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1:18:00

북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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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설3. 핵심 전력4. 극동무적함대5. 실상
5.1. 형편없는 훈련5.2. 구식 운영체계5.3. 부정부패5.4. 유지/관리 역량의 부재5.5. 속사포 부족5.6. 오합지졸 장교들5.7. 정치적 문제
6. 말로7.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8. 군가
8.1.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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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양수사의 제독기(提督旗)
파일:1280px-Flag_of_Fleet_Commander_of_the_Beiyang_Fleet.png 파일:1280px-Flag_of_the_Admiral_of_the_Beiyang_Fleet.png
1871 ~ 1890 1890 ~ 1912
北洋艦隊
북양함대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창설되었던 4개의 근대식 함대인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중 최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북양함대(기함은 정원급 철갑함 1번함 정원함)를 보유한 해군조직이며, 북양수사라고 한다.

한때 북양함대는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위세를 떨쳤지만 1894년 사실상 첫 실전이었던 청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연합함대에 패하면서 허무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2. 창설

1871년부터 청나라는 연안 방위를 위해 새로 편성된 해군조직인 4개 수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 이른바 4대 수사 중 가장 강력한 함대를 보유한 수사는 상하이에 본진을 두고 있던 남양수사였지만 어차피 4개 수사들은 모두 다 서양의 근대식 해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일본의 류큐 왕국 병합을 기점으로 청조는 대규모의 해군, 특히 원양작전이 가능한 함대 육성의 필요성을 체감하였다. 그에 따라 1874년 청 조정은 이홍장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근대식 해군을 육성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초기에는 남양해군(또는 남양수사)과 북양해군(또는 북양수사)의 균형적인 발전을 시도할 계획이었으나 청프전쟁으로 남양해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1885년부터는 북양해군을 집중적으로 육성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북양해군은 1888년에는 근대식 '해군'이라고 통일해서 기록할 정도의 규모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3. 핵심 전력

4. 극동무적함대

북양해군이 다른 3개 함대를 능가하는 최강의 함대로 불렸던 이유는, 다른 3개 함대와는 달리 군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를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국이자 해군국이었던 영국과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독일로부터 직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885년 11월 북양해군이 연이어 직도입한 작센급 방호순양함의 개량판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천톤급의 배수량과 300mm가 넘는 두께의 측면 장갑, 그리고 무장으로 12인치(305mm) 구경 2연장 주포탑 2기, 6인치급 (150mm) 구경 단장 부포탑 2기 및 75mm 속사포 4문을 장비한 거함으로, 영국 해군의 본토함대 다음가는 대해군인 대양함대를 건설하고 있던 기술 선진국인 독일 제국에서 건조된 전함답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이 배들에 맞설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1891년부터 정부의 재정지원이 중단되는 바람에 정체 상태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청조의 해군력은 총 척수 78척, 총 톤수 83,900톤에 이르러 최소한 동양에서는 근대적 군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원과 진원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일본은 심지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황해에서 북양함대와 맞붙을 때까지도 동급의 전함이 없었다. 황해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마츠시마는 배수량 4,277t밖에 안되는 순양함이었다. 카탈로그 상의 스펙으로는 청일전쟁 시점에서 북양함대가 일본 제국 해군보다 월등한 우위였던 것이다. 총 배수량으로도 우위였고 개별함선 배수량으로도 북양함대가 일본 제국 해군의 연합함대보다 우위였다. 때문에 청일전쟁 발발 시 청나라의 패배를 예상한 국제여론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당시 보유한 함포들로는 정원과 진원에게 이빨도 안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구경 32cm의 대형 함포를 4천톤급 순양함에 달아버리는 무리수를 감행했는데 이들이 마츠시마를 비롯한 3척의 삼경함 시리즈였다. 게다가 달아놓은 방식도 순양함의 선두나 선미에 32cm 구경의 함포를 아무런 방어 장갑 없이 딱 1문만 달았는데 당연히 밸런스가 개판이었으며 장전 속도나 선회 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여기에 더해서 위력도 신통치 않았는지 32cm 포탄이 정원에 단 한 발 명중하긴 했는데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한 걸로 판명됐다. 즉 완벽한 뻘짓. 그나마 3경함은 일본의 독자 아이디어가 아니라 북양함대의 거함에 대응하려는 일본의 오더를 받은 프랑스가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넣어서 만든 함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세트 플레이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당대 일본 해군도 이런 컨셉에 불안을 느껴 4번함은 취소해버리고, 이후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신형함을 주문하게 된다.

