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b31c31> 상징 | 국기(일장기) · 국가(기미가요) |
시대 | 1910년대(무단 통치) 1920년대~1930년대 초반(문화 통치) 1930년대 중반 ~1945년(민족 말살 통치) | |
통치기관 | 조선총독부(청사) | |
언어 | 일본어 · 조선어 | |
정치 | 조선 주둔 일본군 · 일본 제국 경찰 · 토지 조사 사업 · 산미증식계획 · 민의창달 · 북선개척사업 · 농공병진 · 남면북양 · 농촌진흥운동 · 국가총동원법 · 전시증세령 · 내선일체 · 창씨개명 · 황국신민서사 암송 · 궁성요배 · 신사참배 · 정오묵도 · 가미다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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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 조선사편수회 · 식량영단 |
<colbgcolor=#003478><colcolor=#fff>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청사) 中央廳 (舊 朝鮮總督府 廳舍) Capital Hall (Government-General of Chōsen Building) | |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 | |
국가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일제강점기 조선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기능 | 조선총독부 청사[1] 1926년 10월 2일 ~ 1945년 9월 7일 |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4일 | |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1948년 5월 31일 ~ 1950년 6월 27일 1950년 10월 7일 ~ 1950년 11월 26일 | |
중앙청[2] 1962년 11월 22일 ~ 1983년 5월 31일 | |
국립중앙박물관 1986년 8월 21일 ~ 1995년 8월 14일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3] |
역사 | 1916년 7월 10일 기공 1926년 10월 2일 완공 및 개장 1962년 11월 22일 전면 개보수 및 재개장 1983년 5월 31일 관리주체 변경[4]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995년 8월 15일 철거 개시 1996년 11월 13일 완전 철거 완료 |
▲ 전면에 콘크리트 광화문을 세운 모습 |
▲ 철거 직후 모습 철거된 후 드러난 큰 지붕의 건물이 근정전이다. 현재 존재하는 전통 목조 광화문은 2006년 말 사진 속의 콘크리트 광화문을 철거한 후 2010년에 본체를, 2023년에 월대를 복원한 것이다. 왼쪽 뒤에 보이는 파란 지붕은 청와대 본관이고, 그 앞의 기와 지붕은 경회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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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의 통치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 소재였던 건물이다.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5]이라고 불렸으며, 정부 수립 직후에 대한민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됐다. 국회의사당은 1950년 부민관으로 이전했다가 1975년에 준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했고, 정부 부처들도 정부중앙청사나 정부제2종합청사로 이전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6] 1995년 김영삼 정부 당시,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2. 건물 특징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 일대를 재현한 축소 모형[7] |
이 건물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건물 부지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전면부를 헐어버린 자리에 지었는데 이로 인해 궁궐의 중심 지역인 근정문 코앞까지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 뒤를 완전히 가리는 형상이 되었고, 경복궁 뒷편 북악산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되었다. 이러한 부지 선정은 표면적으로는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채택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문화·역사·민족적 심리를 압도하고 일본 제국의 우월성을 선전할 자리를 물색한 것이 여겨진다.
