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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중희당 昌德宮 重凞堂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782년 (창건) 1891년 (경복궁 이건) |
<colbgcolor=#bf1400> 《동궐도》 중희당 |
중희당의 현판. 정조의 친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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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덕궁의 건물로,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의 정당(正堂)이었다.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위치는 성정각의 동쪽, 지금의 창덕궁 후원으로 입장하는 곳과 창경궁으로 가는 함양문 앞의 넓은 길이다.
현판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며 정조가 직접 썼다.
2. 역사
1782년(정조 6년) 정조의 장남 이양이 태어났다.[1] 당시로서는 꽤 늦은 31살에 얻은 굉장히 귀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후궁 소생임에도[2] 이양을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봉했고#, 다들 이양이 세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자연스레 장차 사용할 동궁이 필요했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동궁은 영조 말년과 정조 재위 초반을 거쳐 전부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아 없던 상황이었다.[3] 그래서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중희당이다. 이양은 이 곳에서 세자로 책봉받으니 이가 곧 문효세자이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책봉 2년 만인 1786년(정조 10년) 불과 5살[4]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도 같은 해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중희당이 동궁의 기능을 잃자 정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펼치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다. 순조 때는 여기서 부마의 삼간택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1827년(순조 27년)에 당시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중희당이 정당으로 사용했다. 효명세자는 이 곳에서 조회를 열고 정사를 보는 등 중희당을 자신의 정치공간으로 적극 활용했다.#
1849년(헌종 15년)에는 헌종이 여기서 승하했다. 세자가 없던 철종 시절엔 쓰지 않았다. 고종은 이 곳에서 관례를 올린 뒤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명성황후의 간택#과 왕세자(훗날의 순종)의 관례도 여기서 행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궁중행사들을 열었으며, 창덕궁에서 외국의 외교관들을 접견할 때에도 이 곳을 활용했다.#
그러다 1891년(고종 28년) 5월,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경복궁으로 이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5] 이후 지금까지 재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지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다. 기단도 매우 높았는데 무려 댓돌을 9단이나 쌓았다. 그리고 그 앞에 계단을 총 3개로 나누어 놓았다.
- 《동궐도》에는 정면 9칸으로 나와있고 측면은 복도인 칠분서에 가려 확인이 불가능하나 《동궐도형》에는 정면이 8칸에 측면이 4칸인 총 32칸이며, 툇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방들과 마루는 전부 통 칸으로 되어있다.
- 서쪽 끝 방을 책을 보관하는 서주(書廚)로, 동쪽으로 그 다음 칸은 마루를 놓고, 그 다음 방은 온돌, 그 다음 4칸은 대청, 그리고 그 다음 2칸은 다시 온돌로 되어있다. 서쪽의 2칸을 제외한 나머지 7칸 앞에 바깥으로 드러난 툇마루를 놓았다. 툇마루에 나무 난간을 덧대었는데, 동쪽의 3칸과 서쪽에서 3번째 칸은 툇마루 전체에 놓았고, 그 사이의 칸들은 건물로 출입할 수 있게 가운데를 비워놓았다. 그리고 온돌방의 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분홍색이 아닌, 흰색이었다.
- 마당을 굉장히 넓게 만든 뒤, 그 앞에 측우기와 해시계, 풍기대[6], 소간의[7] 등 여러 천문, 기상 관측 기구들을 놓아 백성들의 삶에 중요한 날씨를 살핀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 중희당 본채 서쪽에 소양문이란 쪽문이 있었고 소양문의 서쪽엔 구여문이란 문이 있었다.
4. 여담
- 정조가 다산 정약용에게 필통[8] 가득히 삼중소주[9]를 부어서 마시라고 권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이 때 정약용은 ‘오늘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고 전해진다.#
흔한 직장 상사와의 회식
- 2019년, 창덕궁 중희당을 중심으로 한 동궁 영역으로 추정되는, 「중화궁(重華宮)」에서 사용한 「중화궁인(重華宮印)」이라는 왕실 인장이 국내로 환수되었다. 돌아온 문화유산, 창덕궁 동궁의 인장, 중화궁인重華宮印(영상)
5. 부속 건물
<colbgcolor=#bf1400> 창덕궁 공식 홈페이지(팜플렛 삽도)에 나와있는 중희당 터와 부속 건물들인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 |
5.1. 칠분서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칠분서 昌德宮 七分序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782년 (창건) |
<colbgcolor=#bf1400> 칠분서 |
중희당과 후술할 부속 건물인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이다. 단순 복도임에도 분합문과 난간을 설치하여 격식을 차렸다.
