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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자선당 景福宮 資善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427년 (창건) 1553년 (1차 중건) 1866년 (2차 중건) 1999년 (복원) |
<colbgcolor=#bf1400> 자선당[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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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무는 동궁의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다.'자선(資善)'은 ‘착한(善) 성품을 기른다(資)’는 뜻으로, 중국 북송 때 황태자의 강학소로 설치되었던 ‘자선당(資善堂)’에서 유래했다.
조선 초, 중기엔 정전 근정전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편전인 사정전의 동쪽에 있다.
현재 현판은 각자장[2]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2. 역사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세자가 왕실 어른을 찾아 문안하거나 경서 공부를 할 때 일일이 궁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그리고 경복궁에 동궁을 지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태조의 세자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제였던 정안군은 개경의 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충녕대군는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세조 8년(1462년)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책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1월에 화재로 불탔다.#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 5년) 경에 기와를 인수궁[3]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
그래도 1553년(명종 8년)에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 이 때 상량문[4]을 당시 대제학이던 퇴계 이황이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으로 건립되었다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colbgcolor=#bf1400> 오쿠라호텔로 옮겨간 자선당 | <colbgcolor=#bf1400> 박물관 '집고관'을 세운 이후 자선당 |
자선당 자리에 세운 '조선총독부박물관'. 훗날 '국립박물관'이 된다. |
지금 건물은 1999년 12월에 문화재청에서 복원한 것이다.
2.1. 자선당 유구
<colbgcolor=#bf1400> 자선당 유구[5] |
원래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하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였으나 2012년 11월부터 개방하여 볼 수 있다.#
3. 구조
}}} || ||<colbgcolor=#bf1400> 자선당 배치도 | <colbgcolor=#bf1400> 자선당 대청[7] |
자선당 서쪽 방 내부[8] | 자선당 동쪽 방 내부 |
-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대청이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총 6칸, 온돌방이 정면 2칸, 측면 3칸의 총 6칸이다(북쪽의 2칸은 쪽방). 온돌방은 좌, 우에 각각 있기에 총 12칸이다. 툇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이 각각 대청 남, 북쪽에 있고(남북을 합쳐 총 6칸), 각 온돌방 남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2칸이 있어(좌, 우를 합쳐 총 4칸) 총 10칸이다. 대청은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으며, 방은 남, 북 축으로는 트여있으나 동, 서 축으로는 구분이 되어있다.
- 공포는 이익공[9]이며 기둥 사이마다 화반[10]을 놓아 절제된 화려함을 강조하고, 그 위에 운공[11]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다. 기둥은 네모나게 세웠으며 안에 2개의 고주[12]를 세우고 7개의 도리를 설치한 ‘2고주 7량가’ 형식을 띄고 있다.# 단청은 모로단청[13]으로 하여 깔끔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4. 여담
- 문종은 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을 위해 자선당 주위에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이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불렀다고.
- 1916년에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 ~ 1959)는 일본 테이코쿠 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에 갔다가 오쿠라 호텔의 조선관으로 변했던 자선당에서 온돌을 체험한다. 이 때 라이트는 바닥에 파이프를 놓아 난방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1937년 이를 적용한 '허버트 제이콥스 하우스(Herbert Jacobs house)'를 만든다. 이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식 바닥 난방 보일러의 시초가 된다.
- 복원을 잘못했다는 말이 있다. 잡상도 6개인데 5개로 줄고, 정면의 계단도 통계단이었는데 3개로 나누는 등 엉터리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자선당의 사진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옮긴 이후에 찍은 것들이라 이건 과정에서 변형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 실제로 자선당의 계단도 《조선고적도보》에는 2개의 계단으로 나타나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 포스팅을 참조. 다만 《조선고적도보》 및 자선당 유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측면의 계단을 복원하지 않았고 굴뚝도 잘못 복원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배치도 참고
<colbgcolor=#bf1400>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 책 표지 |
5. 매체에서의 등장
복원 된 직후엔 동궁으로 사극에 많이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중, 후반 부터 궁궐 촬영이 어려워진 이후엔 실제 자선당이 등장한 적은 없다. 대신 경상북도 문경에 조성한 〈대왕세종〉 세트장에 자선당을 재현한 세트가 있어 그 곳에서 촬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신 다른 건물로 나온 경우가 훨씬 많다.[15][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3]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불당이다. 1661년(현종 2년) 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4] 새로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6] 정확히는 삼성그룹 계열사 호텔신라와 오쿠라호텔이 자매 호텔이란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순조롭게 반환받을 수 있었고,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9]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10] 공포 대의 기둥 사이마다 상하에 위치한 도리 방향의 긴 부재 사이를 받쳐주기 위해 사용하는 부재.[11] 이익공에서 화반의 윗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받치는 구름 모양의 목재.[12]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13]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14] 가운데에만 창을 낸 뒤 위, 아래를 종이로 바른 형태.[15] 대표적으로 〈정도전〉 초반에서 고려 성균관 대성전으로 나온 곳이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