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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양 전쟁 후반에 일본군이, 제국 황군의 육군 장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도 열어준 제도. 전황이 매우 불리해지고 인적 자원이 모자라다 보니 장교까지 식민지에서 뽑아간 흔적이다.1938년부터 실시한 육군특별지원병, 즉 조선지원병과는 전혀 다른 제도이다. 육군특별지원병은 보통학교 졸업자 이상이 6개월간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서 훈련 받은 후[1] 이등병으로 입대 후 능력이 있는 자는 을종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하사관이 되었다.(병은 2년만에 제대함) 학도 특별지원병은 1944년 이후 고졸 이상자가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능력이 있으면 갑종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장교 교육 중 일제 패망을 맞이한다.
이 때문에 지원병 쪽에서 하사관 경력자들은 군생활이 훨씬 길었지만 저학력에, 지원하였다는 원죄가 있는 데 반해 학병 쪽은 경력은 짧지만 장교 출신에 강제로 끌려왔다는 정당성 때문에 해방 후 당당하였다.
2. 학병 운용 방식
1938년부터 일본군은 인원이 부족하자 지원병제를 도입했다. 육군특별지원병(조선지원병)은 당시 불경기라든가 공직 진출 등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1943년까지 17,664명을 뽑았다. 1942년 5월 8일에는 조선인 징병제를 일본 각의에서 결정하고 다음해 8월 1일 부터 실시하였다.그리고 조선인 대학생의 징집유예 중지를 결정한게 1943년 9월 30일이고 이에 응소하여 다음해 1월 20일에 입영 한자가 4,385명이었다.(일본 대학생은 조금 더 빨리 결정되어 1943년 12월 9일 입소됨.) 하지만 말이 지원이지 온갖 강압이 자행되었다. 그럼에도 11월 12일까지 자원율은 38%에 불과하였다. 나머지에 대해서도 일괄 휴학 처리 후 강제 입대 또는 공장, 광산 등에서 근무토록 하였다.
대상은 1943년 9월 징병유예 정지 공포로 입영 대상이 된 법문계[2] 구제대학 학부 및 구제전문학교 등의 고학력자로 1923년 12월 1일 이전 출생자가 해당되었다. 이후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는데 전문학교이고 뭐고 1923년 12월 1일 이후 출생자는 모두 징병되었다.
당시 고등교육을 받던 조선인은 고작 6,203명 정도이고 이중에서 이미 지원한 사람, 이후 징병될 사람을 제외하고 5,000명 중에서 4,385명이 학병으로 끌려갔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일본인 학병이 먼저고 몇달 후 조선인 학병제가 시작되었다.
구분 | 해당자 수 | 입대자 수 | 비율(%) |
조선 내 재학생 | 1,000 | 959 | 96 |
일본·만주·중국 유학생 | 2,929 | 2,150 | 77 |
그 해 미취업자 | 1574 | 941 | 60 |
졸업 중 기취업자 | 700 | 335 | 48 |
합계 | 6,203 | 4,385 | 70 |
일본군 징병주임참모였던 요시다 도시쿠마가 직접 작성한 자료에는 현역병 3,457명, 제1보충병 436명을 합한 3,893명이며, 조선총독부가 제국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4,385명인데 1·20 학병동지회도 이 수치를 따르고 있다. 정안기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에 따르면 4,610명의 지원자 가운데 1,419명이 지원하였고 적성검사를 받은 사람 중 합격자는 3,117명, 질병 및 기타 사유자 67명을 제외한 3,050명이 입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원 학교로 보면 주오대학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음이 메이지대학, 니혼대학,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순이며 경성제국대학, 도쿄제국대학은 물론 만주건국대학 출신자도 있었다.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 일단 이등병으로 끌려갔고, 일본인 학병은 간부후보생 시험을 봐서 전원 합격 시켰고 반은 갑종(장교) 반은 을종(하사관) 교육을 받게 되었다. 반면 조선인 학병 경우 일부만 간부후보생에 합격시키는 차별을 두었다. 앞서 뽑은 육군특별지원병은 거의 전부가 보통학교 졸업자라 을종 밖에 안되었지만, 학병들은 고학력이라 조선인이라도 갑종 합격하여 장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병은 전원 1944년 1월 20일에 끌려갔는데, 3~4개월간 초병 교육 →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 합격 후 3개월간 집체교육 → 예비사관학교 1년을 마치면 보통 일제 패망직전이었다. 이후 원래 있던 소속 연대에서 6개월간 견습사관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학병은 소위도 못 달아보고 전쟁이 끝났다. 다만 일제는 9월경 군대 해산을 할 때 모든 견습사관들을 정식 소위로 임관시켰다.
