자를 지명할 수 있는 제도로 주로 제사를 잇기 위하여 인정되었다. 조선 세종 때 도입되어 대한민국 민법도 1991년까지 사후양자를 법률상 양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호주상속'이 '호주승계'로 변경되면서 사후입양은 더 이상 법적 효력을 갖지 않게 되었다.[15] 하지만, 명목상이나마 양자로서 홍유릉 내의 회인원 제향에서도 직접 초헌(初獻)하며, 공석에서는 이구를 공식적으로 '아버님'으로 호칭한다.[16] 황사손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라는 뜻의 '봉사손(奉祀孫)'이라고만 칭한다.[17] 조선 왕실과 단순 전주 이씨의 종친회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족보와 제향 모두 분리되어 있었으나 도리어 현재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이화문(오얏꽃)을 심벌로 사용하고 조선의 5대 제향 및 조선 왕릉 제향 전반을 도맡는다. 더욱이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에 황실 숭모 사업을 시도한 민간 단체가 여럿 생기며 황손 가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오히려 종약원에서는 "황손들을 일반 전주 이씨 방계처럼 의친왕파로 분파시키자!"라는 성토까지 있었다.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은 일찍부터 왕실에서 분파해 그 후손의 수가 많은 파, 그중 특히 효령대군파의 입김이 강하다.[18] 관련 인터뷰 기사: #1, #2, #3.[19]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 현재 황실 일원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문화재 분야이다. 과거 수탈과 식민지 시절 수탈된 문화재 환수 작업은 문화재청에서도 고심하고 있는 사안이나 예산 문제로 환수가 쉽지만은 않다.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와 같은 민간기업들도 힘을 보태주며 몇몇 문화재를 국내로 반환할 수 있었는데, 황실 일원에게 이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면 최소한 황실과 관련된 문화재만큼은 보다 명분있게 반환 요구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원 본인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일본 내 일부 기관들은 시민단체 소속 신분으로는 유물을 관람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황사손으로서 직계 조상들의 유물을 보러 왔다고 말하면 적어도 실체는 확인할 수 있어 환수 활동에 도움을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사 혹은 홍보대사 자격으로 임명한다면 정부 휘하에서 움직이는 일원이기에 왕정복고 등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인부터가 자신은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부여되는 권리와 의무만 가질 뿐 왕정복고는 추호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황사손 역시 이런 지위와 비슷하게 되어 일종의 인간문화재 같은 기능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20] 순정효황후가 해방 이후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가 1989년까지 여기서 거주하다 사망했다.[21] 이석의 장조카 이준, 이원의 동생 이상우 등[22] 그의 주장은 자신이 황실복원운동을 가장 활발히 한 점, 그리고 현 시점에서 의친왕의 생존해 있는 아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는 점에서 본인이 황실 적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반 양반집의 계보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본인의 장조카가 본인보다 황실 승계 서열이 높다. 그의 직계 조상인 수양대군처럼 단종을 몰아내 죽이지 않는 한.[23] 장녀 이홍, 차녀 이진.[24] 정작 진짜 황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25] 출처: 의친왕기념사업회 블로그.[26]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259쪽.[27] 첫 번째 에피소드인 〈살아있다! 대한민국에 황태자가? - 종묘제례 주관자로서의 삶〉은 다른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없고 궁중문화축전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만 시청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