처마는 홑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총 6칸이며, ‘ㄱ’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중희당에서 칠분서로 들어와 동쪽으로 두 칸을 가면 길이 남쪽으로 꺾인다. 거기서 4칸을 더 가면 삼삼와가 나온다. 내부는 전부 마루이다. 난간은, 위에는 빗살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다.
현재도 남아있으나 본채 중희당이 사라진 관계로 뭔가 어색하다.(...)
5.2. 삼삼와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삼삼와 昌德宮 三三窩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782년 (창건) |
<colbgcolor=#bf1400> 삼삼와 |
중희당의 부속 건물로, 과거에는 칠분서를 통해 연결되었다. 6각형 건물이다.
이름이 특이한데 정확한 뜻은 잘 모른다. 다만 3(三)이 2번 쓰인 것을 보아 6각형 형태를 나타낸 듯 하다. ‘와(窩)’는 직역하면 움집, 굴이란 뜻으로, 일상에서는 주로 별장이나 창고 등으로 의미를 확대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용도도 서재나 서고, 또는 휴식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처마는 겹처마에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10]을 얹어 장식했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난간은, 위에는 평 무늬로, 아랫 단은 장수를 상징하는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난간 밑에는 낙양을 설치하여 화려함을 더욱 살렸다. 건물 본체와 기단 사이의 벽면은, 벽돌을 이용하여 거북이 등껍질 문양으로 장식했다. 내부는 한 칸으로, 바닥은 마루이다.
지금도 남아있다. 다만 《동궐도》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동궐도》에선 석조 기단이 창이 날 정도로 높아 사실상 1층 공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단순한 기단으로 낮아진 상태인데, 아마도 《동궐도》가 완성된 1830년 이후 1833년에 창덕궁에서 있었던 화재로 소실이 된 다음에 지금의 모습처럼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5.3. 승화루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승화루 昌德宮 承華樓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782년 (창건) |
<colbgcolor=#bf1400> 승화루 뒤뜰 |
삼삼와와 연결된 2층 누각이다.
원래 1층은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 2층은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소주합루(小宙合樓)였다가 헌종 때 낙선재를 지으면서 승화루로 바뀌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11]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
《승화루서목》을 보면 보관하던 책이 무려 3742권, 글과 그림들이 665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본 기능을 잃고, 일제가 순종과 왕실의 경호[12]를 명목으로 설치한 창덕궁 경찰서의 건물로 쓰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2층이므로 총 6칸에 달한다. 기둥은, 1층은 전부 긴 화강석으로 되어있으며 2층의 기둥은 나무를 네모나게 깎아 세웠고 동쪽 측면에 나무 계단을 놓아 이동이 가능하게 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쇠서를 2개 두었다. 용마루, 추녀마루, 내림마루는 다 기와로 쌓았으며 치미만 올리고 잡상은 놓지 않았다. 문짝은 분합띠살이며 교창은 설치하지 않았다. 2층의 난간은 결연초 문양으로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1층도 원래는 문과 벽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에 다 뜯기고 현재는 외부와 트여있다. 《동궐도》를 보면 승화루 앞 기단에는 화려한 괴석들이 3개가 놓여있어 주변을 아름답고 운치있게 했다. 지금은 기단도 괴석도 다 사라지고 그 앞엔 낮은 담과 조그만 벽돌 문만이 자리하고 있다.
승화루 뜰엔 '향천연지(香泉研池)'라는,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이 있다. ‘향기(香)나는 샘(泉)과 벼루(研)같은 연못(池)’이란 뜻으로 맑은 정신으로 학문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5.4. 유덕당 · 석유실 · 자선재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유덕당 · 석유실 · 자선재 昌德宮 維德堂 · 昌德宮 錫類室 · 昌德宮 資善齋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782년 (창건) |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 묘사된 유덕당, 석유실, 자선재. 맨 아래 붉은 담장 왼쪽이 석유실, 윗쪽이 유덕당, 그보다 더 윗쪽이 자선재이다. |
유덕당은 중희당의 북쪽에 있던 부속 건물이다. 유덕당의 서남쪽과 중희당의 서북쪽에 석유실이 있었으며 이 석유실을 통해 두 건물이 연결되었다. 《동궐도형》에 따르면 유덕당은 정면 7칸에 측면 2칸으로, 각 방은 남북축으로 전부 통 칸이었다. 《동궐도》를 보면, 서쪽에서 2, 3번째 칸은 마루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고, 4,5,6번째 칸은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모든 칸 앞에는 툇마루가 밖으로 통해있고, 그 앞에 나무 난간을 덧대었다. 계단은 총 2개가 놓여있으며 계단과 툇마루 사이엔 출입이 가능하게 난간이 없다. 동쪽 마지막 칸은 가운데에 작은 창과 나무 쪽문이 설치되어있고 그 주변은 분홍색의 벽으로 되어있다. 동쪽 측면은 창과 문이 없이 벽과 벽돌로만 마감했다.