을종합격자는 3~4개월간 초병 교육 → 을종 간부후보생 시험 합격 후 3개월간 집체교육 → 3개월간 하사관 학교 교육으로 오장을 달아 하사관으로 근무한다.
간부후보생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은 6개월 꽉 채운 초병 교육 후 1기 검열에서 합격하면 일등병으로 진급한다. 여기서도 떨어지면 재교육인데 늦어도 2년차에는 다 일등병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3. 실상
당시 구제고등학교 졸 이상의 고학력자[3]는 26살까지는 징병이 유예되었고, 그 뒤에도 보통은 예비역으로 병역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친듯이 격감하는 병력을 감당하지 못하자 이를 폐지하고 고등학생부터 입영대상으로 지정했고[4], 1943년부터는 문과계 학생들을 시작으로, 좀 뒤에는 타 학과 학생까지 범위를 확대하였다.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하여,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초급 장교나 부사관으로 입대하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정부는 같은 해 10월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써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해,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하였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이때를 기점으로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은 일본, 한반도, 대만을 합해 약 13만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 사망자 수는 아직도 정확하게 추산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얼마나 다급했으며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진행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정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하였고 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
교련 교관: "황국신민이라면 지원해!" (마음속으로): "물론 아니지, 황국신민이 뭐야? 이 미친놈들아!" 교련 교관: (지원자가 없자 일본도를 빼들며)"지원하지 않는 자는 일본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오늘 목을 잘라 버리겠다! 그런 놈은 죽여 버려야 해!" ㅡ 학병, 손종영, 2008년, 60쪽. |
일본은 계속해서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벌여 나갔는데 그래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고 모자르게 되어 결국 대만과 한국을 황국신민화시키고 실업학교[5]를 많이 만들어서 한국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자는 계획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태능에 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전문대학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이 생겼는데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발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강제지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벽지 탄광에 노무자로 보내느니 식구들 사업도 방해하고 또 공무원도 못하게 되어 있어 마지못해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첫번째 인용문을 살펴보면 함경북도 청진 검사장에서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 의사"에 의한 자는 10명도 채 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은 모두 '지도적 격려'를 더하여 결의 지원한 자"라며 타의에 의한 강요임을 에둘러 보고하고 있다. 물론 다른 지역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심지어 두번째 인용문에서 언급한 '농후한 지도적 격려'는 더욱 살벌한 것이었다. 손종영이 다니던 경성고등상업학교의 경우 결국 조선인 20명이 모두 지원서를 쓰게 되었다. 눈앞에서 일본인 교련 교관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안쓰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자인 손종영은 시골로 도망갔는데 본인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일본 경찰이 가족까지 압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서 다시 한번 지원서를 쓰고 모두 다 함께 1944년 1월 20일에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일본 본토의 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경우 문부성에서 아예 일본 각지의 대학에다가 통첩을 보내 만약 조선인 학생들이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응하지 않으면 강제퇴학시키라고 명령을 하기도 했다. 머물던 하숙집에 허구한 날 형사들이 들이닥쳐 학병에 지원하라고 볶아댔던 것도 덤. 결국 이 때문에 하숙집 주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서 아예 집을 나와 도쿄역에서 노숙(...)까지 한 학병도 있었을 정도였다.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산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학도지원병은 말로만 지원병이었다. 이 (학도)'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 의성경찰, 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 '지원' 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15p)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보성전문의 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216p) ㅡ 정병준 교수 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
이런 학병 출신 유명인으로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자 - 고려대학교 전 총장), 김수환 추기경, 언론인 장준하, 소설가 이병주, 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 이가형[6]등이 있으며 일본 경우 전후 총리중 세 사람이 학병 출신이라고. 김 추기경은 중간에 탈락해 병으로 복무하였고, 김준엽, 장준하는 중국전선에서 탈출[7] 이가형은 임팔전투 직후에 미얀마 후퇴전에 참가해서 예하부대가 전멸 <버어마 전선 패잔기>라는 실록을 전후에 쓰게 된다.