5. 실상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 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해군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겉보기로는 비서구권에서 비교할 대상조차 없는 최강의 하드웨어를 갖춘 함대였지만, 실상은 운영 소프트웨어의 부재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5.1. 형편없는 훈련

근대식 군비를 갖추기 위해 서양에서 생산된 최신 군함과 장비를 사들이고 교관을 불러들인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걸 쓸 청나라군의 상태가 형편없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훈련을 시킬 외국인 교관을 초빙했지만 당장 의사 소통부터 어려움을 겪는 형편이었다. 훈련소에서 교관이 외국어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실제로도 북양해군은 작전 회의에서 영어만 사용할 정도로 외국계 장교와 유학파 장성들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정작 함대 총책임자인 정여창은 영어를 몰랐고 근대 해군 운영에도 무지했다. 차라리 정여창을 비롯한 수뇌부가 철저한 바지사장으로 남았다면 사정이 좀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었으며 청나라군의 상황상 정여창같은 강력한 인물이 실권을 잡지 못하면 유지비용도 제대로 얻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러한 북양함대의 상황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이 에도 막부 말기부터 네덜란드 교관단으로부터 1년 반 동안 공부한 인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다음 기수를 가르치는 식으로 오랫동안 해군 장교를 체계적으로 양성해나가기 시작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여기에 내부 비리도 심해서 수병들에게 제식훈련만 시킬 것도 아니고 포도 쏘고 항해도 나가봐야 할 터에 예산이 줄줄 새고 있으니 훈련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결국 북양 함대는 변변한 실사격 훈련조차 해보지 못하고 일본군과 실전을 치러야만 했다.

5.2. 구식 운영체계

함대는 근대식이지만 청나라는 아직 근대화되지 못해서 옛날 방식, 즉 전근대식으로 함대를 운영했다.

인적 자원의 질만 따지자면 당시 북양함대의 지휘관들은 영국 등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마미 선정 학당 같은 교육 기관에서 제대로 배운 장교들도 여럿 있긴 했다.

그러나 청군의 체계는 여전히 명나라를 무너뜨리던 그 방식대로 무기체계까지 고정되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좋은 함대를 옛날 방식으로 굴렸으니 이 부문에서도 효율이 팍팍 떨어졌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원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뜬 사람이라서 육전에 대한 이해도는 좋을 지 몰라도 함대 운용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었고, 이홍장이 북양수사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 정여창 역시 육전 능력은 있었지만 해군에 대해서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지못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5.3. 부정부패

청나라 말기의 부패 현상이 너무 심해서 함대 유지 및 보수에 대한 예산이 크게 부족했다. 이건 국방비를 삥땅쳐 놀고먹는데 쓴 서태후의 탓이 가장 크지만, 이를 제외하고 봐도 전체적으로 당시의 부패상이 너무 심각해 함대의 설립자인 이홍장도 이를 어찌하지 못했다.

청나라에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한 것이 얼마나 심한가 하면 서태후이화원같은 황권 과시용 대규모 토목공사에 청 왕조 1년 예산의 30%인 은화 3천만 냥을 꼬라박은 행동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전운이 감돌고 서구 열강이 마구 침공해오는 상황이라 군비를 증강해야 할 시기에 대규모 토목 공사까지 일으켜 돈을 낭비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해군에 들어갈 예산 따위가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워낙 서태후의 부정부패 행위가 압권이었는지 나중에 와서야 청일전쟁의 패배를 서태후 개인에게 독박식으로 뒤집어씌우려고 과장된 것이며 일부 금액은 1890년부터 만주지역의 철도부설 및 육군 증강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수 견해도 있으나 말 그대로 소수의 의견에 불과하며 그걸 다 감안해도 서태후가 국가재정을 개인적으로 대량 유용하여 국가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주범이라는 주류적 해석에는 변함이 없다.[1]

주범인 서태후를 비롯한 중요 권력자들이 이렇게 부정부패를 저지르니 해군에 돈이 없으므로 유지 보수 및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투 시 함대 운용 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장 탄약이 없어서 개전 직전에 소량이나마 탄약을 긴급하게 조달해서 채워넣을 지경이었고 이후의 보급전망도 없다시피했다. 그래서 보유 탄약을 해전 한번에 전부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정여창은 출격하면서도 상당수의 탄약을 보급창에 남겨둔 채로 원래 보유할 수 있는 탄약량보다 적은 양만 가지고 해전에 임했다. 당연하게도 전투 중 탄약부족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심지어 북양함대의 자랑거리이자 주력인 정원/진원의 12인치(305mm)함포 포탄마저 양이 부족해서 화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