건축에는 당시엔 최신 문물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건축에 사용된 철근은 일본 야하타시[8](현재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야하타히가시구) 및 오사카부 등지에서 구해왔다. 외벽 표면은 경성부 창신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을 썼고 대리석은 평양부, 원산부, 황해도 금천군 등에서 캔 것을 사용, 모래 및 자갈은 한강에서 구해오고 시멘트는 오노다시멘트[9] 제품을 썼으며 그 외에 장식철물, 문철물, 가구, 공예품 등은 미국과 유럽에서 수입해 사용했다. 지붕은 바로크 양식 건축물에 잘 쓰이는 구리 돔 지붕이며 돔 지붕의 외장재로 외국산 구리 동판 2만 4800근(1만 4880 kg)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건설 직후에는 붉은 구릿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녹슬어 청동색 지붕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호화로운 건물이었는데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의 여파로 국고가 거덜날 지경이라 대만을 합병했을 당시와는 달리 조선에는 투자할 돈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큰 돈을 들여 궁궐 자리 바로 앞에 이토록 호화스러운 건물을 지은 건, 조선인들에게 조선 왕조는 막을 내렸고 일본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각인하기 위한 선전의 목적이 컸다.[10][11]
조선총독부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
한편 조선총독부 청사는 위 사진과 같이 하늘에서 바라볼 때 '日'(날 일)과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로 인해 일본 제국이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하여 조선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부에 '日本' 글자를 박았고 총독부 건물이 그 '日'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존재한다. 실제로 위 사진을 보면 정말 그런 모양이며 당시의 일본인들도 이런 풍문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본 제국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의사당,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가 모두 '日'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제국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자리에 두어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이나 이것이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한 이유가 반영된 것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되려 일제는 당대 조선에서 많이 믿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일본 제국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형태의 건물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이전인 1800년대 중후반 서양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 양식이 유행했으며 이 영향으로 인해 서양의 근대 건축물 중에는 사방을 건물로 두르고 가운데를 비우는 형태가 다수 존재한다. 특히 현존하는 독일 국회의사당, 미국 재무부 건물, 루브르 궁전 등이 대표적인 제2제국 양식이 반영된 건물이며 이들은 총독부 건물보다 이전에 지어졌지만 이미 '日' 형태와 유사하게 지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총독부 건물은 독창적인 형태의 건축은 아니며 당대 혹은 그 이전에 서구에서 유행하던 건축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큰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일본 제국이 정말로 '日'의 형태를 의도하고 건물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당 양식은 당대의 일본의 건축이 아니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형태라는 것이다.
3. 역사
조선총독부 청사의 역사를 설명한 EBS의 영상 |
3.1. 청사 건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의 일본공사관을 청사로 사용했지만, 1908년에 건립된 용산구의 통감부 건물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했다. 그러나 직원 수는 늘어나고 사절들은 점점 많이 내방하고 온갖 기관들을 통괄하느라 업무량이 폭증했다. 그래서 1910~1911년에 증축했지만 택도 없었고, 결국 넓은 청사를 신축하기로 했다. 원래는 현재의 서울시청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지만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반대해 무산되었고,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忠太)[12]가 경복궁 터로 정했다.
1912년에 경복궁을 개조해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을 철거했다. 1914년에는 이듬해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을 헐어버렸다. 사실 이미 일본은 1910년 경복궁 전각 6806칸 중 4천여 칸을 경매로 내놓아 매각한 상태였고[13] 이렇게 경복궁 훼철과 공사 자금과 땅을 마련한 일제는 청사 건립에 돌입한다.
1912년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게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했으나 1914년에 기초 설계만 남긴 채 사망했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14]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 설계를 완성했다. 건물의 큰 틀은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깝지만 세부적인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이다.[15]
1916년 6월 26일 지진제 거행 후 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간 5년에 비용 300만 엔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 완공은 10년 뒤인 1926년에 됐고 비용은 675만 1982엔이나 소요됐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갑절로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 일본인 석공 300명과 한국인 노동자 200명이 해마다 투입됐고, 시공사도 오쿠라[16]/시미즈구미[17] 경성지사였으나 비용/공기 문제로 1918년부터 총독부 직영으로 바뀌었다.
경복궁 입구 역할을 하던 광화문 역시 철거될 운명이었으나 반대 여론에 부딪혀[18]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 해 경복궁 건춘문 옆으로 옮겼다.[19] 일제는 광화문을 옮긴 후 그 자리를 '총독부 광장'이라 부르면서 각종 옥외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까지 군정청 광장, 중앙청 광장 등 이름만 달리하며 여러 관제 행사의 개최 장소로 사용됐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37년에 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했다. 이곳은 8.15 광복 이후 경무대를 거쳐 지금의 청와대 부지가 되었다. 1930년대 말 전시체제 도입으로 총독부 조직을 확충하면서 1937년 제1별관, 1940년 제2별관을 각각 신축했다. # 1940년대 초반에 제3별관도 신축했지만 정확한 완공년도는 미상이다. 이중 1별관은 광복 후 문화공보부 등 부속 기관들이 입주했다가 1982년 이후 철거됐고, 3별관은 1969년부터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가 자리잡다가 1983년 정부중앙청사로 이전 후 1986년에 철거됐다.
참고로 총독부를 신청사로 이전한 뒤 남산에 위치하던 구청사이자 구 통감부 청사 건물은 '은사기념과학관'이라 하여 일본의 과학기술과 공업 성취를 선전하는 과학전시관으로 사용하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 국립과학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해당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파괴됐다. 해당 부지에는 KBS 사옥이 들어섰다가 국토통일원(통일부의 전신),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서 현대에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 있다.