말이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대부분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무수한 탈출자들이 있었다.
일본군이 밝힌 1944년 1월 부터 9월까지 9개월동안 탈출한 학병들은 일본 2명, 중국 41명(화북 5명, 화중 36명), 조선 21명, 만주 2명 등 약 66명에 달한다.
이후 전선이 넓어지며 남방 지역까지 조선의 학병들이 끌려가서 소설 태백산맥(조정래)의 주인공 김범우의 실존모델 박순동이 임팔전투에서 동료와 탈출 성공하여 OSS에 합류하기도 한다. 행정안전부가 만든 <일제의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 및 동원부대 실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광복군에 입대했거나 독립 운동에 참가한 학병들의 숫자는 89명으로 확인된다.
4. 학병 문학
워낙 고학력들이고, 대한민국 초기의 지성사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다 보니 이들이 남긴 기록이 많다. 소학교 졸업 학력에 자발적 지원자들이 많은 육군특별지원병 출신들과 차이점.학병 문학은 크게 논픽션 수기와 체험담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있다. 넓게 보면 체험은 안했지만 학병을 다룬 작품이나 학병 거부자의 글도 일종의 학병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잘 보면 각종 소설에서 어찌됐건 결국 학병은 탈출하는게 대부분이다. 본인이 탈출 못했으니 소설에서라도 탈출에 성공시키기도 하지만, 비체험자의 소설에서도 대부분 탈출하는 것으로 봐서 문학인들의 이미지는 학병=탈출 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자면 장준하의 <돌베개>는 논픽션,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은 픽션이다. 번역가 이가형의 경우 임팔 전투를 다룬 <버어마 전선 패잔기>는 논픽션인데 이후 생존한 일본장교에게 자료를 받아 29년 후 <분노의 강>[8]이라는 픽션을 쓰기도 했다. 황순원의 <내 고향 사람들>(1961), 김동리의 <등신불>(1961)은 비체험자가 학병을 소재로 한 글.[9][10] 조정래의 태백산맥(조정래)의 주요 인물인 김범우, 심재모, 박대병이 모두 학병 출신이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서는 하준규가 학병거부자로 나온다. 김범우의 실제 모델은 아래 언급되는 박순동(조정래의 친척 아저씨뻘)이며 하준규의 모델 역시 실존하는 학병거부자 '하준식'이다. 대구에서 73명의 학병·징병 거부자들이 모여 보광당을 결성했다는 등 실화를 이름만 조금 바꿔서 그대로 나온다. 국군 정훈장교 출신 선우휘[11]의 <불꽃>(1957)도 학병 문학 중에서는 알아주는데 여기서도 주인공은 탈출한다.
여성인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주인공 서희의 둘째 아들 윤국, 성환할매의 아들 성환, 명희의 조카등이 모두 학병으로 끌려 갔다는 묘사가 있는 등, 당시를 배경으로한 문학작품에서 학병은 결코 떼 놓을 수 없는 소재이다. 그전까지는 조선인에게 있어서 일본군은 "시골에서 감언이설에 속고 혹은 강제협박 당하거나, 더러는 출세의 길로 착각한 무지랭이들이 자진해서 나간다는 말도 있고"(토지 13권 48페이지)에서 나오듯이 촌 무지랭이 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그에반해 1944년에 실시된 학도지원병은 조선의 상류층의 최고 인테리 청년들을 싹 쓸어 가버리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고려대 정안기 교수의 주장인데 "학병이 된다는 것은 장교가 될 천재일우의 기회이기 때문에 지원율이 높았으며, 도망친 사람들은 장교 시험에서 떨어 졌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 내무 생활 부적응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부분은 기호에 딱 맞았는지 극우 사이트에서 펌질하여 돌아다니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학병 문학을 조금만 읽어 본다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일단 장교가 되기 위해 학병을 지원한게 아니라, 학병 소집 이후 시간이 흘러 조선인도 장교 지원하도록 정책이 결정 되었으며, 내무 생활 부적응 따위가 아니라 처음부터 탈출을 목적으로 나침반, 중국지도 등을 숨겨두고 입대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탈출한게 아니라 광복군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 한 것이다. 또한 높은 지원율의 이면에는 지원하라며 군도를 휘두르는 학교 교련교관에게 협박 받거나, 입대 조건으로 유치장에서 풀려났다는 진실이 숨어 있었다.
