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5 14:58:07

창덕궁 대조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 왕궁의 내정전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 康寧殿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창경궁 통명전
昌慶宮 通明殿
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경희궁 융복전
慶熙宮 隆福殿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 交泰殿
경희궁 회상전
慶熙宮 會祥殿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대한제국 황궁의 내정전
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파일:chalogo2.png 대한민국의 보물
815호 816호 817호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선원전
파일:GROK_ICON.png 대한민국 보물 제816호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920년 중건
1. 소개2. 대조전의 용도3. 역사4. 특징
4.1. 조선시대 대조전의 모습4.2. 1920년 이후 재건 된 대조전의 모습
5. 부속 건물
5.1. 흥복헌5.2. 융경헌5.3. 함원전5.4. 청향각5.5. 경훈각5.6. 함원전5.7. 지금은 사라진 건물
5.7.1. 집상전5.7.2. 양심합5.7.3. 관리합
6.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1. 소개

파일:창덕궁 대조전1.png
대조전 사진

昌德宮 大造殿

조선시대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의 침전이다.

위치는 내전에 속한 편전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동편으로 흥복헌(興福軒), 서편으로 융경헌(隆慶軒)이 바로 붙어 있고, 서북쪽엔 경훈각(景薰閣)이 복도로 이어져 있다.

현판순조의 친필이다.

2. 대조전의 용도

흔히 희정당의 침전, 대조전을 왕비의 처소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되었다. 일단 희정당은 정식 침전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희정당의 용도를 참조.

물론 대조전에서 왕비가 살았던 것은 맞다. <궁궐지(宮闕志)>에서도 대조전을 '대내곤전정당(大內坤殿正堂)'이라 소개하고 있고.[1] 그러나 실제로는 왕비만 머문 것이 아닌, 도 같이 거주했던 것으로 봐야한다.

근거는 많다. 아래 설명하겠지만, 대조전의 옛 이름은 양의전(兩儀殿)으로 세조가 지은 이름인데, 이 때 양의전을 정전(正殿)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정전은 내전의 으뜸가는 전각을 말하며 이는 당연히 임금이 머무는 을 말한다. 그리고 5명의 임금[2]이 이 곳에서 승하했고, 경종 역시 중병에 걸려 누웠을 때 약방 도제조들이 이 곳에서 진료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순조가 대조전을 대전(大殿)의 침전, 즉 임금이 머무는 침전이라 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동 침실과 서 침실의 이름을 각각 따로 지은 것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이 살지 않는데 굳이 한 건물 이름을 구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동쪽은 양(陽)을 상징하기에 남성임금이, 서쪽은 음(陰)을 나타내기에 여성왕비가 머물렀다. 실제로 순종황제순정효황후가 그렇게 살았던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3]

이를 미루어 볼 때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공용 침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3. 역사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461년(세조 7년) 12월에 이름을 양의전(兩儀殿)으로 짓고, 동 침실을 여일전(麗日殿), 서 침실을 정월전(淨月殿)으로 정했다.# 이후 1467년(세조 13년) 5월 경에 건물 전체의 이름을 대조전(大造殿)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을 옮겨 재건하였다. 이후 순조 때 소실된 것을 1835년(헌종 1년)에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또 다시 불 타 1920년에 복구하였다. 참고로 1920년에 다시 지을 땐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지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시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 곳에서 1926년 4월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승하했고, 순정효황후 윤씨낙선재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명목상 순종이 가지던 이왕 위를 물려받은 의민태자이방자가 가끔 조선에 올 때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 중 마지막으로 들른 1939년 10월 이후엔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4. 특징

4.1. 조선시대 대조전의 모습

  • <동궐도>에 따르면 대조전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집상전(集祥殿), 서북쪽에 경훈각(景薰閣)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부속 건물로 흥복헌(興福軒) · 융경헌(隆慶軒) · 양심각(養心閣) · 관리각(觀理閣) 등이 행각 형태로 대조전을 감싸고 있었다.
    파일:동궐도에서 묘사한 대조전 모습.png

