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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6CC> 신사군 新四軍 | ||
깃발[1] | 패치 | |
창설일 | 1937년 7월 | |
소속 | 국민혁명군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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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제스의 제5차 초공작전으로 인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된 이후, 마오쩌둥, 장궈타오 등이 지휘하던 홍군 주력부가 홍군 제4방면군을 이루어 대장정을 떠난 이후 남방에 잔류한 중국공농홍군이 서안 사건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국공합작의 결과로 편성된 부대이다.2. 역사
2.1. 초공작전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붕괴
5차 초공작전으로 강서 소비에트 정권은 더 이상 국민당의 공세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이로 인하여 공산당 수뇌부는 '전략적 철수'를 구실로 강서를 탈출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찾기 위한 대장정의 길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들이 빠져나간 후에도 여러 지역에선 홍군이 잔류하여 국민당에 맞서 교전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악예환 소비에트의 고경정 등이었다. 1934년 11월 중국공산당 당중앙은 악예환 지역 위원회에게 소비에트를 이탈하여 홍 25군을 지휘하여 서쪽으로 나가 세력을 유지하란 지시를 내렸다. 악예환 위원회가 빠져나간 후 고경정은 방영락 등과 부대를 합쳐 1935년 2월 홍군 28군을 구성하여 스스로 정치위원을 맡았는데 이들의 숫자는 천여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규모였다.1935년 5월 국민당의 초공작전에 궁지에 몰린 이들은 본거지인 환서를 떠나 예남으로 떠난 후 거기서 다시 홍 25군을 따라갈 생각이었으나 애로사항이 꽃피어 원래 근거지인 예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국민당의 공세에 일망타진당할 우려가 있어 그때부터 여단 단위로 부대를 쪼개어 활동했다. 그리고 국민당을 대상으로 유격전을 감행했으나 국민당 군의 토벌에 고경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휘관이 전사했고 궁지에 몰린 고경정은 연안에 정착한 중국 공산당 중앙과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들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들을 포위한 국민혁명군이 철수하면서였다.
2.2. 중일전쟁과 신사군의 조직
1937년 7월 13일 고경정은 당중앙의 국공합작과 내전중지 방침에 대해 통보받았다. 갑작스러운 정책 전환에 대단히 당황한 고경정은 당중앙에 사람을 보내어 문의하는 한편 자신들을 토벌하던 웨이리황 장군에게 담판을 제의했다. 고경정은 담판에 앞서 4가지 선결조건을 제시했다.1. 정부 측이 성의를 보여 토벌을 중지할 것. 2. 부대가 집중하여 정편한 이후에는 국민정부의 통일된 지휘를 받겠지만 반드시 독립된 계통으로 공산당의 지휘를 받겠다는 것. 3. 필요한 물자를 정부가 책임지고 정부군과 동일하게 지급할 것. 4. 황안현 칠리평을 부대 집중의 장소로 쓰게 해줄 것. |
웨이리황은 이를 수락하여 고경정 부대와 협상하였고 7월 20일 고경정이 유격대의 영도권 문제, 작전지역 문제, 병력보충의 문제를 놓고 공산당 영도 고집, 작전지역에 있어서의 제한을 거부하고 항일을 원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받아들여 부대를 보충하겠다고 함으로 국민정부 측과 격렬히 충돌하였으나 7월 27일 내전중지, 일치항일이란 합의에 도달했다. 고경정 본인도 이수의라는 가명을 쓰고 홍군 28군 정치부 주임 자격으로 조인식에 참여했다. 국민정부는 약속대로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에 고경정은 칠리평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병력을 집결시킨 고경정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협의사항을 전달했고 하요방의 부대를 비롯하여 계속 병력을 모았으나 그의 휘하의 병력과 장비 모두 형편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국민혁명군 25로군 산하 5개 사단과 여러 민병대, 보안단이 주둔하고 있어서 만약 국민정부가 마음을 돌릴 시에 그들은 지극히 불리한 위치에 놓일 처지였다. 