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01:44:38

궁성요배

1. 개요2. 내용3. 유사 사례

1. 개요

궁성요배()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신사 등지에서 일본제국 내외지 주민 및 외국 교포에게 강제로 도쿄황거(궁성)를 향해 무슬림들이 메카하듯 절하도록(요배) 강요한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동쪽을 보고 절을 하지만, 미크로네시아를 비롯한 일본령 태평양 군도에서는 북쪽을 보고 절을 한다.

신정이나 천장절[1] 등 일제강점기 주요 명절에 조선인들을 포함하여 온 국민에게 강요했고, 특히 학생들에게는 매일 아침 조례 때 이를 행하게 하였다. 시기적으로는 국민들의 전의고취를 목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가장 극성이었으나 패전 이후 사라졌다.

요배란 단어는 멀 요(遙)에 절 배(拜)를 써서 멀리서 절함을 뜻한다. 그러니 궁성요배란 (천황의) 궁궐을 향해 멀리서 절한다는 뜻이다. 같은 뜻으로 황거요배(皇居遙拜)라고도 했고, 한국에서는 흔히 동방요배(東方遙拜)라고 불렀다. 일본 신토에서는 지금도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참배할 경우, 참배객들이 있는 곳을 요배소(遙拜所)라 부른다.

조선에서는 멀리서 절한다는 뜻으로 주로 망배(望拜)란 말을 썼고, 요배(遙拜)는 아주 안 쓰지는 않았으나 매우 드물었다.[2] 우리나라에는 구한말-일제강점기에 걸쳐 일본의 궁성요배로 요배란 낱말이 퍼졌기 때문에 단어의 원뜻과 달리 궁성요배만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2. 내용

하는 방법은 천황이 머무는 곳, 즉 황거(皇居)가 있는 방향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최경례(最敬禮)를 취하면 된다. 천황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는 공적 의례로, 기미가요, 일장기, 어진영[3]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됐다.

국가신토의 교리에 따라 천황을 신으로 떠받드던 일본 제국은 천황의 황궁이 있는 도쿄를 신성한 곳으로 간주, 일본인들에게는 물론 식민지의 주민들에게도 이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당연히 식민지 주민들은 압제자 군주에게 강제로 절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으므로, 일본의 패전 이후에는 따로 금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3. 유사 사례

만주국은 이와 유사하게 제궁요배를 실시하였다. 만주국 황제 푸이가 사는 궁성이 있는 신징(장춘) 쪽으로 절하도록 한 것이다. 만주국에서는 이를 궁성요배와 병행했다. 동쪽에 절하고 북쪽에 절하고 정신없었을 듯

고려조선에도 망궐례(望闕禮)라고 하여 궁성요배와 비슷한 의례가 있었다. 궁궐(闕)을 바라보며(望) 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정식으로는 궐(闕)이라는 글자를 새긴 나무 패, 즉 궐패(闕牌)에 대고 절을 하였으나 이런 패가 없다면 임금 계신 곳을 향하여 절하였다.[4] 조선시대에는 대한제국을 칭하기 전까지는 조선 임금의 상징으로 전(殿)이라고 새긴 나무 패를 사용했는데 이를 전패(殿牌)라고 불렀다. 중국 황제를 상징하고자 별도로 궐패를 만들어 설날동지, 만수절(중국 황제의 생일) 등에 절하였다. 궐패와 전패 모두 재질은 나무이고 생김새와 크기는 위패와 비슷하다. 중국 사신이 올 만한 장소에는 궐패와 전패를 모두 갖추었으나, 그렇지 않은 곳에는 전패만 두었다. 또한 전패에 대고 절을 할 경우에도 망궐례라고 불렀다.

궐패나 전패를 두고 망궐례를 할 때에는 패를 북쪽에 두고 참석자들이 남쪽에 도열하여 절하였다. 유교예법에서 군주는 북극성처럼 북쪽에 앉아 남쪽을 보고, 신하는 남쪽에 서서 북쪽으로 군주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 계신 곳이 실제로는 북쪽이 아니더라도 패를 북쪽에 두고 절함으로써 신하로서 예를 다함을 나타내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갈 적에 심지어 배 위에서도 망궐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신 일행들에게 망궐례는 자신들이 사신의 신분으로 공적으로 파견된 자들임을 유념케 하는 중요한 의례였다.