    동궐도에서 묘사한 대조전 모습
  • 대조전 건물 자체를 놓고 보면, 정면 9칸, 측면 4칸의 1층[4]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솟을지붕으로 세웠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고,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5] 2개에 이익공 공포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長花盤)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7개의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9칸 중 가운데 3칸은 건물로 드나들 수 있게끔 툇마루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은 분합문으로 달았다.
  • 강녕전처럼 중앙에 월대를 놓아 침전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시에 왕실 행사가 있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하게 하였고 월대 동, 서쪽에 삼태극 소맷돌을, 남쪽엔 서수 해치얼굴을 단 계단을 세웠으며, 월대 가장자리에 나무 난간을 세우고 계단과 통하는 곳에 나무 을 달았다. 은, 밑 부분에 머름을 달고 그 위에 전면 창호를 달았는데 창살은 흔히 볼 수 있는 띠살이 아닌 정자(井) 형으로 만들었으며 창호 위엔 빗살교창을 달았다. 창 앞에는 돌 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고, 이 돌 기둥 위에 쪽마루를 대청 툇마루와 연결되게 설치하여 건물 밖에서도 을 신지 않고 주변 행각으로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창 쪽 쪽마루엔 추락 방지를 위해 나무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툇마루와의 사이엔 월대처럼 나무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대조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6]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황제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7]
    파일:조선 말기 창덕궁 대조전.png 파일:순종이 살던 당시 창덕궁 대조전.png

    조선 말기 촬영한 대조전 일제강점기 순종이 살던 당시 대조전 사진
  • 조선시대 대조전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사진이 현재 두 장 남아있다. 왼쪽의 사진은 주변이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아 순종창덕궁으로 이어[8]하기 전에 찍은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며, 오른쪽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순종 이어 전 찍은 사진은 전체적으로 <동궐도>의 묘사와 비슷하나, 창 앞에 세운 앞면 기둥과 그 틈새를 나무판자로 가려놓았다. 다만, 가운데 칸 밑엔 이 달렸는데 아마 아궁이로 들어가는 문인 듯 하다. 순종이 머물면서 개조되었는데, 우선 의 창호지를 떼어 유리로 바꾸어 달았고, 가운데 지붕 양 끝에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또 앞면 돌 기둥들 사이가 전통 벽돌 장식으로 메꿔져 있고, 한 가운데엔 무늬로 형상화 된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월대 남쪽의 양 가장자리에는 큰 전등을 세워놓았다.

4.2. 1920년 이후 재건 된 대조전의 모습

  • 위에 언급했듯,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온 것이기 때문에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는 교태전과 같다. 희정당에 비해 변화가 크진 않지만[9],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는데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솟을지붕이 평지붕이 되고, 누각처럼 보이게 했던 기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재질이 돌이라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월대만이 조선시대 대조전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 내부도 상당히 변하여 대청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원래 우물마루였던 바닥을 쪽널마루로 바꾸었으며 온돌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창호지를 떼고 유리를 달았으며 문 틀엔 커튼 박스까지 달았다. 단, 외관의 유리는 훗날 창호지를 붙인 문으로 복원했다.
파일:대조전 대청.jpg 파일:창덕궁 대조전 내부.png
일월오악도 병풍이 펴져있는 대조전 대청 동 측면에서 바라본 대조전 대청
* 거실거울을 세워놓았고[10] 정중앙엔 돌침대같이 생긴 대형 자개[11] 의자를 놓았으며 자개의자를 중심으로 양 옆에 나무 의자가 두 개가 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12]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였다.
파일:창덕궁 대조전 서온돌.png 파일:창덕궁 대조전 동온돌.png
창덕궁 대조전 서온돌# 창덕궁 대조전 동온돌#
* 침실인 온돌방은 동, 서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교태전과 달리 내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칸으로 터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침실 측면과 후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벽지문양이 그려진 능화지로 발랐고 천장엔 전등 조명을 달았다. 동온돌 남쪽 창호엔 한시(漢詩)를 써 붙였다. 의 내용에 대해선 이 곳을 참조.
파일:대조전 침대.png
대조전 침대의자, 탁자
* 서온돌(왕비의 침실)에는, 길이 224cm, 폭 154cm, 높이 113.5cm의 뼈대 전체를 으로 조각하여 굉장히 화려한 서양식 침대탁자와 2인용 의자를 설치하였다. 순종 사후 방치되어있다가 1988년에 일부를 보수하였다. 그러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2008년 10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에이스침대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리, 복원하였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문화재다. 언제는 과학이라더니 역사적인 부분까지 다루었다. 침대계의 문과, 이과 두루 섭렵
파일:대조전의 세면대와 보일러, 세면실.png
대조전 세면대와 보일러, 세면실#
파일:대조전의 욕실과 화장실.png
대조전 욕실화장실
* 이 밖에도 행각에 서구적인 욕실화장실을 설치하였다.
파일:대조전 봉황도.png
파일:대조전 백학도.png
위는 <봉황도(鳳凰圖)>, 아래는 <백학도(白鶴圖)>이다.
* 대조전이 완공 된 그 해 가을, 거실 쪽 불발기문과 천장 사이 벽에 순종의 명으로 동편엔 <봉황도(鳳凰圖)>가, 서편엔 <백학도(白鶴圖)>가 각각 그려졌다. 둘 다 폭 5.78m, 높이 2.14m 크기로, <봉황도>는 오일영(吳一英, 1890 ~ 1960)과 이용우(李用雨, 1904 ~1952)가, 그리고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1892 ~ 1979)가 그렸다. 2006년 <봉황도>가 등록문화재 242호, <백학도>가 243호에 각각 지정되었다.

