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5 21:20:47

창덕궁 빈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대보단
건무문 광지문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농포
소요암 옥류천
소요정
취한정
수복방 신선원전 진설청
괘궁정 취규정
재실
능허정
의효전 사가정 청심정 천향각
몽답정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존덕정
외삼문 폄우사 척뇌당
관람정
반도지
승재정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농수정
연경당 선향재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창덕궁 애련정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운경거 의두합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주합루
어수문
사정기비각 부용지 영화당 춘당대 서총대
부용정
요금문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수정전 가정당
습취헌 집상전
영모당
경복전 경훈각 징광루 함원전
청향각
의풍각 융경헌 대조전 흥복헌
수랏간 관리합
만수전 태화당 재덕당 요휘문 경극문 창경궁
경추문 보경당 선평문 양심합 여춘문 병경문
함양문
선원전 진설청 내재실 만수문 건중문 희정당 영안문
양지당 만안문 관광청 선정전 건인문
책고 인정전 관물헌 어휘문
봉모당 억석루 연경문 만복문 향실 선정문 성정각 보춘정 중희당 칠분서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예문관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삼삼와 승화루 한정당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영현문 전의사 취운정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이문원 검서청 약방 내삼청 광범문 내반원 낙선재 석복헌
훈국초관인직소 홍문관 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수강재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승정원 상서성 연영문 협양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인정문 +대청 공상청 누국
수문장청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일영대
금호문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저승전 낙선당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진수당 장경각 군옥재 춘방
수문장청돈화문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시민당 계방 등룡문
원역처소 사주문
단봉문 종묘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빈청 | 비궁당
昌德宮 賓廳 | 匪躬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
건축시기 창건시기 미상
파일:빈청.jpg
<colbgcolor=#bf1400> 빈청
1. 개요2. 이름과 용도3. 역사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의 빈청이다. 숙장문의 동남쪽에 있다.

2. 이름과 용도

빈청은 삼정승[1]과 정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및 비변사 당상관들이 평상시에, 아니면 임금을 뵙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회의하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특정 건물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빈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지고 오직 창덕궁 빈청만 지금까지 있다.

《궁궐지》에서는 이곳을 '비궁당(匪躬堂)'으로 소개했으나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이름 없이 그냥 빈청으로 나온다. 일단, 이 문서 이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창덕궁 빈청'이다.

‘비궁(匪躬)’의 뜻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로, 《주역》에서 유래한 말이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관료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의 이름으로 알맞다.

3. 역사

성종실록》의 이 기사에서 달성군 서거정이 이 건물에 대해 쓴 ‘비궁당기(匪躬堂記)’를 언급한다. 이로 보아 최소 성종 시기에는 존재한 듯 하다.

확실한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모르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시기에 창덕궁을 중건할 때 같이 복구한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고종 2년)에 당시 섭정 중이던 흥선대원군명령으로 비변사가 폐지됨에 따라 비었다. 그 후 대한제국순종황제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자동차를 보관하는 어차고(御車庫)로 바꾸었다. 변형 시기는 정확히 모르나 1908년(융희 2년) 제작된 《동궐도형》에 빈청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바뀐 듯하다.

순종 승하 후에는 벽면마다 유리창문이 설치된 자동차 전시실로 변했다. 내부에는 초헌, 연(輦)과 여(轝) 같은 가마와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탔던 승용차인 1918년식 캐딜락(미국 GM사 제작) 및 1914년식 다임러(독일 다임러사 제작)가 보관 · 전시되어 있었다.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자동차들이 옮겨진 뒤 빈 공간으로 남았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카페가 들어섰다. 이름은 ‘동궐마루’. 커피, 기념품을 판매한다.

문화재청이 영업을 허가한 이유는 관람객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차고로 전락시킨 것을, 하라는 복원은 안하고 카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010년과 2012년, 2014년의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그 때마다 당시 문화재청장들이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말했지만 전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2023현재까지 영업한다.#

4. 구조

  • 정면 5칸, 측면 3칸의 1층[2] 목조 건물이다. 네모난 기둥을 놓고 그 위에 사각 목조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팔작과 맞배 형태가 섞였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식이다. 다만, 양쪽 가장자리 칸은 아예 공포가 없는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3]으로 칠해 절제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각 칸의 가장자리 부분에는 낙양각을 설치했다.

파일:동궐도 빈청.png}}} ||
<colbgcolor=#bf1400> 《동궐도》 빈청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를 보면 을 둘러 영역을 구분한 모습이었다. 말기에 그린 《동궐도형》을 보면 양 가장자리 칸이 온돌방이고, 가운데의 3칸은 대청이었다. 그리고 앞면과 뒷면의 가장자리 부분은 툇간으로 두었다.

5. 여담

  • 빈청에 있던 온돌숙종이 없애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구들장에 앉아 뒷담비판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 그래도 후대에 그린 《동궐도형》에 온돌방이 있는 것을 보아 없앴더라도 바로 복구했을 것이다.


[1]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2]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3]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04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504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