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0:44:27

창덕궁 진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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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진선문
昌德宮 進善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405년 (창건)
1608년 (중건)
1999년 (복원)
파일:창덕궁 진선문.jpg
<colbgcolor=#bf1400> 진선문[1]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여담
5.1. 복원 문제

[clearfix]

1. 개요

창덕궁중문이다. 정문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있다.

2. 이름

'진선(進善)' 뜻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한 말(善)을 아뢰다(進)' 이고 다른 하나는 '훌륭한 사람(善)을 추천한다(進)'이다. 즉, '훌륭한 인재들을 모으고, 이들이 임금에게 선한 말을 아뢰어 좋은 정치를 하기 바란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

3. 역사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진선문 남쪽에 5칸 짜리 문을 세워 돈화문이라 했다는 기록이나# 금천교를 짓고 진선문 석교라고 한 것을 보아# 1411년(태종 11년) 이전에 지은 듯 하다.[2]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했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일어난 몇 차례의 창덕궁 화재 때도 무난했던 듯 하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융희 2년) 탁지부건축사무소에서 인정전 개수 공사를 시행할 때 자동차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헐었다. 광복 이후인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99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원래 현판 글씨는 동래군 정난종(東萊君 鄭蘭宗)이 쓴 것이었다. 현재 글씨는 1999년 복원할 때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3]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4.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의 1층[4] 목조 건물이다. 주춧돌기둥은 둥글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상바름을 하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두었다. 단청은 모루단청[5]으로 칠해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파일:인정문 마당.png}}} ||
<colbgcolor=#bf1400>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 마당
진선문을 들어서면 좌측(북쪽)에 인정문이, 정면(동쪽)에 숙장문이 있다. 이 들은 서로 행각을 통해 붙어있으며 잇는 행각이 사다리꼴 모양을 만들어 마당을 이룬다. 이 마당도 인정전 마당처럼 국가 행사정치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주로 무게 있고 좀 더 근엄한 예제(禮制)를 열었다면 진선문 · 인정문 · 숙장문의 마당에서는 좀 더 일상에 밀착한 국사를 펼쳤다. 대표적으로 임금죄인을 심문하거나 벌주는 장소로 많이 활용한 예가 있다. 물론 엄숙한 행사를 아예 거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금의 즉위식을 주로 이 마당에서 열었다.
  • 행각엔 내병조(內兵曹), 호위청(扈衛廳) 등 을 지키는 관청과 전설사(典設司), 상서원(尙瑞院) 등 왕실국가 행사와 관련 된 관청들 및 부속실들이 있었다. 이 역시 순종 이어 때 사라졌고 1999년에 복원했는데 조선 시대와는 달리 내부를 복원하진 못하고 비었다. 단, 내병조는 내부도 복원하여 현재 창덕궁 관리소에서 사무실로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궁을 지키는 건 똑같다.

5. 여담

  • 그 유명한 신문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백성이 두드리면 이 직접 억울한 사연을 접수하고 처리하도록 한 것인데, 절차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 안으로 들어와서 쳐야하는 문제 때문에(...) 잘 쓰이지 않다가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 이후 1771년(영조 47년)에 부활하여 다시 진선문과 경희궁의 중문인 건명문에 설치했다. 그러나 이미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신문고는 여전히 별 쓰임새가 없었다. 결국 순조 이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1. 복원 문제

파일:조선고적도보 창덕궁 진선문 전경.jpg
파일:조선고적도보 창덕궁 진선문 정면.jpg
<colbgcolor=#bf1400>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전경 <colbgcolor=#bf1400>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진선문 정면
조선 시대에 제작한 《동궐도》 및 《동궐도형》과 20세기 초 진선문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진선문과 금천교는 일직선 상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축이 틀어져있어 딴 자리에 복원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 자리에 복원했다. 진선문 복원 공사 당시에 다행히 기초 유구가 상당히 잘 남아있었고 이를 토대로 그 자리 그대로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진선문의 위치는 옛날 자리가 맞다.

그러면 왜 틀어진 걸까. 바로 금천교조선 시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덕궁순종이 살면서 자동차가 다녔고 차량 이동의 편의상 금천교를 살짝 옮겼기 때문이다.# 금천교 이건과 거의 동시에 진선문을 헐었다가 약 90여 년 뒤 원래 자리에 복원해놓고 보니까 서로 축이 틀어진 것이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금천교는 1411년, 돈화문은 1412년에 건립되었다.[3] 경복궁 흥례문유화문창덕궁 숙장문현판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4]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5]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