안전한 보존 관리를 위해 지난 2013년 벽화를 떼어 내 보존처리하고 대조전에는 모사본을 제작, 부착했으며 보존처리가 완료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5. 부속 건물

5.1. 흥복헌

파일:창덕궁 흥복헌.png
흥복헌
昌德宮 興福軒

대조전의 동쪽 익각(翼閣)[A]이다.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동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 뒤로 툇간을 놓았다. 그리고 청향각 방향으로 온돌방 3칸을, 동행각 쪽으로 온돌방 2칸을 더 놓았고 건물 앞에만 툇간을 놓았다. 외부는 대조전 쪽 1칸의 벽면의 을 작게 만들고 그 위를 으로 막은 뒤 중간에 작은 교창을 내었으며 나머지 칸은 전면 창호로 내었다. 그리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동익각인 원길헌과 구조가 같아졌다. 원길헌의 구조는 여기 참조. 다만, 동행각에 달린 이 사라지고, 밖으로 돌출된 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밖에서 볼 때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낸 3칸만 드러나 있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내부 역시 이발실이 설치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특이하게 내전의 건물임에도 임금신하들을 자주 접견하는 공간으로도 쓰였으며#,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을 결정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슬픈 역사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흥복헌(興福軒) 이름이 ‘복(福)을 불러 일으킨다(興)’는 뜻인데, 정반대로 여기서 비극적인 일제강점기시작되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

5.2. 융경헌

파일:창덕궁 융경헌.png
융경헌
昌德宮 隆慶軒

대조전의 서쪽 익각(翼閣)[A]으로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이름은 ‘경사(慶)가 융성(隆)하라’는 의미이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서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에만 툇간을 놓았는데 이는 뒷면에도 툇간이 있던 흥복헌과는 다른 점이다. 그리고 융경헌 서쪽에 을 두어 경훈각을 드나들 수 있게 하였으며 서행각 쪽으로 온돌방 5칸을 더 놓았는데 서행각의 들은 동행각의 방들보단 규모가 조금 작았다. 외부는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서익각인 함홍각과 구조가 같아졌다. 함홍각의 구조는 여기 참조. 다만 밖으로 돌출된 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외부 모습이 전면 창호로 바뀌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흥복헌과 달리 현판은 붙어있지 않다.

5.3. 함원전

파일:창덕궁 함원전1.png
함원전
昌德宮 含元殿

대조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대조전과는 한 몸체로 붙어있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건물위치나 형태 등을 볼 때, 1920년에 창덕궁 내전 일곽을 재건할 때 경복궁 교태전에 딸린 건순각이 함원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기둥의 간격 등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교태전 옆에 이름이 같은 함원전이 있는데 건물명은 거기서 따온 것으로 추측한다. 건물의 위치와 구조 상 정면은 동쪽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북쪽 가장자리 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동쪽을 향해 있다.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5.4. 청향각

파일:창덕궁 청향각.png
청향각#
昌德宮 淸香閣

흥복헌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은 ‘맑고 깨끗한 향기(淸香)’란 뜻이다.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흥복헌 방향에 대청 2칸, 그리고 그 북쪽으로 온돌방 2칸이 있었다.

5.5. 경훈각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경훈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6. 함원전

5.7. 지금은 사라진 건물

5.7.1. 집상전

파일:동궐도에서 묘사한 집상전.png
<동궐도>에서 묘사한 집상전
昌德宮 集祥殿

창덕궁의 대비전(大妃殿) 중 하나로 현종대비인 어머니 인선왕후 장씨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지었다. 인선왕후가 머물던 창경궁 통명전에 여러 변괴가 일어나자 현종은 대비전을 새로 지어 어머니를 모시려 하였으나 이미 효종 시절 대비전을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반대했고 결국 대조전 뒤뜰의 옛 집상당(集祥堂)을 수리한 뒤 ‘전(殿)’으로 격상시켜 대비를 모신 것이 집상전 역사시작이다. 그러나 규모가 좁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덕궁[15]의 집희전(集禧殿)을 옮겨 새로 세운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집상전이다.