그러던 중 8월 24일 당중앙은 고경정에게 20여개 현에 퍼져 있는 중국 공산당 편의대를 규합하여 항일 전선에 투입할 것을 지시했다. 고경정은 측근 이세염을 파견하여 흩어진 공산당 편의대들과 연락, 1937년 10월 말에 여러 편의대를 규합하여 200여명의 병력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당중앙은 1937년 8월 1일 남방의 흩어진 부대에 대한 첫번째 방침과 지시를 전달하게 되었는데 그 지시에 따르면 유격대들은 지방과의 협상을 통해 합법적 지위를 얻어 민단으로 개편하나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불법조직으로 남으며 담판이 완성되기 전에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고경정과 하요방은 9월 7일부터 당중앙과 접촉하며 9월 9일 국민정부의 병력 집결 지시에 대한 대응을 요청했는데 당중앙은 편의대를 집중시키지 말고 국민정부에 보급을 요청하며 만약 거절할 경우 무력으로 기부금을 강탈하여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병력을 분산하여 세력을 널리 확산하려는 당중앙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 자체는 지방의 홍군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중화민국의 주요 거점인 난징, 상하이, 항저우 등이 무너지고 장강 하류 지역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 지역을 유격지대의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확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유격대가 남아있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국민정부가 홍군 유격대의 관리를 용이하기 위해 유격대의 집중을 요구하자 이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거절하진 않으면서도 '국민정부의 계략에 말려들어선 안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여러 유격대는 세력 확장의 발받침으로 쓰기에는 국민정부의 토벌과 봉쇄로 인해 매우 약화되어서 중국 공산당에선 이들을 모아 편제화, 전력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1937년 10월 8일 국민정부와 협상하던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건의를 중앙에 올렸다.
1. 남방유격지역을 전략거점으로 삼아 견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현지 각지의 유격대는 매우 분산되어 있고 보급도 어려워 계속 분산되어 있으면 역량의 소모가 예상된다. 3. 각 유격대를 하나의 군으로 편성하여 팔로군의 지휘를 받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4. 각 지방에는 여전히 공개 혹은 비밀리에 일부의 무장을 남겨놓아 근거지를 보위하고 혁명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다. |
10월 18일 당중앙은 이러한 건의를 승낙, 10월 하순 칠평리에 2천여명의 홍군을 집결시켜 악예환공농항일부대로 편성했다. 이것이 바로 신사군의 시초이다. 다만 오해하면 안되는데 처음에 이들 고경정 부대는 섭정이 편제할 신사군과는 별개의 부대로 구상되었다. 밑의 단락에서 알아볼 것이다.
2.3. 부대 명칭과 소속 문제
이후에 대두된 문제는 부대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냐는 것이었다. 고경정을 비롯하여 여러 유격대 지휘관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는데 난징의 협상대표들은 팔로군보충대로 명명하여 팔로군 소속으로 넣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팔로군의 소속으로 인정 받아 정부로부터의 대우가 좋아질 것이며 보충을 핑계로 휴식하며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경정은 웨이리황과 협상을 통해 의복과 급양을 제공받은 바가 있었고 장제스는 고경정 부대를 섭정이 편성할 신사군 편제에 넣을 것을 명령했다. 결국 국민정부와 협상하던 대표 둥비우가 당중앙에 이미 국민정부로부터 급식비를 지원받고 있던 고경정의 11월 급식비를 어떻게 처리할 지 등을 문의했고 당중앙은 11월부턴 섭정이 고경정 부대에 급식비를 지불할 것을 명령하면서 고경정 부대를 신사군 산하 4지대로 편입하기로 하였다.그 다음 문제는 신사군의 소속 그 자체였다. 신사군이 팔로군에 소속된다면 국민혁명군과 동등한 급여와 독립적인 작전을 보장받은 팔로군의 혜택을 그대로 누릴 수 있었다. 