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22:30

이문용(1882)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1]
이문용 | 李𪣢[2]
본관 <colbgcolor=#fff,#1f2023>전주(全州)
생부 흥친왕
생모 풍산 홍씨
형제 영선군
출생 1882년 9월 4일
사망 1901년 10월 8일 (향년 19세)
부인 김용규(金鎔圭, 1879 ~ ?)
자녀 2남 1녀
장녀 - 이양일(李良一)
장남(서자) - 요절
양자 - 이해명(李海明, 1911 ~ ?)[3]
1. 개요2. 이름3. 생애4. 사망5. 여담6.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희차남이다.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이를 두고 그의 아버지 흥친왕과 형 영선군이 고종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문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4]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5],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형 영선군 이준용흥선대원군의 사손인데다[6] 황실과 실질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란 이유로 순종 때 봉군되었다.

2. 이름

파일:𪣢.svg
<colbgcolor=#29176e> 이문용 이름의 '문'자
이름 글자 중 '문'자가 특이하다. '土 + 汶'인데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자이기 때문에 뜻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저렇게 이름지은 이유는 항렬 규칙 때문이다.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이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문용(李𪣢鎔)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과,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이문용의 형 이준용(李鎔)과, 사촌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을 적용받았다.

여튼, 생소한 글자이기 때문에 현재 이문용의 납골묘[7] 묘석에는 '문' 한자가 '汶'으로 적혀있다.

3. 생애

1882년(고종 19년) 9월 4일에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년)과 1897년(광무 원년)에 명성황후 장례를 치를 때 종척집사[8]로 임명받았고,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을 거쳐 종사랑을 역임했다. 그리고 시강원시종관을 지냈다. 1898년(광무 2년)에 흥선대원군 부부가 연달아 세상을 떠나자, 당시 일본에 있던 형 이준용을 대신해 빈소를 지켰다.

4. 사망

1901년(광무 5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향년 19세. 아버지 흥친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1907년(융희 원년) 9월 12일에 사촌형 순종이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장례원 부경(掌禮院副卿)으로 추증했다.

이장을 여러 번 했다.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정문동에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융희 2년) 4월 9일에 근처에 있는 공덕리 흥선대원군 묘 오른쪽으로, 1917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로, 1948년에는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창현리 선산으로 옮겨졌다. 이후 2005년에 운현궁 4대 사손 이청[9]이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이문용 뿐 아니라 낙천군, 은신군, 흥친왕, 영선군, 이우, 이종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이 때 후손들이 그의 묘비를 서울특별시에 기증해 묘비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뜰에 있다.

5. 여담

  • 1920년 2월 19일 새벽에 그의 가족들이 살던 관훈동 집에 독립군이 와서 군자금을 받으러 왔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때문에 못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6. 가족과 후손

안동 김씨로, 교관을 지낸 김병일(金炳日)의 딸 김용규(金鎔圭)와 혼인해 딸 이양일(李良一)을 두었다. 이양일은 순태산과 결혼해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 1명이 있긴 했는데 서자인데다 요절했다.# 그래서 이문용의 대는 큰할아버지 흥완군의 양증손자이자 법적 7촌 조카인 이해명이 입적해 이었다.[11]

[1] 실제로는 조선 인조의 10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증조할아버지 남연군이 장조(사도세자)의 서차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은신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이었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 수정하지 말 것.[2] 환경에 따라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생겼다: 파일:이문용 문3.png[3] 6촌 동생 이달용의 차남.[4] 추존 왕 포함.[5] 이문용의 집안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후손인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이문용의 법적 고조부이자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이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은신군 사후에 지정된 것인데다 명확하게 연령군가에 입적시킨게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하였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문서 참조.[6] 순조 시기부터 경술국치까지 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종손들은 대대로 군 작위를 받았다.[7] 자세한 내용은 후술.[8] 국상 때마다 종친들이 임명받는 장례 관련 직책.[9] 삼촌 고종의 증손자이자, 형 영선군의 양손자.[10] 자세한 내용은 이문용 문서 참조.[11] 실제로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2대손으로(이해명의 친할아버지 완순군이 경창군파에서 흥완군에게 입적했다.), 이문용에게는 혈연 상 25촌(...) 조카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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