이후 숙종어머니 명성왕후[16]도 이 곳에서 머물렀고 명성왕후 사후엔 선조의 옥대자(玉帶子)[17]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3년 창덕궁 내전 화재 때 불타고 이후 복구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18] 사실 18세기 들어서는 대비들도 이 곳에 거의 머물지 않았고, 물품들을 보관하는 정도로만 쓰였기에 딱히 재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방을 놓았다. 방은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고 대청과 방을 툇간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앞 면에 쪽마루를 덧달고 난간을 둘러 실내에선 물론 실외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할 수 있게 하였으며, 덧댄 마루는 기둥이 받치고 있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다. <동궐도>를 보면 가운데 대청 앞에 있는 월대를 2단으로 설치하였고 지붕은 솟을지붕 형식으로 만들어 건물의 특색을 뽐내었다. 이를 보아 전체적으로 대조전과 많이 비슷한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조전과 연결되게 지은 것이기 때문에 대비전이라 해도 대조전과 구역이 따로 분리되진 않았다.

5.7.2. 양심합

5.7.3. 관리합

6.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1980년대 초까지는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중궁전으로 많이 나왔다. 다만, 월대에 전등이 세워져 있는 등 서구화 된 부분들도 많이 보였는데, 당시엔 야외 세트장을 짓는 것은 방송사 예산 상 거의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고, 일제의 훼손 등으로 그나마 당시 남아있는 조선 궁궐의 침전 건물은 대조전 일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19]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촬영했다.
파일:명성황후 8화의 대조전.png
<명성황후> 8화에 나온 대조전. 교태전에서 촬영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경복궁을 비롯한 다른 궁궐의 침전들이 복원되면서 나오는 빈도가 줄었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를 다룬 사극에선 여전히 많이 나왔다. 그러나 창덕궁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촬영할 때, 서양 풍이 나는 실제 창덕궁 대신 갓 복원하여 서구적 느낌이 하나도 없는 경복궁에서 찍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경복궁 교태전 건물에서 교태전 현판을 뗀 뒤 대조전 현판을 대신 걸고 촬영한 경우도 있었다.(...)[20] 100년 전엔 교태전이 창덕궁으로 가더니 이젠 반대로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대부분의 사극들이 야외 세트장에서 많이 촬영하면서 실제 창덕궁 대조전 건물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참고로 교태전을 재현한 세트는 있지만 대조전 세트(조선시대 원형의 모습)는 구현한 곳이 없고, 때때로 교태전 세트에 대조전 현판을 거는 식으로 나온다. 진짜 궁궐에서 하던 짓을 이제 세트에까지 영원히 고통받는 교태전 – 대조전 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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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곤(坤)’은 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곤전은 중궁전을 가리킨다.[2]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3] 후술하겠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1917년 화재 이후 일제강점기경복궁에서 뜯어온 것이고 많은 변형이 생겨 희정당이 응접실, 접견실이 되면서, 원래 희정당에서 살던 순종이 어쩔 수 없이 대조전에서 같이 살게 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희정당은 화재 전부터 접견실로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 이미 침전이 아닌 정무를 보는 편전, 즉 공적기능을 했었다. 자세한 것은 희정당의 용도를 참조.[4]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5] 모양의 부재.[6]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7]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8]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쉽게 말해 이사가는 것이다.[9] 정면 9칸, 측면 4칸의 기본 구조는 전과 같다.[10] 정 중앙에 있을 때도, 구석에 있을 때도 있다.[11]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12] 창호문의 위 아래를 벽지로 바르고, 그 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낸 .[A] 가장 메인이 되는 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A] 가장 메인이 되는 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15] 지금의 경희궁.[16] 명성황후 민씨가 아니다. 한자도 명성왕후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으로 다르다.[17] 허리띠.[18] 헌종 연간에 발간 된 <궁궐지(宮闕志)>에는 ‘지금은 없는 전각’이라고 적혀 있다.[19] 창경궁도 내전 건물이 남아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진짜 달랑 건물만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1983년까지는 놀이공원 창경원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힘들었다.[20] 물론 경복궁관리소의 허락을 받고 임시로 교체한 것이고 이 때 걸었던 대조전 현판도 당연히 방송사에서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