3.2. 해방과 그 이후
1945년 9월 9일 미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
1953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의 모습, 광화문이 복원되기 전이라 청사 정면이 뚫려 있고 전차 궤도가 깔린 모습을 볼 수 있다.[20] |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합중국 육군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 회의실에서 미합중국 육군 제24 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과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일본 육군 대장의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후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렀다. 중앙청(中央廳)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정인보가 캐피탈 홀을 직역해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중앙청 중앙 홀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국회를 개의했고, 그해 7월 17일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 공포식을 열였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다.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됐으며 정부 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청 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중앙청 건물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고, 본래는 신청사 건립 계획이 있었지만 6.25 전쟁 발발로 무산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 후 후퇴하던 북한군이 서울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그 때문에 서울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파괴되진 않고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태극기 게양 사진이 찍힌 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들이 9.28 서울 수복 당시 태극기 게양 장면으로 아는 위의 사진은 사실 1957년 서울 수복 기념 행사 때 재현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서 중앙청 건물의 벽면이 흰색으로 깔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패주하는 인민군이 중앙청을 방화했기 때문에 수복 직후 중앙청 건물은 창문 유리가 대부분 깨지고 불이 난 건물 내부에서 창을 통해 연기가 나와 시커멓게 그을렸다. 이 사진이 1950년에 찍은 게 아니라는 증거들 중 하나다. 서울 전투가 종료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 게양대에 인공기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 이걸 내리고 미군이 태극기가 아닌 유엔기를 달았다. 실제로 태극기를 게양했던 장소는 이 게양대가 아니라 사진에도 보이는 지붕 위 첨탑 방면이었다.
이 게양대는 중앙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남아 있었다. 수복 당시에 태극기를 걸었던 당사자인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예비역 해병대령[21]도 생전에 중앙청을 해체하더라도 게양대는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게양대도 철거됐다. 이 게양대 자리가 복원될 흥례문과 협생문과 그 일대였기 때문에, 경복궁 복원이 계획된 이상 특정 개인의 의사에 따라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이 태극기는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소장 중이다.
1953년 환도 후 제1별관 2층을 임시 국무회의실로 썼고, 1962년 11월 22일에 6.25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해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으며 중앙청 건물 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 회의 장소로 쓰일 벙커를 세우기도 했다. 1979년에는 경복궁 마방 터에 공무원 편의시설 '후생관'이 들어섰다.
1968년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고 광화문이 콘크리트로 복원됐다. 1970년에는 바로 건너편에 정부종합청사가 완공돼 대다수 기관들이 이전하고, 1982년에는 정부제2종합청사(과천청사)가 완공되면서 법무부, 보건사회부, 농림수산부, 건설부, 과학기술처 5개 기관이 이전함에 따라 정부 청사로서 기능을 종료했다.
이에 따라 박물관으로의 개조 계획이 추진됐으며, 개보수 과정을 거쳐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3년 안보회의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 중앙청 후생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사회교육관으로 개편돼 1995년 8월 14일까지 정상 운용하다가 1995년 8월 15일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를 시작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던 문화재들 전부가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 이후 경복궁 경내의 당시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축 및 개축해 근처 벙커에 임시로 보관 중이던 문화재를 이전했고 2005년부터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3.3. 철거
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청사/철거 문서 참고하십시오.3.4. 철거 이후 상황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
