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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 대한제국 장조의 7대손[1] 이청 | 李淸 | ||
이름 | 청(淸) | |
출생 | 1936년 4월 23일 ([age(1936-04-23)]세) | |
도쿄부 도쿄시 도요타마군 시부야정 (現 일본국 도쿄도 시부야구 도키와마츠) | ||
아버지 | 이우 | |
어머니 | 박찬주 | |
형제 | 남동생 이종 | |
부인 | 김채영[2] | |
자녀 | 장남 이영주(1980년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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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장남이자 고종의 증손자. 어머니는 박영효의 서손녀인 박찬주이다.이우의 사망 후에 일시적으로 공위를 계승하여 '이청 공 전하'의 경칭을 받았다. 즉, 일제강점기 정식 왕공족이었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 고종의 실질적인 장손이다.
2. 생애
1936년 4월 23일에 일본 도쿄 시부야 도키와마츠에 위치한 이우 공가 도쿄 별저[4]에서 태어났다.원래는 아버지 이우를 따라 1945년 히로시마에 가야 했고 실제로 갈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기 직전에 갑작스러운 건강 이상으로 인해서 결국 아버지 혼자만 히로시마에 갔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 이우가 장남까지 일본에 끌려가지 않도록 일부러 건강 이상을 유도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청은 본인의 회고록을 통해서 이를 부정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대한제국 황실에 극히 적대적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이 일찍 사망하자 웃기게도 구 황실의 후손인 이청을 자신의 양자로 달라고 전주 이씨 가문에 요청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측에서는 방계인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에게 황실의 직계 자손을 양자로 들여보낼수는 없다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항렬이 안 맞았다. 이승만과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이고 이청이 이방원의 21대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항렬상 고조부 - 현손뻘 차이가 난다. 이승만은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위치한 마케트대학교(토목공학과)와 드폴대학교 대학원(공학과)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의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에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운현궁의 마지막 주인이기도 했는데, 1993년에 그는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했다.
2005년 7월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구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구황실인 전주 이씨 가문의 적통을 누가 이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고종의 자녀들 중 순종은 자녀가 없었고 영친왕의 자손은 이구의 사망으로 대가 끊겼기 때문에 고종의 후손은 의친왕의 자손들밖에 남지 않았다. 의친왕의 12명의 아들 중 장남 이건은 모모야마 켄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했으므로, 일본으로 귀화한 이건의 자손들을 제외한다면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장남 이청이 생존해있는 고종의 직계 자손 중 장자 승계 순위가 가장 높았다. 그러나 족보상으로는 이청의 아버지인 이우가 방계황족인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에게 입적했고, 의친왕의 3남 이방은 소현세자파 이기손에게, 4남 이창은 은전군파 이헌용에게, 5남 이주는 인평대군파 이인용에게 입적하고, 6남 이곤은 의친왕의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이어야 했고, 7남 이광은 흥녕군파 이기용에게, 8남 이현은 평생 독신이었기에, 의친왕의 9남인 이갑의 장남 이원이 이구의 양자로 입적하여 전주 이씨 가문 수장과 대한제국 구 황실 수장 자리를 승계받았다. 다만 민법상 사후양자제도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구 사망 당시 이 승계에 대해 상당히 논란이 많았다. 특히 의친왕의 10남 이석은 당시 이원의 승계를 극구 반대하여 승계를 강행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측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청 본인은 전주 이씨 가문과 황실 관련 일에 일절 나서지 않고 있다.
2018년에 흥선대원군묘를 기증한 공으로 경기도로부터 직접 가서 감사패를 받아야 했으나 당시 이청 본인이 병석에 있어서 13살 연하의 아내가 대신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2017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도 기부한 데다가 2018년 기사에서 그가 자신의 생전에 황실의 재산이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관리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 이우와 동생 이종[5]의 묘 근처에 자신의 묫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었다.
[1] 실제로는 대한제국 고종의 친증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이우가 고종의 친조카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영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흥선대원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인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 장조 - 은신군 - 남연군 - 흥선헌의대원왕 - 흥친왕 - 영선군 - 이우 - 이청.[2] 1949년생. 1971년 결혼.[3] 운현궁 종손 신분으로 당숙인 이준, 고모할머니인 이해경과 함께 제주도에 방문한 적 있다. 현재 의친왕기념사업회에 사무총장 신분으로 자주 참석하고 있다. 의친왕의 실질적인 장증손이다. 이청은 즉 의친왕의 실질적인 장손자이나 아버지 이우가 운현궁으로 출계하면서 사촌동생 이준이 사동궁 사손이 되었다.[4] 현 궁내청 보관 기록에 의하면 도쿄 공저의 자세한 위치도 나오는 데 당시 공가 도쿄 별저 주소는 도쿄도 시부야구 도키와마쓰초 101번지. 현재 이곳은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시부야 캠퍼스 중등부 인근이라고 한다.[5] 1966년에 미국 유학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