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1:57:57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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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開放 : 연다는 뜻의 한자어2. 丐幇 : 거지들의 단체
2.1. 구조와 생활 양상2.2. 범죄 활동2.3. 결론2.4. 무협물에서의 개방

1. 開放 : 연다는 뜻의 한자어

공간을 열어 드나들게 한다는 의미와 금지하던 것을 풀어 허용한다는 의미가 있다. 반의어는 폐쇄.

전기회로에서는 한쪽이 전류가 흐르지 않는, 즉 저항이 무한대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가리킨다.(Open Circuit)

2. 丐幇 : 거지들의 단체

중국에 존재한 거지들의 자치 단체. 무협지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단체가 아니라 실존한 단체다. 한국에서는 무협지를 통해 개방이라는 명칭을 접하기 때문에 무술을 익히고 정보를 취급할 것 같은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론 폭력 조직이나 마찬가지였고 처음 등장한 것은 송대(宋代)였다.

2.1. 구조와 생활 양상

명 · 청대(明 · 淸代)의 거지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서 직업 거지(乞丐), 거지라는 신분을 이용해 자신이 벌이는 온갖 범죄와 불법적 활동을 숨기는 무뢰배(無賴), 임시로 구걸을 하는 거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임시로 구걸을 하는 거지들은 대체로 빈곤층이나 자연 재해, 전쟁으로 생계를 잃은 유민들이었다. 빈곤층은 잠깐 구걸을 하다 원래의 생업으로 돌아갔지만, 생계가 더욱 곤란해지면 직업 거지로 전락했고 유민들은 부호의 노비가 되는 투탁, 국가나 신사층의 구제, 산지로 가서 숯구이를 하거나 사천 · 양광(兩廣) · 호남(湖南) 같은 저개발지로의 이주, 무뢰나 도적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거지 생활을 청산하거나 직업 거지가 되었다.

직업 거지들은 자연 재해 · 기근 · 전쟁으로 인한 생계 수단의 상실, 병이나 장애, 늙거나 너무 어려 생활이 어려운 경우, 개방을 찾아가 두목에 해당하는 단두의 허락을 받으면 거지가 될 수 있었다. 개방의 거지들은 구걸한 물건을 모두 공동 창고에 저장하고 단두가 분배해주는 대로 배급을 받아 살아갔다는 말이 있으나, 일부의 사례일 뿐이지 일반화할 수는 없다.

도시의 빈민이나 농촌의 빈농들은 사람들이 적선을 잘 해주는 대목인 명절마다 잠깐 구걸을 했다. 원래 거지가 아닌 이들이 이런 식으로 잠시 구걸을 하려면 지역 개방의 단두에게 허락을 받고 구걸로 받은 돈의 일부를 상납해야 했다. 만약, 상납을 하지 않거나 단두의 허락 없이 구걸을 하다 발각당하면 몰매를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왕조 초기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구제와 사민 정책, 왕조 초기의 강성한 국력과 경제 성장 덕에 거지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체제가 이완되고 국력이 쇠퇴하는 중기부터 거지의 숫자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명대(明代) 중기에 대량의 유민이 발생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국가에서는 양제원(養濟院)을, 지역 사회와 신사층들은 의창(義倉) 같은 시설을 지어 거지와 유민들을 구제했지만 소수만 구했을 뿐, 대다수를 구제하지는 못했다.

거지와 유민들이 대량으로 발생한 상황에서 무뢰배와 도적, 도망자들이 거지패에 끼어들면서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개방은 타행(打行) 같은 무뢰배들의 하수인이 되어 이들이 시키는 일을 해주는 대가로 이권이나 식료품, 돈을 받았고 도적패나 몇몇 신사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또한 개방은 관청과도 줄이 닿아 있었고, 지방 관청들은 거지들의 일에 끼어드는 일을 꺼려서 어지간한 불법 행위는 눈감아 주었다.