당중앙은 둥비우의 건의에 따라 허잉친과 협상 중이던 대표들에게 신사군을 팔로군 산하에 넣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하지만 10월 21일 장제스는 섭정과 예젠잉을 만나 팔로군이 국민정부의 점검을 거부한 점을 상기하며 남방의 유격대가 팔로군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남방유격대는 팔로군의 방법을 따를 순 없다. (...) 팔로군은 점검을 거절하였다. 남방유격대는 반드시 사람을 파견하여 점검을 할 것이며 총의 숫자에 따라 편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정식부대가 아닌 팔로군에게 정식 부대명칭을 줄 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군정부장 허잉친에게 구체적인 편제에 대해 상의하도록 했다. 11월 6일 당중앙은 신사군의 팔로군 편입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며 항영을 부군장으로, 진의를 정치주임으로 임명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신사군 군장으로 예정된 섭정이 중재에 나서 11월 12일, 신사군을 정식 갑종사단이 아닌 을종사단으로 재편하는 안을 제의했으나 장제스는 오히려 섭정을 질타했고 이에 섭정은 그 자리에서 사의를 표시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장제스는 섭정에게 허잉친과 구체적으로 논의하라고 설득했고 섭정은 당중앙에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우한에 있는 허잉친을 찾아가서 설득했으나 국민정부가 완강한지라 결국 공산당도 굴복하여 12월 23일 신사군은 팔로군에 속하지 않으며 사단 등 정식 편제의 설치 없이 바로 4개 지대를 관리한다고 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공산당이 임명한 간부의 비준을 불허하고 지대, 단, 여를 지휘하는 간부를 국민정부에서 파견할 것이며 유격대를 지휘하던 간부들을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강력히 반발하며 국민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인 전추도 등에게 담판 중지와 대표 교체를 명령했다. 고경정도 국민정부가 파견한 간부를 수용하였고 이에 마오쩌둥은 이에 경고했으나 애초에 무전기도 없어 당중앙과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고경정으로써는 국민정부와 어느 정도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당중앙은 10월 1일과 10월 15일에 걸쳐 부대 영도, 지휘, 작전에 국민정부가 간섭하지 말라고 했고 10월 30일에 남방 유격대의 40%를 보안대로 바꾸고 나머지 60%를 집중시켜 군으로 편성하며 국민당이 파견하는 어떤 간부도 반대한다고 했다. 섭정은 항일이 급선무고 인사문제에 대해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장제스는 여전히 중공의 간부인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2월 28일 허잉친은 중공의 간부 인선 문제를 인정하며 4개 지대의 편성과 고경정을 포함한 지대사령의 임명을 허용했다.
신사군의 군장은 섭정(예팅)이 맡았는데, 섭정은 원래 공산당원이었으나 광저우 폭동의 실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홧김에 유럽으로 출국해서 장기간 연락두절로 탈당 처리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국 공산당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건 아니었고, 여전히 공산당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유지했기 때문에 무소속 신분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중재하기 편한 입장이었다. 게다가 섭정은 장제스의 북벌 전쟁 때에도 충분히 활약을 한 바가 있기 때문에 군을 통솔할 지휘관으로서의 커리어도 충분한 인선이었다.
3. 참고문헌
- 중일전쟁 시기 신사군 창건과 고경정의 죽음, 강현사, 중국근현대사학회(2005)
- 신사군의 조직과 통전문제, 강현사, 원광대학교.
- 중일전쟁 시기 신사군 내 한인의 활동양상, 강현사(2011)
- 환남사변과 통일전선 -발발 원인을 중심으로-, 강현사, 중국근현대사연구(2002)
-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연구, 통일전선 정책을 중심으로, 강현사, 동양사학회(2004)
- 환남사변과 항영 - 항영의 재평가를 중심으로, 강현사, 중국학논의(2006)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2016)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2015)
4. 관련 문서
[1] 왼쪽의 한자는 '국민혁명군육군신편제사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