본격적인 철거에 앞서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철거된 첨탑과 일부 잔해는 수습되어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조성에 쓰였다. 본래는 지금과 같이 일부 부재로 공원을 조성할 계획은 아니었고 총독부 건물 전체를 이전해 항일운동 기념관으로 쓸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용 문제로 무산되고 일부 상징적인 석재로 현재의 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의 조성 목적은 삼전도비 처럼 치욕의 역사를 보존해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며, 총독부 부재들이 어떠한 보호 설비 없이 방치돼 있어 부식되거나 심지어 관광객들에 의해 낙서가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는 기본적으로 의도한 바로 공원의 위치부터가 독립기념관의 서쪽, 즉 해가 지는 방향이며 첨탑도 지하 5m 깊이에 배치하여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일제 식민 통치의 몰락과 함께 식민지 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것이다.[22] #
일각에서는 이렇게 방치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도 있다. 해당 건물은 일본 제국이 한국을 식민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나 전술했듯이 일제 패망 이후 일제강점기보다 더 오랜 기간 중앙청으로서 한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온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철거 이후 중앙홀 대리석, 국기게양대, 일부 석재 등 보존 가치가 있는 부분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의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및 전시되고 있다. 또한 일부 철거석의 경우 철거 완료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인 '겨레의 얼 되살리기 한마당'[23] 행사 이후 시민들에게 기념품으로 증정되었다.# 또한 총독부에는 해태를 닮은 사자상이 두 개 있었는데 이 사자상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학생회관(A동) 앞 공터에 전시되어 있다.[24]
서울 창신동 채석장에서 채석되어 조선총독부 청사 석재로 사용된 돌들은 건물 철거 이후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청에서 진행된 '돌의 귀환 행사'를 통해 '서울돌'이라는 이름이 붙어 서울로 돌아왔으며 태화빌딩에서 전시되다 그 중 일부는 옛 태화관 터에 조성된 3.1독립선언광장의 주춧돌로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돌들은 남산예장공원[25]으로 옮겨졌다.#1 #2
현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자리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과 그 주변 행각들을 복원했다.
4. 건물의 가치
4.1. 건축적 가치
건물의 구조나 내 외부의 의장은 크게 보았을 때 근대 유럽의 네오 바로크 양식에 가깝다.그러나 지역색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타 건물을 벤치마킹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여럿 있다. 일례로 이 건물 정면의 동, 서 끝 부분은 1910년에 세워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 시청(Durban city hall)의 그 부분과 매우 닮았다. 더반 시청이 10년 정도 먼저 세워졌고 두 건물 다 비슷하게 네오 바로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문제의 해당 부분은 둥글게 아치 형태로 처리된 코니스(cornice), 그 아래의 절단된 코니스를 비롯한 엔타블러처(entablature), 그 아래의 벽체 속에 매립된 원형 기둥들이 조합되는 등 구성이 지나치게 유사하다.
이런 요소들은 미켈란젤로의 캄피돌리오 이래로 르네상스, 바로크 계통의 양식들에서 종종 나타났던 것들이다. 하지만 더반 시청과 조선총독부만큼 유사하게 조합되어 배치된 사례는 드문데, 우연의 산물일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사실 더반 시청도 벨파스트 시청(Belfast city hall)의 복제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물인데, 해당 부분은 벨파스트 시청에서도 비슷한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세부적인 조합 방식이나 비율 등은 좀 다른 편이다. 일본 건축가들이 영국식 네오 바로크 건물의 모방을 목표로 잡은 상태에서 비교적 건설된지 얼마 안 된 영국식의 관공서 건물에 주목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의 주 재료는 당대의 최신 재료였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지만 양식은 구시대적인 과도기적 건물이다.[26] 설계되었던 1910년과 달리 건물이 완공되었던 1920년대는 유럽에서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되고 있던 시기라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는 1930년대 이후에는 유럽 건축을 대놓고 모방함을 부끄러워해서 이런 양식을 따른 건물을 별로 짓지 않았다.[27] 즉 세계 건축이 대규모로 변하는 시기에 옛 유럽 양식을 모방해 일본만의 장식으로 채웠고 이후 시대의 건축물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측 기둥 | 반구형 돔 |
중앙홀 북측 | 중앙홀 남측 |
석조 주두 | 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
준공 초기 총독실 내부 |
물론 일제는 나름대로 공들여 만들기는 했다. 실내는 벽과 바닥을 타일로 장식하고 부분적으로 암각한 석조각과 대리석, 콘크리트 부속 등으로 치장하였다. 바닥 타일의 경우 중앙홀을 중심으로 별모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중앙 천장의 유리화에도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실외는 조선에서 채굴되는 화강암 등을 활용하여 주요 장식을 석공들이 수작업으로 완성하였다.