지역적으로 보자면 학병들은 중국, 국내, 일본, 버마 등으로 배치 되었다.
먼저 중국전선에 배치 된 것은 <돌베개>의 장준하, <장정>의 김준엽, <탈출>의 신상초 등이 있다. 장준하와 김준엽 등 탈출학병 33인은 그 과정에서 만나 함께 6천리를 걸어 충칭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가서 대한광복군 2지대에 배치되고 OSS에서 국내 진공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신상초는 탈출 과정에서 공산당 신사군을 만나 그쪽에 합류 하여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어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반면 자사전 <망향>을 쓰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학병 탈출이 줄을 잊자 조선 학병들에게 칼을 뽑아 들고 "이제 또 누가 도망치겠느냐? 이제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죽일테다!"라고 외치기도 했다.[12][13] 이병주도 중국 전선에 배치 받기는 하였는데 정작 그의 작품인 <지리산>과 <관부연락선>은 주로 조선 내부에서 탈출하는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한 학병거부자 '하준식'의 체험담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전선으로 배치된 학병들의 경우 대게 고향이 평안도와 함경도인 경우가 90%이다. 중국전선으로 배치되기 전 잠시 평양이나 함흥부대에 먼저 배치를 받았다가 열차를 타고 북지(北支)[14]전선으로 배치를 받게 된 것.
둘째로 국내에 배치된 학병의 경우 대구 24부대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한 김이현의 <학병탈출기>(1948)가 있다. 일제의 "군에서는 동지원병의 부대 배당을 실시하는데 있어 소질 우수한 자는 (조)선외 부대에 충당하고 조금이라도 강제 지원이라고 보여지는 명랑성이 결여된 자는 선내 부대에 충당 시킨다."는 원칙이 있을 정도로 탈출의 가능성을 통제 했기 때문에, 전선에 가까운 중국과 남방에 비해 국내 탈출자는 적었다.
셋째로 일본 본토로 보내진 경우가 있다. 이쪽은 중국전선으로 배치된 이북출신들과 다르게 출신지가 오늘날 남한지방인 학병들이 많았다. 규슈 서부 17부대에 간 김문택의 <탈출기>(2005)는 대단히 특이한데 일본 본토임에도 탈출에 성공하여 조선을 지나 중국 임천의 광복군 3지대에 합류한다. 또한 반일 사상으로 징역 5년을 구형 받고 5개월 살다가 학병 입대 조건으로 석방되어 학병이 되었다는 점에서, 불령선인으로 찍혀 감옥에 가도 학병에 가는 지원 실태를 엿볼 수 있다. <학병>(2008)을 쓴 손종영은 교련선생이 죽이겠다고 칼을 휘둘러 억지로 입대 도장 찍긴 했으나, 입대안하고 도망쳤다가 형사들에게 잡혀 온 후 일본 방공부대로 보내지는데, 이후 1년간 갑종 간부후보생 훈련을 받고 견습사관으로 근무 중 해방을 맞이 한다. KBS 라디오 극본(1961)으로 성공한 극작가 한운사가 쓴 1부 <현해탄은 알고 있다>, 2부 <현해탄은 말이 없다>은 나고야 중부 13부대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인데, 여기서는 탈출 후 일본 여자와 사랑에 빠져 숨어 지냈다는 픽션이 가미되어 있다.