5.4. 유지/관리 역량의 부재

최신식 군함을 유지 및 관리할 역량이 청나라에 있었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 독일 제국은 청나라가 최신식 군함들을 제대로 다룰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미 유지보수에 필요한 최소한의 역량 자체가 없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탄약마저 부족해서 도입 초기부터 탄약이 부족한 상태로 오랫동안 예산 부족에 시달리다가 청일전쟁 발발 전에야 겨우 어느 정도 탄약을 추가 구입한 실정이었다. 이 탓에 교전 시에 제대로 된 포탄조차 갖추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함대는 물론이고 해안포에서 쏘는 포탄도 제대로 된 철갑유탄이 아니라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었다. 포탄 안에는 석탄 가루/진흙/모래/이 화약 대신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폐쇄됨 여기에 수뇌부의 소극적인 지휘까지 합쳐지는 바람에 기존에 확보해놨던 철갑유탄이나 어뢰도 짱박아두고 되도않은 불량 포탄이나 쏴댔으니 명중시켜봤자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터지지 않는 전근대식 포탄에도 취약했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그런 청나라 말기의 불량 포탄도 충분히 위협적인 포탄이었지만, 청일전쟁 당시 청군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들이 상대한 일본군은 매우 강력한 근대식 포탄을 갖춘 근대적 군대였다.

게다가 주력함인 정원급 철갑함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어서, 그 엄청나다던 12인치 포탑도 말이 포탑이지 사실은 상부가 훤하게 노출된 노출형 포좌였기 때문에 덕분에 속사포를 가진 소형함에도 쉽게 제압당할 수 있었다. 물론 해당 군함을 인도할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 중에서도 주포가 노출형 포대에 탑재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지만, 당시의 해군 군함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몇 년 지나지도 않아서 이는 완전한 구식으로 전락한 주포 탑재 방식이었다.

그래서 훗날 얇은 장갑을 가진 덮개식 뚜껑을 덮는 방식으로 간신히 문제점을 해결해 1894년 황해 해전 당시에는 장갑화된 유개 포탑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안그래도 느린 포탑 선회 속도가 더 느려졌다. 설상가상으로 제대로 된 환기시설이 없는 상태인지라 포격시 발생하는 화약연기가 포탑 밖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포탑 내부로 들어오는 통에 몇 발 사격하면 도저히 사람이 포탑 안에서 숨을 쉴 수 없어서 천정 덮개의 상당부분을 다시 제거하고 전투에 돌입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의 속사포 포탄 파편이 환기구와 틈새로 들어와서 주포탑 운용요원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5.5. 속사포 부족

북양함대가 소유하던 대구경 주포의 숫자는 일본 함대를 압도하였으나, 소구경이나 중구경 속사포의 숫자에서는 매우 열등하였고 함선의 경우도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일본 함대가 약간 우월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협차일제사격같이 대구경 주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구경 주포는 원거리에서는 느린 발사 속도와 조준 속도로 인해 명중시키기 어려웠고, 때문에 속사포로 적함에 타격을 입힌 뒤 주포로 근거리에서 치명타를 먹이는 용도로 사용되던 상황이라는 점이다.

청나라 측에서도 이를 모르지는 않아서 정여창 등이 계속 소, 중구경 속사포의 구입 및 배치를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결국 전투에서 정원과 진원은 당시의 느린 대구경 주포 발사 속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최대의 발사 속도를 보여줬으나 대부분 빗나갔고, 반대로 일본군은 속사포를 마구 쏴대서 대부분의 함선들이 포에 얻어맞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해전은 참패한 것이다.

정원과 진원 역시 예외는 아니라 정원이 159발의 명중탄을 맞을 만큼 속사포에 마구 얻어터졌지만 원체 튼튼한 최신함이라 멀쩡했다. 전사자가 17명밖에 안 나왔을 정도로 건재했기에 사방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정원과 진원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정원급 철갑함 자체의 결함 때문에 사령관이 포의 반동으로 부상을 입는 희대의 개그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전투지속은 불가능했고 결국 독자적으로 전장에서 탈출한다.