명 · 청대의 개방은 각기 단두(團頭), 또는 개두(丐頭)라 부르는 두목이 있었다. 단두는 본인이 관장하는 구역의 거지들을 통제하고 관리했다. 일부 지역의 지방 관청에서는 거지 호적을 작성하고 거지들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 관리했지만, 일반적으로 관청들은 거지들이 대민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한 거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두에게 맡겼다. 단두들은 대체로 무뢰배 중에 이름난 자를 추대했고, 일부는 그 지위를 세습하거나 빼앗았다. 개방의 단두들은 불법적인 활동이나 폭력 행위 · 고리대 · 절도 · 강도 · 갈취 등의 방법으로 부를 쌓았고, 일부 단두들은 신사층 이상으로 부유했다. 또한 일종의 간부인 갑두(甲頭)를 임명해 자기 대신에 일부 구역을 관리하게 했다. [1]

개방과 단두는 거지 출신으로 황제가 된 명 태조 주원장이 만들었으며 명 태조가 거지들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을 세웠지만, 과실을 범한 하급 병사들을 단두로 임명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송 · 원대에 집필된 여러 소설에 개방과 단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기에 이는 그저 일화일 뿐, 사실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주원장이었다면, 거지들을 모조리 잡아다 곳곳에 사민시켜 지역 재건에 투입했을 것이다.

단두에도 등급이 있어서 다스리는 지역의 범위에 따라 부급(府級), 현급(縣級), 향급(鄕級)의 단두가 있고 하급 행정 단위의 단두들이 상위 행정 단위의 단두와 관리들에게 통제를 받았다는 이야기, 단두에게 타구봉(打狗棒)이나 한연관(旱煙管) 등의 신물(信物)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출처가 불분명하다. 송대의 소설에 따르면, 단두들은 그저 작대기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개방은 다른 조직 폭력배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구역을 정해 다른 개방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고 나름대로의 규율을 정해 소속된 거지들에게 이를 준수할 것을 강요했으며 다른 개방 소속의 거지가 이적해 올 때도 반드시 새로 가입한 개방의 규칙을 따르게 했다. 개방의 거지들은 빈민가에 모여 살거나 아무 곳에서 노숙을 했으며 주인이 사라진 폐사찰이나 도관을 차지하거나, 승려와 도사들이 살고 있는 사찰과 도관에 눌러앉기도 했다.

현대의 범죄 조직들처럼 상호 불간섭과 상호 간의 구역 존중을 내세우긴 했지만, 각지의 개방과 거지들은 이권 다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을 빚고 항쟁을 일으켰다. 먹을 것을 놓고 다투다가 서로를 죽이거나, 금병매(金甁梅)의 주인공인 서문경(西門慶)의 사위 진경제(陳經濟)를 매일 밤마다 범한 비천귀(飛天鬼) 후림아(候臨兒)처럼 같은 거지를 동성 성추행하려다 맞아 죽은 거지도 있었으며 서로를 절도범으로 관청에 밀고하려다 칼부림을 내서 서로를 찔러 죽인 거지들도 있었다. [2]

2.2. 범죄 활동

전근대 중국의 거지들은 구걸 · 막노동 · 상업 활동 · 기예 · 사기 · 절도 · 강도 · 성매매 · 인신매매 · 시체 처리 및 염습 등 다양한 일을 했으며 여기서 기예를 하는 거지들은 가수 · 무용가 · 뱀꾼 · 마술사 · 무술 공연가 · 차력사 · 동물 조련사 · 곡예사 · 배우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거지들의 기예는 행인들의 관심을 끌어 구걸을 하고 관람료를 받으려 하는 짓이어서 각지를 오가며 공연을 하던 예능인들만큼 뛰어나지 못하고 저급한 수준이었다.