네번째로 버마 전선에 간 경우인데 번역가 이가형이 쓴 논픽션 <버어마 전선 패잔기>, 픽션 <분노의 강>이 있다. 그런데 포병인 이가형의 분대에는 학병이 2명 더 있었는데 그들은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넘어가 OSS 훈련까지 받았다. 그 중 한명인 박순동이 쓴 책이 <모멸의 시대>.[15] 그리고 조정래가 자신의 외삼촌 박순동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책이 바로 태백산맥(조정래)
그리고 목에 칼이 안들어와도 끝까지 지원 안하고 버티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시 학무국장 오노 겐이치는 "지원하지 않으면 중점적 산업공장에 징용 동원하겠다."고 협박했고 항간에는 "지원하지 않는 사람은 남양 등지로 징용해서 포탄 운반 작업에 종사시켜 출병보다 더 생명이 보장되지 않도록 한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그런데 유언비어가 아니라 실제 그럴뻔 했다. 끝까지 산간벽지로 숨거나 먼 칙척집으로 도피하며 지원병 동원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학도지원병 모집이 끝나자 마자 바로 징용하였다. 그리고 남양군도로 보내져버릴 예정이었으나 그쪽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들로부터 감히 사상이 썩어빠진 조센징들을 우리한테 보내버리냐고 반발이 있었던 덕분에 국내 철도공장이나 시멘트공장으로 배치된 거라고 한다. 이미 황군에 지원하지 않았단 이유로 사상범으로 찍혀있던터라 막상 남양군도로 보내지면 현지 미군들한테 붙어먹을 위험도 크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징용학도(또는 응징학도)들은 국내 공장등으로 징용 되었는데 적어도 4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으로 주오대학 야간 전문부 법과에 다니던 황장엽은 지원병 훈련소까지 가서도 지원을 거부하여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 배치되어 징용공으로 있었다고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1999)에 밝혀 놓았다. 최기일 박사[16]의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2002)과 계훈제의 자서전 <흰 고무신>(2002)[17]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중 계훈제는 친구 장준하[18]처럼 중국으로 도망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가려다가 헌병에게 붙잡혀서 시멘트공장에 끌려가게 된 것. 최기일 박사와 계훈제는 마침 같은 평양의 시멘트공장에 배치되어서 둘이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한다. 여담으로 최기일 박사의 경우 길 가던 도중 형사들에게 붙잡혀서 너는 왜 황군에 지원하지 않냐는 식으로 지겨울 정도로 갈굼을 많이 당했다고 하며, 심지어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관부연락선을 타던 도중에도 일본 형사들에게 붙들려
학병 문학을 보면 전원이 1944년 1월 20일에 평양/서울(용산)/대구의 부대로 입대했다는 동질적 체험을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본 학교에서 온 사람은 경성제국대학에서 1주일간 사전 훈련을 받았다는 공통된 내용이 나오고, 입대 직전에는 술을 진탕 마시고 주재소에 쳐들어가 쳐들어가 닥치는대로 때려 부수자 순사들은 도망다녔다거나, 설령 유치장에 갇혔다고 해도 1월 20일에는 다 풀어줘서 빠짐 없이 입대 시켰다는 것은 수기에 자주 나오는 단골메뉴.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소집된 학병들 앞에서 격려 연설 한 것도 수기마다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이 연설할 때 한운사가 벌떡 일어나 "우리가 학병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하자. 그런 다음에는 우리 민족에게 자치권을 주고 앞날을 보장하겠느냐?"라고 외쳤다가 헌병에게 끌려 간것도 당시 자리에 있던 수많은 학병들의 공통된 기억.
작품을 보면 자발적으로 입대한 육군특별지원병들과의 갈등이 은근히 나오기도 한다. 학병을 거부 했다가 잡혀온 150명의 응징학도들이 2주간 황국화 훈련이 끝나고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자, 이를 본 지원병 출신 훈련소 조교 송요찬은 발을 구르며 너희들을 쌀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11대 육군참모총장을 하신 그분 맞다.
5. 오해
노무현 정부때 친일인명사전과 관련된 논란으로 인터넷 등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이력때문에 친일이니 뭐니하면서 이슈가 되고 있긴 한데, 당시 해당자의 인터뷰를 참조하자.일본은 계속해서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벌여 나갔는데 그래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고 모자르게 되어 결국 대만과 한국을 황국신민화시키고 실업학교[21]를 많이 만들어서 한국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자는 계획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태능에 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전문대학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이 생겼는데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발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강제지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벽지 탄광에 노무자로 보내느니 식구들 사업도 방해하고 또 공무원도 못하게 되어 있어 마지못해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이들 중 전문학교생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해 장교를 양성하기 시작하지만 당연히 '지원' 대상자들도 같은 처지다. 즉, 말이 장교 지원이지 징병대상자로서 끌려간 점은 일반 징병과 별 다를것은 없지만, 장교라는 계급 자체의 이득이 있다, 즉 이들은 친일이 목적이 아닌 신분의 유지측면으로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징병자인 일본이 그나마 고학력자를 골라 뽑아준 쪽으로 간 것이랄까.