정원급 철갑함은 12인치(305mm) 2연장 주포탑 2기를 선체 중앙 부근에 양 측면에 1기식 앙 애슐론(en echelon) 방식으로 설치한 후 함교를 주포탑 사이의 선체 중심선 위에 구조물을 세우고 올린 형태를 가지고 있다.예시

해당 방식은 거포와 무거운 장갑을 가진 주포탑을 7천톤 수준이라는 당대의 작은 배수량 한계 내에서 무게중심을 맞추면서 적재가능한 방식이며 선체 중심선상에 주포탑이 없긴 하지만 양쪽 측면에 12인치 함포를 2문씩 대응이 가능하며 이론상 배의 양측면 정방향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반대쪽 측면에 있는 주포탑을 회전시켜서 주포 4문을 모조리 사격가능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제로는 반대쪽 측면의 주포탑이 화력을 집중시킨다고 자신이 배치된 곳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해 발사하면 발포시 충격파와 화염이 갑판과 상부구조물을 강타하게 되는데 하필 그 위치에 함교가 있던 게 문제였다. 애초에 설계결함으로 주포탑 사이에 교량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함교를 올려놓아서 정상적인 포격시에도 함교와 주변부 전체에 주포 발포시 충격파와 화염이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도달하는 상황인데 상황이 긴급하니 교전 중에 한쪽 측면에 주포 화력을 집중하려고 주포 4문이 한 쪽 측면으로 발포할 경우에는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정여창 사령관이 주포 반동때문에 부상을 입는 게 정원급 철갑함의 설계결함인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속사포가 정원급 철갑함의 주포탑 근처에 집중되면서 주포탑에 포탄이 맞고 함교 방향으로 튕겨서 명중하거나 반대로 함교에 포탄이 맞고 주포탑 천정방향으로 튕기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함교 내부도 아수라장이 되고 주포탑도 앞서 이야기한 포연 배출용 개구부 내부에 포탄 파편이 들어오면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까지 일어난 것이다. 결국 일본군의 속사포 포탄이 집중되자 교량 구조물 자체가 붕괴되면서 함교가 망가지고 정여창 사령관과 함장, 참모들이 부상당하거나 전사해서 전투지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2]

하지만 북양함대의 화력은 절대 나쁘지 않아서 대구경 포를 보유한 덕에 어그로를 크게 끌었던 일본군 기함 마츠시마가 진원의 305mm 포에 직격, 대파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죽하면 중상을 입고 죽어가던 일본 수병이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유언을 남겨 이 에피소드로 군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다.[3]

5.6. 오합지졸 장교들

북양함대의 승무원들은 훈련도가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전투에 임했으나, '치원' 함장 등세창 및 일부 장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북양함대가 위세를 과시하러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했을 때,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아편마작으로 떼우는 청군 장교들의 한심한 실태가 외국계 장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정도. 함장을 맡은 고급장교들 역시 예외는 아니라 자신의 함선이 잘 싸우고 있는데도 전장에서 임의로 도주하는 역적짓을 했다. 싸워야 할 놈들이 앞다투어 도망치는데 암만 엘리트들을 배치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이것도 패배의 큰 원인이 된다.

일례로 황해 해전 당시 북양해군의 좌익을 맡았던 순양함 중 하나인 '제원'은 전투 중 '치원'이 격침된 이후 바로 적전 도주했다. ' 제원'의 함장은 당시 중국의 기대주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이랬다.

5.7. 정치적 문제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던 북양해군은 청나라의 정규군 해군이라기보다는 회군의 사병 집단에 가까웠다.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이홍장은 북양함대가 전투에 투입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꺼렸다. 자국 공업 기술력으로 건설한 함대가 아니라 현찰 박치기로 수입한 함선들이었기 때문에 손실을 보충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이러한 기류를 부추겼다.

그래서 국운을 걸고 해전을 치루어야 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싸우다가 함선을 잃으면 설령 일본 해군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이홍장의 엄포는 함대 사령관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고, 장병들의 사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국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후 패전 직전까지 출격 금지 명령에 묶여 있던 북양함대는 고립된 항구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탈출도 제대로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6. 말로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된 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위해위에 있는 본거지인 유공도로 피신하였으며, 곧 일본군산동 반도에 상륙해서 위해위 주변을 몽땅 장악한 후 포위전을 벌였다.

유공도 포위전도 일본군이 잘한 것보다는 청군의 졸전으로 인해 쉽게 포위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안포의 포탄 자체가 불량품인데다가 일본군이 해안포대를 공격할 때 유공도에 있던 북양해군이 일부라도 출격해서 방해를 해야 해안포대가 버틸 수 있는데 전혀 출격하지 않은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군이 보트등을 사용해서 상륙하자마자 해안포대의 병력이 쉽게 도주하거나 항복해서 순식간에 멀쩡한 해안포들이 다량으로 일본군에게 노획당했다.