이밖에도 구걸과 범죄가 아닌 일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각부(짐꾼) · 점쟁이 · 설화인(說話人. 길거리 이야기꾼) · 이발사 · 무당 · 잡부 · 고용인 · 야경꾼 · 경비 · 문지기 · 점쟁이 · 약장수로 생계를 꾸리는 거지들도 있었다. 가짜 약이나 파는 약장수와 사기를 치는 무당을 제외하고, 이런 일을 하는 거지들 중에서 나름 성실한 이들은 정해진 거처가 없을 뿐이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용인받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3] 참조 블로그

몇몇 역사 소설과 무협 소설에서 중국의 거지들은 태반이 장애인이라고 설명하는 일이 있어서 거지들이 이렇게나 다양한 활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당대(當代)의 문인들과 관청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거지의 태반이 사지 멀쩡한 장정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문인들은 거지들을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생계를 잃어 구걸을 하게 된 불쌍한 빈민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의 눈에 비친 개방의 거지들은 강건한 신체를 이용해 폭력과 난동을 저지르는 무뢰배거나, 신체가 멀쩡해서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놀기만 하고 걸핏하면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 말종들이었다.

개방은 거지들에게는 대목에 속하는 명절이나, 민간에 경 · 조사와 대 · 소사가 있을 때마다 구걸이나 공연을 하여 돈을 벌었고 일두전(一頭錢)이란 명목으로 여러 집을 돌며 상인과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일두전으로 요구하는 금액은 작게는 동전 수백 문(文. 닢), 많게는 수십 관(貫)에 달해서 서민은 물론, 중산층들에게도 부담되는 액수였다. 이들의 행태는 악랄하기 그지 없어서 장례나 결혼식에서 쓸 수의나 예복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빈농들의 집에까지 쳐들어가서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만약에 자신들이 방문한 가정이 요구 사항에 불응한다면, 이들은 즉시 깽판을 쳐서 도저히 음식과 술, 돈을 주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들었다. 그래서 개방의 패거리들이 몰려온 가정에서는 그저 일두전을 깎아달라고 사정하거나, 미리 단두를 찾아가 일정량의 대가를 지불하고 보호를 약속받았다. 그리고 공연이나 구걸을 빌미로 집에 들어온 거지들은 공연과 구걸을 하는 동안 집의 형편과 구조를 익혀 나중에 절도나 강도를 할 때에 활용했다.

개방은 조폭들처럼 보호비를 걷어 상인들을 갈취했고 관청의 서리(胥吏), 아역(衙役)과 짜고 개방에 소속된 거지들을 구호 식량 및 물자 지급 대상자로 등록하여 이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때로는 신사들과 결탁해 부호나 상인들의 집을 털어 일부 장물을 상납하고 그 대가로 보호를 받기도 했다. 때로는 사고를 조작하거나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짓(圖賴. 도뢰)을 해서 돈을 갈취하고 난동을 부렸으며 폭동인 민변을 일으키는 대형 사고를 친 개방도 있었다. [4]

또한 개방은 고아들 뿐만 아니라 멀쩡한 가정의 아동들까지 유괴해 노복(奴僕)이나 창기(娼妓)로 팔아 먹거나 앵벌이에 동원했다. 청대의 여러 문집과 소설에 따르면, 돈을 벌기 위해 어린애들을 잡아다가 장애인으로 만들고 앵벌이를 시켰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들이다. 서로 연합을 이뤄 대규모 아동 납치 조직으로 성장한 개방들을 관청이 적발한 사례, 어린 아이를 약취시켜 유괴한 뒤에 신체를 훼손시키고 배에 태우고 다니며 항구에서 구걸을 하게 한 것을 적발한 사례가 가장 대표적인 일들이다. 심지어 위의 아동 납치 조직은 개방들끼리 작당해 만든 게 아니라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배후 세력'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개방 중에는 인신 매매과 신체 훼손 같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부류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대적 배경은 송대(宋代)지만, 실제론 명대(明代)의 사회를 묘사하고 있는 금병매에도 걸개들의 인신매매나 성적 착취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개방의 행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5]