4.2. 각종 부속 예술품의 가치
조선총독부 중앙 홀 남쪽 벽화 〈하고로모〉. 일본의 선녀 승천 설화를 그린 것으로 북쪽 벽화 '선녀와 나무꾼'과 유사한 내용의 설화를 배치해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총독부의 조선 통치 의중이 반영되어 있다. |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청사 안에 있던 그림과 여러 미술품은 그것을 그린 일본인 화가들의 후손이 반환 요청[28]을 하여 폐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반환은 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KBS에서 조선총독부의 미술품들을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는데,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아주 오랫동안 가지리라 보고 일부러 조선총독부 안에 전시했다고 한다. 당시 방송에서 약 650점이 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박물관 지하에 둘둘 말려서 통에 넣은 채로 보관된다고 나왔다. 이것들은 오랫동안 전시 없이 보관만 되었으나 2014년에 와다 산조(和田三造)가 그린 중앙 홀의 남쪽 벽화 〈하고로모〉는 일제가 수집했었던 다른 예술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시 전시한 바가 있다. 해당 작품에 관한 상세한 설명
4.3. 역사적 가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역사를 보존하여 후세에 반성과 자성의 계기로 삼는 상징이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자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와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보존 상태가 양호했던 건축물이므로 근대 건축 유산에 들어갈 가치가 있었다. 가령 같은 일본 근대 건축물이자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행 본관과 옛 서울역 역사는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이다.또한 이 건물이 조선총독부로 사용된 것은 불과 19년이며, 그 뒤로는 줄곧 대한민국 정부 청사로써 사용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조선 총독이 미군에 항복한 장소도, 대한민국 헌법이 최초로 발표된 곳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곳도, 6.25 전쟁 당시 서울 수복의 상징과 같은 태극기 게양식의 배경이 된 곳도 다 이곳이었다. 즉 일제강점기부터 철거 직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순간을 함께한 건물이며 그로 인해 충분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 홀만이라도 따로 옮겨서 보존하자고 호소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제강점기를 연상시켰고, 그 위치가 한국의 수도에서 위압적으로 잘 보이며, 경복궁을 훼손하고 있었다.[29] 또한 이 건물을 보러 오는 일본인들은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이곳이 한때 자신들이 식민지배했던 곳이라는 우월감과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도취될 뿐이라, 그걸 보는 한국인들을 매우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기 이전까지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일본인들 대부분이 관광 코스에 반드시 넣었다고 한다.[30][31]
4.3.1. 등록문화재
아이러니한 것은 총독부 철거로 인해 근대 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서 2000년대 이후에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재평가와 보호 제도가 생겼다는 점이 있다. 이 덕분에 군산시의 동국사 등도 헐려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살아남았고,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보호 기능이 미약한 부분이 있다.4.4. 경관 문제
조선총독부 청사는 건물이 너무 거대해서 북악산을 완전히 가렸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 사이에서 답답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진 뒤에는 북악산이 보이면서 가슴이 뻥 뚫린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많았고, 당시 9시 뉴스로도 보도된 적이 있다. 실제로 지금 개선공사가 끝난 광화문 광장에 가면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근정전, 청와대, 북악산 순으로 주요 상징물과 유적, 지형지물 등이 정렬되어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당시 '중앙청' 건물이 경복궁은 물론이고 청와대도 가렸기 때문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청와대가 북악산 아래 있기는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반면 중앙청을 철거한 지금은 잘 보인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이렇게 청와대의 위치를 민간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해주니 보안상 없애기 아까운 물건이긴 했다. 광복 당시부터 철거가 거론되었으나 군사 독재가 끝난 문민정부에서야 총독부 해체가 실현된 것이 우연은 아닌 것. 실제로 경복궁 복원사업의 첫 단추는 다름아닌 30경비단의 경복궁 외부 이전이었고 이는 6공 들어 진행된 권위주의 청산의 일환이었다.[32]
5. 부속건물
-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실 조선총독부에는 부속 시설로 원래부터 전시관으로 세워진 건물이 존재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이란 건물로, 1915년에 개최된 조선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위해 조선의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한 2층 건물이었다. 경복궁의 동편에 위치했던 건물이다. 확장 계획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실행되지 못했고, 이후로도 국립중앙박물관 부속시설을 거쳐 전통 공예관으로 쓰였다. 이쪽은 1995년에 조선총독부가 철거되기로 결정한 이후 같은 연도에 경복궁 복원 사업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잘 기억되지도 않는 편. 이후 경복궁의 동궁(왕세자의 처소)이 그 자리에 복원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3년 4월 9일자에서 조선총독부 청사에 대해 다루었다.
