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8:54:50

이관용(1891)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1]
이관용 | 李𱘝鎔
본관 <colbgcolor=#fff,#1f2023>전주(全州)
양부 완은군
양모 평산 신씨
생부 이재택
생모 신 안동 김씨
자녀 2남 4녀
생몰기간 1891년 2월 23일[2][A] ~ 미상

1. 개요2. 이름3. 생애4. 여담

[clearfix]

1. 개요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의 서형(庶兄)인 완은군 이재선의 부인인 신씨의 양자.

원래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9대손으로,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4]의 본가 이복동생 이휘중의 증손자이다. 친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명응(李明應), 친아버지는 군수 이재택(李載宅, 1861. 11. 16. ~ ?)이다. 즉, 양아버지 이재선과는 실제 혈통상 7촌이고, 입양 전 법적 촌수로는 19촌이었다.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상 이관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추존 왕 포함)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5],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이름

파일:⿰土灌.svg
<colbgcolor=#29176e> 이관용 이름의 '관'자
이름 글자 중 '관' 자가 특이하다. '土 + 灌'인데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자이기 때문에 뜻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니코드로도 입력이 안된다.(2017년에 문자가 한중일통합한자 확장 H로 추가되었다.)

굳이 저렇게 이름지은 이유는 항렬 규칙 때문이다.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이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관용(李'土+灌'鎔)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도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과,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이관용의 사촌들인 이준용(李鎔)이문용(李(土 + 汶)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을 적용받았다.

이관용이 완은군의 양자가 되기 전인 1900년(광무 4년)에 만든 《선원속보 - 원종대왕자손록 권1》에는[6] '관' 자가 '灌'으로 적혀있다. 이를 보아 아마 '土'자는 양자 입적 후에 붙인 듯하다.

3. 생애

1891년(고종 28) 1월 15일 아버지 이재택(李載宅, 1861. 11. 16. ~ ?)과 어머니 신 안동 김씨(1860. 8. 25. ~ ?)[7]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A]

매일신보》에 따르면, 1912년 5월에 이재선양자로 입적했다.[9] 이재선은 1881년(고종 18년)에 안기영(安驥泳) 역모 사건에 엮여 사형당했는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재선의 부인 신씨가 이관용을 양아들로 들인 것이다.

공식 기록상 이관용의 존재는 《순종실록부록》에서 처음 나타난다.[10] 그런데 보면 거의 대부분 순종에게 돈을 받은 내용이다. 1921년에는 부상당해 60원을 받았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5번에 걸쳐 총 5,550원을 생활비 구조금으로 타갔다.# 이를 보아 생활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던 듯하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방탕한 생활 등으로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형편이 나빴다고 한다. 그 와중에 1915년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現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집을 팔았는데 양어머니 평산 신씨(1843. 6. 20 ~ 1922)[11]를 시흥군에 내버려둔 채 혼자 경성부로 떠났고 신씨 부인은 남의 집에 얹혀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1916년에 신씨 부인이 이관용을 파양하려고 소송을 걸었으나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한번 호주가 된 이상 권리신분을 바꾸는 것은 조선 관습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한 후 장례를 치를 때와 을 조성할 때 종척집사[12]로서 활동했다. 이후 행적은 미상이다.

4. 여담

  • 1914년에 법적 사촌형 영선군에게 토지인도소송을 제기했다. 그 내용은 양아버지 완은군이 흥선대원군에게 받은 경기도 시흥군 토지를 영선군의 아버지 흥친왕이 본인 소유로 증명수속을 했기에 그 땅을 돌려받겠다는 것. 양측은 재판을 맡은 경성지방법원 측에 화해신청을 하여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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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조선 인조의 10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양증조부 남연군이 장조(사도세자)의 서차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은신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이었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2] 음력 1월 15일.[A] 출처: 1900년(광무 4년) 제작 《선원속보 - 원종대왕자손록 권1》.[4]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1815년(순조 15년)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5] 이관용의 집안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후손인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이관용의 법적 고조부이자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이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은신군 사후에 지정된 것인데다 명확하게 연령군가에 입적시킨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하였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문서 참조.[6] 이관용의 9대조 인평대군원종(정원군)의 막내아들이자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의 양자로 입적했으므로, 인평대군 후손들은 원종 대에서 갈라진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7] 김병집(金炳集)의 딸이다.[A] [9] 1916년 3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 원문: 경긔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이통삼호 신소사(소사는 남편을 잃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는 임의 죽은 완은군 리재션(故 完恩君 李載璿)씨의 쳐로 명치십사년즁에 완은군이 작고함애 삼십여년 동안을 홀로 살아오다가 명치사십오년 오월에 신쇼사는 지금 경셩슈표뎡 팔십칠번디 리관용(水標町 八十七番地 李瓘鎔)을 양자로 삼아 동거한바...(후략)#. 현대어 풀이: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2통 3호 신소사는 이미 죽은 완은군 이재선씨의 아내로, 1881년에 완은군이 작고함에 따라 30여 년 동안을 홀로 살아오다가 1912년 5월에 신소사는 지금 경성 수표정 87번지 이관용을 양자로 삼아 동거한바...(후략).[10] 순종의 일제강점기 당시 행적을 적은 책이다.[11] 신석완(申錫完)의 딸이다.[12] 宗戚執事. 국상 때마다 종친이 맡는 직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