개방에 속한 걸개들의 불법 행위와 폭력은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하여 지역 사회의 골칫거리였기에 청 왕조는 거지들을 단속하려 했다. 원적지 송환, 단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단두를 매개로 거지들을 통제하는 전통적인 정책부터 구호 시설 수용, 인적 사항 파악 및 거주지 제한, 대규모 단속 작전, 소속된 거지가 죄를 저지르면 개방의 단두를 처벌하는 연좌제 등등 다양한 방안들을 시행했지만, 워낙 거지들의 수가 많은데다 낮에는 숨어 지내고 야밤에만 움직이니 체포와 단속이 어려웠다. 게다가 지방 관청의 관할권을 넘나들며 도망을 치니 치안 당국 입장에서는 행정적 문제까지 겹쳤다.

그래서 청 왕조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개방은 살아남았고, 민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흑사회의 한 부류가 되어 폭력 조직으로 활동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단속을 받아 소멸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재에도 개방과 유사한 앵벌이 조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호주경찰에 들킨 '직업거지'…망신당한 中 "쥐똥이 죽솥 망쳐"

2.3. 결론

현실 세계의 개방은 중국인들의 지탄을 받은 사악한 범죄 조직이었으나, 김용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개방을 재해석한 소설을 내놓으면서 그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김용 소설을 통해 알려진 무협 세계의 개방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충보국하는 애국지사들의 단체이며, 대다수의 무협 작가들이 김용의 영향을 받아 개방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2010년대 이후에 개방을 중립적으로 묘사한 소설들도 이들을 정보 전문 집단으로 간주할 뿐이지 사악한 조직으로 보진 않았다. 무협 소설계에서 현실 세계의 개방을 구현한 작품은 그 수가 적은 편으로 '무림 속 검은머리 외국인' 같은 몇몇 작품들이 실제 개방의 모습을 구현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한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개방은 60 ~ 80년대에 존재한 앵벌이 조직과 폭력 조직, 장항 수심원과 형제 복지원 같은 부패한 복지 시설이 뒤섞여 있는 기괴한 괴물로 볼 수 있다. 서브 컬쳐와 인터넷 문화 분야의 경우, 현실 세계의 개방과 가장 유사한 집단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창조한 가상의 범죄 조직이나 해병 문학 속의 해병대이다.

참고 문헌
- 강건 시기 강남 걸개 문제와 '성세'의 허상
- 금병매를 통해 본 16세기 중국 사회
- 명 · 청 시대 사회 경제사

2.4. 무협물에서의 개방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개방(무협)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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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대(淸代)의 사례[2] 청대(淸代)의 사례[3] 위 문단에서 소개한 진경제도 야경꾼 일을 한 적이 있다. 명대의 문인 주국정(朱國禎)이 쓴 소설인 용당소품(涌幢小品)에 따르면, 시를 잘 짓는 거지가 있어 이에 감탄한 등장 인물이 과거 공부를 제안했으나 거지가 이를 거절한 내용이 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시나 노래에 능한 거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4] 전근대 중국에서는 환과고독(鰥寡孤獨) 같은 사회적 약자들과 빈곤층들에게 口糧(구량)이라고 이름지은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는 복지 제도가 있었다. 개방은 서리들과 짜고 자신들의 신분을 위조해 구호 물자를 받아 먹은 것이다.[5] 거지가 개를 끌고 다니길래 유심히 봤더니 개가 아니라 거지가 벙어리로 만들고 뭔지도 모를 동물 가죽을 씌운 아이였다는 일화, 불구의 몸을 한 여자 아이가 구걸을 하는 주변에 남자 거지들이 이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사회 보호망과 치안이 나쁘고 경제 발전이 미진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당장 한국만 해도 60 ~ 70년대에 아동을 납치해 앵벌이를 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