* 드라마 각시탈: 독립운동 관련 내용으로 일제 순사 등의 공권력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극중에 종종 나온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본관을 베이스로 CG를 만들어 재현했다.
* 영화 파묘: 박지용이 친일파 조상 귀신에게 빙의당한 뒤 더 플라자 호텔 객실 밖을 바라보는데, 이때 광화문 뒤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아웃포커스된채 보인다.
* 북한의 한국 전쟁 영화인 72시간에서 인공기가 개양되는 서울 중앙청이 등장한다.[33]
7. 다른 나라의 총독부 청사
- 대만 총통부 청사는 1949년부터 지금까지 대만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마잉주 정권 때부터 이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철거하자는 말은 없다.
- 한국과 달리 철거 여론이 미미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범람연맹 또는 외성인의 입장에서 총독부 건물은 패전국의 상징으로, 승전국인 중화민국이 획득한 전리품으로 여기는 입장이다. 한편 범록연맹 또는 본성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역사적 문제(독립문제, 지방의 소외감,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 등등) 등이 얽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지배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현재의 중화민국 정부 역시 자신들의 고장을 지배하는 여러 세력들 중 하나로 보기 때문에 대만총독부 건물을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대만총독부 건물은 지금도 잘 쓰이고 있으며 타이베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일본인 관광객이 항상 들르는 코스 중 하나. 대만 총통부 건물은 외적으로 상당히 이국적인 독특한 디자인과 밝은 색감으로 눈에 잘 띄어 관광 코스로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한국처럼 기존의 문화유산을 헐거나 뒤틀고 지은 것도 아니라서 이걸 헐어버린다고 딱히 뭔가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34]
-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와 비교해도 예산을 매우 많이 쓴 편이다. 조선총독부를 제외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에 상당한 예산과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반도에 진출하게 했었다. 미군정이 들어섰을 때 남한에 적산 불하된 일본 기업만 2700 여개였다. 아무래도 일본 본토가 식민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 문제와 지진의 문제로 수도를 한반도로 옮기려고 했었으며, 아예 영토 교환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건물이 추후 정부 청사로 활용될 수도 있었던 만큼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마찬가지로 인도 뉴델리에는 영국 식민지 시절 세워진 '인도총독부' 건물(사진)이 있는데 이후에는 인도 대통령궁으로 쓰이고 있으며 베트남에도 프랑스 식민지 시절 세워진 총독부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주석의 주석궁(관저)으로 사용 중이다.
8. 기타
일본 국회의사당 청사 |
- 4년 늦게 착공된 일본 국회의사당 건물과 외관과 구조가 비슷한 편. 마찬가지로 대만에 지어진 대만총독부 건물과도 그 구조가 비슷한 편인데 이는 전술했듯이 당대 서구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승강기를 설치한 건물이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 승강기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
- 다사다난한 한국 근현대사를 반영하듯, 많은 국적의 깃발이 내걸리고 내려간 건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장기부터 시작해서 미군정 기간 동안에는 성조기가, 정부 수립 이후에는 태극기가 내걸렸다. 이후 6.25 전쟁 때 서울이 함락당하면서 인공기가 내걸렸고 수복과 함께 태극기가 다시 걸렸다. 국적 깃발은 아니지만 수복 직후에는 유엔기도 걸린 역사가 있다.