김수환 추기경 또한 징병을 피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유학중이던 사람이 헌병이나 특고의 추적을 뿌리치고 일본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있기라도 할까?[22] 즉 이름은 지원병이지만 실제는 강제 징집이다. 복무 자체를 갖고 친일여부를 판단해선 안되며 복무의 적극성 여부를 통해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이들은 미 군정이 대한민국 국군의 초기형태를 구상할 때 귀중한 인적자원으로 쓰였는데 이게 광복후 군대 친일화 운운 하는 소리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스스로 자원해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서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들도 많이 들어갔지만, 조선지원병과 학병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간도특설대 같이 자신들이 자원해서 제대로 친일 행위를 한 자들과 학병 출신은 엄연히 구분을 해야한다.
실제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지식인, 엘리트인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서 남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쓰였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1945년 해방이후 학병출신들이 뭉쳐서 만든 학병동맹은 친일파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대단한 위세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이들중에 분명 친일파는 있을 수 있다. 세상이 세상인 만큼 없는게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자체가 모두 친일파라는 것은 전혀 다른 소리다. 또 역설적으로 6.25 전쟁 당시 국군의 대다수의 장성들은 구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북 조선인민군 장교중에도 학병 출신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강제 징용은 천일공노할 행위임에 맞지만, 지원자에 한해서 30년을 지배하에 있으며 2등국민으로 살아가는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약간 다른 상황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의 만행이 씻겨지는 것도, 진성 친일파들의 이름이 깨끗해 지는 것도 아니다.
당시 일본군 사관학교에 조선인의 지원 비율은 지금의 고위 사립대학교 뺨치게 높았다. 2등국민으로 사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몇안되는 '신분상승'의 통로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비슷한 경우로, 베네딕토 16세가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긴 했었는데, 이쪽도 그 당시에는 의무 가입이라서 안 까였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학병 논쟁이 위에 상술한바대로 친일파 논쟁으로 밖에 비화가 되지 않는데, 1980년대만 해도 학병세대의 체험에 대한 문학이 하나의 장르였다. 작가 이병주가 이런쪽으로 대단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23],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뇌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엘리트로서 식민지 현실에 눈을 일찍 떴지만 그 자신들이 선택받은 특권층[24]이라는 자괴감과 해방 이후 격동기를 몸으로 부딪혔던 운명등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25] 2009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으니 학병 세대를 세대론적으로 보고 싶다면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6. 관련 문서
[1] 식민지 학교는 교련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입대전 사전 교육이 필요함. 이후에야 고등보통학교에 교련 교육이 생겼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중학교는 교련 교육이 원래 있었다.[2] 의학계 및 이공계, 사범계는 입영유예 유지.[3] 물론 지금의 교육과정과 일제 강점기의 교육과정을 동일시 하면 심히 곤란하다. 당시 고등학교:舊制高校로 통칭)는 지금의 대학교 1, 2년 과정에 해당된다. 독일의 김나지움과 비슷한 제도라고 보면 될 듯(사실 당시 일본의 교육제도는 유럽식이었고, 2차대전 패전 후 미국식 6-3-3 제도로 바뀌게 된다.). 김웅수 장군의 회고록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초반에는 무차별적인 징집이 아니라 지원을 받아서 차출해나갔다고 한다. 물론 지원을 하지 않으면 직간접적인 불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지원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고..[4] 덕분에 한 자릿수이던 대입경쟁률은 10:1까지 치솟았다.[5] 구제전문학교는 국내에서도 남아있다. 부산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 수원고등농업학교(서울대 농과대), 대구농업전문학교(경북대 농과대),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학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통합),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평양공업전문학교등이 당시 일제가 만든 전문학교들.