일본군은 이렇게 노획한 해안포 + 일본 본국에서 가져온 화포 +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의 합동작전으로 유공도를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해안포의 탄약도 일본에서 제조해서 현지에 공급하는 식으로 교체하여 해안포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유공도가 고립당하자 유공도에 정박한 군함들이 빠져나가려고 해도 해안포와 일본 함대의 함포를 동시에 만나서 협격당하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함선이 탈출도 못해보고 교전 중에 좌초나 침몰하거나 항구에 정박한 채 나포당해서 북양해군은 사실상 소멸한다.

정원과 진원도 유공도까지 피신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원은 유공도 주변에서 섬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어뢰정의 야습으로 대미지를 입고 좌초되어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해버렸다. 이렇게 된 데는 정원이 제대로 된 호위를 받지 못하고 소수의 어뢰정이 동반하는 것 외에는 사실상 혼자서 출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원은 노획당하고 마는 최후를 맞이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북양함대에서 아직 쓸만한 함선은 모조리 일본이 압수해서 배상함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다른 함대가 명목상 지원해 준 몇 척의 함선도 북양해군 소속에서 싸우다가 역시 나포되었는데, 이 함선을 돌려달라고 해당 함대의 제독들이 일본군에게 탄원한 사실이 밝혀져 청나라는 국가간 전투에서의 패전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식의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북양해군에서 빼앗은 함선은 일본군이 오랫동안 써먹지는 못했다. 불과 10여년 후인 러일전쟁 무렵에는 무적 전함이라던 진원은 이미 2등 전함으로 분류되어 2선급 전력이 되어 있었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은 일등 전함으로 배수량이 두배인 15,000톤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발전하던 당시의 군사 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것도 모자라서 진원은 1908년에는 훈련용 함선이 되고 1911년에는 아예 제적 당한 후 연습용 표적으로 전용되어 파괴당했다. 1912년에는 매각되어 고철스크랩처리됐다. 무적의 전함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함선이 준공 후 불과 13년만이자 노획 후로는 불과 3년만인 1898년에 2선급이 되고 진수 30년째에는 아예 고철로 분해되는 기막힌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7.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

8. 군가

당시 북양함대(북양수사)의 군가로 북양수사군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부른 기록의 녹음본은 남아 있지 않고, 가사와 악보만이 발견되어 중국인민해방군이 부른 버전만이 남아있다.
송룡기와 매우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8.1. 가사

7언절구고 상평성 찰 한으로 압운했다.
寶祚延庥萬國歡
景星拱極五雲端
海波澄碧[4]春輝麗
旌節花間集鳳鸞
보조가 그늘을 늘리니 만국이 기뻐하고
경성북극성을 에워싸니 오운이 가지런하다.
바닷물결은 맑고 푸르며 봄빛은 곱고
딸랭이꽃 사이에 봉황난새가 모인다.
바오 줘 양 시우 완궈 후안
징싱 공 지 우 윈두안
하이 보 청비 천헐 리
징 지에 화 지엔 지 펑 루안
Bǎo zuò yán xiū wànguó huān
Jǐng xīng gǒng jí wǔ yúnduān
Hǎi bō chéngbì chūnhuī lì
Jīng jié huā jiān jí fèng luán

[1] 서태후의 행각은 과거 수양제한무제가 저질렀던 실수와 똑같다. 둘 다 강적에 맞서기 위해 군비를 마구 쓰고 있던 상황에서 대운하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양광은 아예 이로 인해 근위대의 반란과 함께 붙잡혀 처형되기까지 했다.[2] 함교에 제대로 된 방어시설물이 등장하는 시기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시절 이후이며 그 이후에도 장갑함교의 관측설비 부족등의 이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비장갑 구조물인 항해함교같은 곳에서 위험하게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함대의 주력이던 시기에는 아무런 방어구조물이 없는 노천함교에서 전투지휘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러일전쟁 시기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군 기함이었던 미카사다.[3] 죽어가던 수병이 옆의 부장에게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남겼고 부장은 전투 불능이 됐다며 안심시켰다. 이에 그 수병은 옅은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군가의 줄거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츠시마를 대파시킨 건 진원인데 왠지 정원이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끌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4] 고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