- 김정은은 남북관계에서 수틀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함락 당시 중앙청에 인공기를 내건 것에 매우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6년 3월에는 탱크병 경기대회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천금같은 기회는 우리가 먼저 선택하게 될 것이라면서 '제일 먼저 서울에 돌입해 괴뢰중앙청에 공화국깃발을 꽂은 영웅 땅크(탱크)병들의 싸움 본때와 투쟁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 2023년 5월, 평양의 6.25 전쟁의 '승리'를 주장하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서 '우리 인민군대가 반공격으로 넘어간지 3일만에 적들의 아성인 서울을 해방하고 괴뢰 중앙청에 공화국 깃발을 휘날린 것은 세계전쟁사에 특기할 전과라고 하시면서 괴뢰 중앙청 깃발대에 공화국기를 띄운 사진도 전시하여야 한다고, 서울해방작전에 대한 해설에서 괴뢰중앙청 깃발대에 공화국기를 띄운 사실을 제일 중요시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등 남한을 정복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
- 철거 과정에서 중앙계단 아래에 89.25㎡(약 27평) 규모의, 모두 4개의 방과 복도로 구성된 지하실이 발견되었는데 이게 누가 봐도 감금시설에다 고문실이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방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0.2평(독방)과 5평, 2평 정도의 크기였으며 각 방으로 통하는 철판문은 14㎝의 두께인데 나무와 모래로 속을 채워 넣어져 있었다. 방음을 위한 목적임을 짐작케 한다. 여기에 잠금장치와 감시창도 있었다. 각 방에 배수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당시 광복회 회원들은 배수로를 두고 물고문 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 때 흘린 피를 물로 닦아내기 위한 시설로 추정했다. 이곳을 공개하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은 30년 경력의 전직 서대문형무소 교도관 출신자들 2명을 초빙해 지하실을 둘러보게 하고, 잠금장치와 감시창 등의 시설로 미뤄 일제가 사용한 전형적인 고문·감금실임을 확인받았다고 한다.# 다만 일제의 식민정부로서 쓰인 관공서격인 건물에 고문실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 당장 반체제인사를 실제로 고문했던 군사정부 당시에도 청와대나 정부청사 지하에 대공분실과 같은 시설을 두진 않았다.
- 2019년 3월 1일, KBS 뉴스 9에서는 광화문에서 야외진행을 하면서 조선총독부 청사를 증강현실로 재현했다. 이 날 보도는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주도자급 인물 140명을 계보도 형식으로 작성한 문서를 발굴한 단독 보도를 전하면서 총독부 청사 건물을 그래픽으로 재현한 것이다. #
- 한국조경학회지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 구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을 사례로 ->에 체계적으로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관련된 사건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다.
-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의 2009년에 완공된 신본관이 이와 비슷해 초기에 한양총독부라고 비웃음을 당한적이 있다. 다만 이것은 한양대학교의 전신학교인 동아공과학원을 모티브로 해서 지은 것이다.
-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첨탑과 몇몇 부재들은 따로 보존했는데 일부는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다.
- 합천영상테마파크에 조선총독부 청사 촬영용 세트장이 있다. 2004년 합천영상테마파크 개장 당시부터 총독부 세트장이 있긴 했는데 이 건물(신청사)이 아닌 남산시절 통감부 건물을 모티브로 지어서 이질감이 컸다. 결국 철거하고 2023년에 신청사 건물의 모습으로 다시 건설했다. 내부는 조선총독부 이머시브 영상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1]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조선총독부 청사로서 쓰인 기간은 19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청으로 쓰인 기간만 20년이 넘는다.국회의사당과 중앙박물관 사용 기간까지 합치면 29년 가량 사용되었다.[2] 신설된 정부서울청사와 정부과천청사로 단계적으로 이전했다.[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4] 총무처→문화공보부. 정부청사였던 중앙청으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건물의 관리 권한을 총무처에서 문공부로 넘겼다.[5] 3호선 현 경복궁역의 초기 역명은 '중앙청역'으로, 1985년 서울 지하철 3호선 개통 당시 중앙청이 반영되었다. '중앙청역'에서 '경복궁역'으로 바뀐 시점은 1987년 5월 1일이다.[6] 당시 뉴스를 보면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건물에 유물들을 전시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의견도 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경에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새로 지어 재개장된다.[7] 총독부 뒷편의 작은 기와문이 바로 근정문이다.[8] 일본 두 번째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가 있다. 현재도 스미토모그룹 산하의 신일본 제철에서 관리 중.[9] 1998년 닛폰시멘트와 통합해 다이헤이요시멘트가 되었다.