[6] 80년대 해문 팬더 출판사에서 나온 일본 추리물 번안 아동물이 대부분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 한국 추리문학의 아버지 격.[7] 여담이지만 중국이 아닌 다른 전선에 발령 받을 경우 탈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탈출을 꿈꿨다고 한다.[8] 임팔 전투에서 자주 등장하는 '친드윈'강의 뜻이 '분노'이다.[9] 다만 김동리는 직접 체험자가 아니다 보니(징병 기피자였다) 연도를 착각하여 '1943년 이른 여름'에 학도병을 나갔다는 잘못된 설정을 하였다. 어쨌든 여기서도 학병은 탈출한다. 황순원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김구장은 천하의 나쁜 놈이였지만, 학병으로 끌려간 아들은 결국 탈출한다.[10] 모든 학병은 1944년 1월 20일에 동시 입대 했는데 비 체험자들의 학병 문학은 이부분에서 많이 틀린다. 체험자들에게는 절대 실수 할 수 없는 부분. 남자라면 죽을 때 까지 입대 날짜를 잊어 먹지 않는다. 대학생이면 한날 한시에 다 끌려가는데, 학병을 잘가라고 전송해주는 동료 대학생이 나오는 학병 문학도 있다. 이과생인가?[11] 그도 1944년 대학생이라 학병으로 끌려가야 마땅하지만, 경성사범대으로 이공계 및 사범계열은 면제라 그 역시 빠질 수 있었다.[12] 물론 <망향>에서는 이런말 안나온다. 오히려 장준하의 탈출이 성공하길 기원했다고 적혀 있다. 장도영이 칼 빼들고 위협 한 것은 같은 부대 소속 장준하의 <돌베게>에서 언급되는 에피소드[13] 정작 아이러하게도 장준하는 훗날 박정희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 같은 이북 출신에 같은 일본군 부대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로 장도영과 한패로 엮여서 이와 관련해서 군부로부터 심문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장도영과 상반된 행보를 보인데다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준하 입장에서는 자신을 장도영과 한패로 엮어버리는 군부의 행태를 보고 기가 찰 정도로 어이없었겠지만…[14] 오늘날 중국 화북지방을 뜻한다.[15] 이 때문에 이가형이 자기만 빼 놓고 탈출했다며 엄청 열받아 한 것은 당연지사. 박순동은 이가형이 워낙 병약하여 함께 갈 수 없었다고 그의 작품에서 밝혀 놓았다.[16] 김준엽과 같은 신의주고보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의 고향 친구이며, 장준하와도 같은 고향 출신인데다가 장준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교회에 자주 출석해서 친분이 있기도 했다. 해방 이후 돈암장에서 이승만과 윤치영의 비서로 일하다가 1948년 미국으로 유학가서 우스터 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고,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갔을 때 김대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다만 이후 지지를 철회해서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17] 다만 계훈제는 이 자서전이 출판되기 3년 전인 1999년에 세상을 뜬 바람에 미완의 자서전으로 불리기도 한다.[18] 둘이 같은 신성중학교 동창인데다가 장준하의 결혼 주례를 서 준 사람이 계훈제였다. 이 둘은 해방 이후에도 함께 사상계와 씨알의 소리 집필에도 관여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게 된다.[19] 표면적인 이유는 본인의 꼴찌 교련 성적이긴 했지만 최기일 본인은 반일감정이 매우 극심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황군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본인의 절친인 장준하가 자원입대할 때 뜯어말리기도 했다.[20] 사실 최기일이 학창 시절 교련 성적이 꼴찌에 가까운 이유도 본인의 반일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교련 성적이 바닥을 기는 거에 그치지 않고 일본 유학시절에도 방공 훈련을 정말 대충 받았으며, 대만 출신 유학생들이 자신과 다르게 방공 훈련을 열심히 받는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회고록에 서술했을 정도.[21] 구제전문학교는 국내에서도 남아있다. 부산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 수원고등농업학교(서울대 농과대), 대구농업전문학교(경북대 농과대),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학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통합),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평양공업전문학교등이 당시 일제가 만든 전문학교들.[22] 역시 학병 출신자인 언론인 장준하의 경우, 부대가 중국에서 대기중일때에 비로소 틈을 보아 탈출할 수 있었다.[23] 그는 중국 전선에 참전해서 소주(쑤저우) 부근에서 종전을 맞았다.[24] 찢어지게 가난한 학생이 연희전문학교나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니고..."는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시 전문학교-일본유학-학병코스를 밟는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은 지금 기준으로 하면 상위 1%에 해당한다[25]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 학병 시대를 그렸고. '지리산'이 학병세대의 해방공간에서의 좌절, '그해 5월'은 중년의 학병세대가 5.16과 박정희 정권을 보는 시각이다. 단편으로 '변명'은 독립전선에 뛰어든 학병세대를 그리고 있고 미완작이자 유고작에서는 특권층으로서의 학병세대의 고민을 고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