대한제국 시절에는[5] 전패를 없애고 대한제국 황제의 상징으로 궐패를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조선시대의 전패, 대한제국 시기의 궐패는 임금을 상징하므로 관리소홀로 파손되거나 도난을 당하면 책임자가 처벌을 받았다.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으로 파견된 외교관들이 궐패 대신 고종황태자의 어진, 태극기를 차려놓고 망궐례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망궐례가 궁성요배와 다른 점은 모든 백성이 아니라 관리가 주로 한다는 것이다. 매월 초하룻날(1일)과 보름(15일), 임금과 중전의 생일, 설날, 동지, 기타 명절이나 사신을 맞이하는 날에 하였다. 고을 수령이 특별한 날에 백성들을 이끌고 하기도 했지만, 궁성요배처럼 모든 백성에게, 혹은 매일 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관리조차도 매일 하지는 않고 위에 언급한 특별한 날에만 행했다. 전근대인 고려-조선시대에도 이 정도로 끝냈는데 자칭 근대 국가라는 일본 제국에서 오히려 이 궁성요배를 매일 하도록 모든 국민들에게 강요했다는 것부터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다.

해방 이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시 동방요배하듯 허리를 90도 숙여 태극기에 절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현대의 가슴에 손을 얹는 형태[6]로 바뀌었다.

한편 해방 이후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교포들은 3·1절 경축 행사를 개최했을 때, 히비야공원에서 한반도를 향해 '고국요배'란 것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궁성요배에서 요배의 방향을 한반도로 바꾼 것. 독립운동가들도 이러한 요배를 시행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에서 채택한 국민의례 기법이 태극기에 향해 최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태극기를 걸어둔 방향을 향해 45도로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하는 방식인데 이게 궁성요배와 구도가 거의 같다. 이를 국기배례(國旗拜禮)라고 불렀는데, 1919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러나 해방 이후 국기에 절을 하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기독교계의 지적으로 인해 오늘날의 국기에 대한 경례와 같은 동작으로 바뀌었다. #

실향민들은 명절에 임진각[7]에서 합동 차례를 지낼 때 고향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한다.


[1] 天長節. 황제의 생일을 가리키는 중국식 한자용어들 중에 '천장절'이 있는데, 도덕경에 나온 천장지구(天長地久)란 구절에서 따와서 '황제께서 하늘과 땅처럼 오래 사시길 바란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며 당현종이 처음 사용했다. 일본에서도 천황의 생일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양력으로) 메이지 시절에는 11월 3일, 다이쇼 시절에는 8월 31일, 쇼와 시절에는 4월 29일이었다. 대한제국에서는 황제의 생일을 만수성절(萬壽聖節)이라고 칭했는데, 이 또한 '황제께서 장수하시길' 바란다는 뜻이다.[2] 요배(遙拜)란 단어는 7세기에 집필된 역사서 진서(晉書)에도 등장하므로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는 아니다. 단지 조선에서는 주로 '망배'라 하였고, '요배'란 말을 잘 쓰지 않았을 뿐이다.[3] 천황황후의 사진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느 일본인 교사가 학교에 불이 났을 때 어진영부터 챙기다가 못 나오고 죽은 사례도 있을 정도로, 어진영을 천황처럼 대하도록 가르치고 또 강요했다. 그리고 이 한심한 행태는 북한김일성 김정일 사진 모시는 것으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4] 난중일기에도 매달 초하루에 이순신이 망궐례를 행한 기록이 드문드문 보인다.[5] 사실 제국 선포보다 14개월 앞선 1896(건양 1)년 8월 15일 칙령(勅令) 제53호 〈지방의 각 부·목·군의 ‘전패’를 ‘궐패’로 고쳐 부르는 데에 관한 안건〔地方各府牧郡殿牌以闕牌改號件〕〉 발포에 의함. #[6] 모자를 쓴 경우는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얹는 형태 (야구선수들이 이런 형태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군인 등 제복을 입은 경우는 거수경례.[7] 주로 평안도, 황해도 출신이 많이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