석유실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동향 기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총 8칸이다. 《동궐도》에는 전면 모든 칸에 툇마루가 밖으로 나와 있으나 《동궐도형》에는 유덕당 쪽 2칸 앞에만 그렇게 되어있다. 《동궐도》를 기준으로 보면, 툇마루 안쪽의 모든 공간이 온돌방인 것으로 보이나 《동궐도형》에는 구분이 안 되어있다.
자선재는 유덕당의 북쪽에 있는 건물이며 이름 '자선(資善)'은 ‘착한(善) 성품을 기른다(資)’는 뜻이다. 《동궐도》를 보면, 정면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정면 4칸에 전면에 쪽마루를 놓았다. 《동궐도형》에서는 양선재로 나와있는데 이름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잘못 표기한 것인지는 모른다. 《동궐도형》에서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총 7칸으로 양쪽 가장자리 끝은 주방(혹은 창고이고)[13], 서쪽 주방 동쪽에 온돌방 2개가 있고, 동쪽 주방의 서쪽엔 방이 1개가 있으며 그 사이 2칸은 대청으로 되어있다.
세 건물 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6. 대중매체에서
고종 때 헐렸기에 당연히 실제 중희당 건물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적은 아예 없었다. 다만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을 촬영할 때, 용인대장금파크에 중희당과 그 일대를 재현한 동궁 세트를 지었다. 자세한 모습은 〈이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자.그런데 고증오류가 몇 개 보인다. 정조 시대 사극 세트에 고종이 쓴 '집희(緝熙)' 현판을 걸었다.[14] 그리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석등을 놓았다.[15]
[1] 이름의 한자는 '㬀'으로, 원음은 '순'이나, 1784년에 작성된 문효세자의 작명 단자에는 음이 '양(陽)'이라고 적혀있다.[2] 이양의 생모는 의빈 성씨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한지민,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세영이 맡았던 배역.[3] 그 땐 사도세자도 죽은 이후였고 정조는 세손 시기의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었다. 그리고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4] 만 나이로는 3살[5] 경복궁으로 옮겼다면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자비한 궁궐철거로 같이 휘말려 헐렸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헐리지 않고 남아 있을수도 있는데 정황을 추측해보자면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의 기록이 실록상으로는 1892년(고종 29년)부터 나타나는 점, 그리고 고종이 중희당에서와 유사하게 함화당과 집경당에서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상 많이 나타나는 점을 감안하면 함화당과 집경당 둘 중 하나가 중희당으로부터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집경당은 정면 9칸으로 동궐도상의 중희당의 정면 칸 수와 동일하다. 함화당과 집경당을 건립하기 전까지는 경복궁의 흥복전이나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졌는데, 신정왕후가 1890년 흥복전에서 승하한 이후 흥복전과 만경전에서 접견이 이루어진 기록은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양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정사를 보았던 중희당을 아무 이유 없이 내지는 중요한 목적 없이 철거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신정왕후 사망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중희당을 옮겨와서 자신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함화당과 집경당의 기록이 승정원일기상으로는 1890년에 적게나마 등장하긴 하나 189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1892년 7월 이전까지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그것이 중희당의 이건에 따른 개축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6] 조선 시대에 바람의 방향을 재기 위해 설치한 받침돌.[7] 적도를 기준으로 하여 우주의 물체들을 관측하는 기구인 간의(簡儀)를 천문관측대인 관천대 위에 놓을 수 있도록 보다 작게 만든 기구.[8] 현재의 작은 필통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의 필통 크기.[9] 세 번 증류해서 만든 소주. 지금의 소주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알콜도수가 높았다.[10] 탑 모양의 장식 기와. 주로 6각형, 8각형 형태의 건물(거의 대부분 정자)에 얹는다.[11] 무언가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부분.[12] 실제로는 엄중한 감시였다. 조선 왕실이 타국으로 도피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았던 일본 제국의 모략이었다.[13] '부엌 주(廚)'로 표기되어있는데 의미를 확장해서 창고 등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일단 본 뜻대로 주방으로 쓴다.[14] 그리고 집희 현판은 실제로는 중희당 건물이 아니라 성정각의 부속건물 관물헌에 걸려있었다.[15] 조선 궁궐에는 원래 잔디와 석등이 아예 없었다. 지금 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일제의 훼손으로 인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