[10] 그 이전부터 조선 총독은 조선왕이라고 불렸고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행사도 진행했었다.[11]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고종은 경복궁을 꺼렸기 때문에 오히려 경운궁에 서양식 정각을 세우는 등 경운궁을 메인으로 사용했고, 경복궁은 사실상 유기하다시피 하였다.[12] 이 사람은 메이지 신궁, 조선신궁도 건축했다.[13] 일본인들에게 매각된 전각들은 일본 기생집, 별장에 활용되거나 개인 미술관에 전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낙찰자 중에는 친일파 부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조각조각 나서 팔린 궁의 건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사찰의 자재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이 중 하나는 온돌 째로 호텔로 개조돼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묵은 후 현대식 난방 체계를 만드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14] 대만총독부 신청사 건립 참여자.[15] 일제가 남긴 문서에는 조선총독부의 양식을 근세부흥식(近世復興式)이라고 표현했는데, 단어는 대략적으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 건물의 양식을 네오 르네상스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네오 르네상스보다는 네오 바로크에 가깝다. 물론 세부 의장은 일본의 독자적인 것을 사용했다.[16] 현 다이세이건설(大成建設). 창업주 오쿠라 기하치로는 경복궁 자선당을 일본으로 빼앗아갔다.[17] 현 시미즈건설(清水建設). 1804년에 설립됐으며 훗날 세워진 국립 요요기 경기장과 선샤인 60도 이 회사의 건축물이다.[18] 광화문 철거는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물론이고,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학자를 비롯한 일부 일본인들까지 반대한 사안이었다. 다만 그 덕에 겨우 살아남은 이 원래 광화문은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불타 소실되었다.[19] 이를 그린 수필이 설의식의 '헐려 짓는 광화문'이란 작품으로, 과거 6차 교육과정 당시에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기에 현재 40대 이상의 중장년층들은 한 번쯤은 읽어본 글이다.[20] 참고로 2023년 3월 7일, 경복궁 광화문 월대 복원공사 중 땅을 파다가 사진에 보이는 전차 궤도가 발굴되었다. 이 노선은 서울전차 효자동선으로 일제강점기 부설 당시에는 경성전차 고궁지선이라 불렀다.#[21] 서울 수복 당시 소위[22] 다만 관광객에 의한 낙서 훼손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본적으로 공공장소에 허가 없이 낙서를 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또 다른 치욕의 역사로 여겨지는 삼전도비에도 낙서가 행해진 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삼전도비 스프레이 훼손 사건 참고.[23] 근정전 일대의 터를 정화하기 위한 의식 풍물 '터가심'을 시작으로 농악을 비롯한 각종 민속예술 공연이 펼쳐졌다.[24] 본래 두 개가 다 있었지만 2024년 기준 하나만 남아있다고 한다.[25] 과거 한국통감부 통감관저가 있던 장소이다.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공원인 '기억의 터'가 조성되어 있다.[26] 원래는 벽돌 조적조 건물로 계획되었으나 변경되었다. 유럽에도 근대의 신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지만 양식은 구시대적인 석조 건물 형식으로 지은 사례들이 많은데, 오귀스트 페레의 샹젤리제 극장이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스보그 성 등이 있다.[27] 고전 유럽식 건축에 일본식 건축 양식을 더 적극적으로 결합한 제관양식(帝冠樣式)의 비중이 커진다.[28] 유상반환 요청과 무상 반환 요청이 섞여 있었다.[29] 1988 서울올림픽 당시에도 외국인 대표 관광코스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복궁이 소개되었는데, 정작 경복궁은 여기저기 만신창이가 되어 경회루 정도를 제외하면 볼 게 없는 상황이라 여러모로 문제가 되었다.[30] 이 때문에 1999년에 집필된 고원정의 대체역사소설 <횃불>에서는 일본 제국 루트를 그대로 따라간 한국인들이 전후에 일본 여행을 가면서 도쿄의 일본총독부 청사를 돌아보며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모습이 묘사된다.[31] 조선총독부 청사처럼 조선 궁궐을 훼손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창경원 또한 한일수교 이후부터 전두환 정부 때 철거되기 전까지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옛 일본 제국의 영광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관광 코스에 넣는 경우가 많았다.[32] 이 시절 청와대의 보안에 대한 강박관념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청와대에서 와룡고개 넘어야 나오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축제용 애드벌룬을 띄우자, 청와대 경호실에서 바로 전화를 걸어 "애드벌룬 총으로 쏴버리기 전에 내리라"고 협박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33] 북한 인공기가 게양되는 장면은 관객이 현실감을 느낄 수 있도록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촬영했다고 한다.#[34] 참고로 대만에서 경복궁에 비견될만한 나름 고건축물에 해당하는 대만순무아문 청사 부지에는 대북공회당을 거쳐 현재는 중산홀이 들어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