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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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0> 중국공산당 제1·4대 중앙조직부장 장궈타오 [ruby(张, ruby=Zhang)][ruby(国, ruby=Guó)][ruby(焘, ruby=dào)] | 張國燾(장국도) | Zhāng guódào | |||
출생 | 1897년 11월 26일 | ||
청 강서성 평향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핑샹시) | |||
사망 | 1979년 12월 3일 (향년 82세) | ||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스카버러 (現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시 스카버러구) | |||
묘소 | 스카버러 파인힐스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중앙조직부장 | ||
1921년 7월 ~ 1923년 6월 | |||
제4대 중앙조직부장 | |||
1927년 5월 ~ 1927년 7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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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양쯔례 | ||
자녀 | 장남 장하이웨이[1] 차남 장샹추[2] 3남 장위추안[3] | ||
소속 정당 | |||
1921년 7월 23일 ~ 1938년 4월 18일 (추방) | |||
1938년 4월 3일 ~ 1979년 12월 5일 | |||
학력 | 베이징대학 | ||
종교 | 무신론 → 개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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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정치가이자 혁명가. 초기 중국공산당의 멤버이자 지도자였으며 당 초기에 마오쩌둥과 경쟁했던 여러 정적 중의 한명이었다. 하지만 당 노선을 둘러싼 마오쩌둥과의 갈등 끝에 대장정 이후 당에서 거의 입지를 잃고 소외되어 있다가 중일전쟁 당시 중국국민당으로 전향하였다.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도 탈당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캐나다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한다.2. 생애
2.1. 초기이력
장시성 핑샹 현 출신. 베이징대학에 입학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처음 소개한 베이징대학 교수인 리다자오의 제자이며 5.4 운동에 참여했고 1920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1921년 중국공산당의 제1차 전당대회에 참가한 13명중 한명이다. 이 13명중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단 두 명이었다.
2.2. 1920년대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베이징 대표로 참석하여 초기부터 여러 중요 활동을 하였다. 중국 공산당 창당 이후 조직주임에 임명되었다. 1921년 8월 노동조합 서기처가 설립되자 서기 겸 주임에 취임했고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1923년 경한철로 노동자 파업 등을 지원했다.1922년 7월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결의했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며 고위직에 진입했다. 1922년 8월, 코민테른이 '혁명적 부르주아' 세력과 연합하라는 지령, 즉 중국국민당과 당내 합작을 하라는 지령을 내리자 처음에 반대하며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자는 리다자오와 대립했으나, 총서기 천두슈가 국민당 개조와 쑨원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국민당의 입당 방식을 개조한다면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음에 따라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설득을 받아 1차 국공합작에 동의했다.
1923년 2.7 사건 때 중앙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파업에 참여했으며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1차 국공합작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사실 이 시기에는 같이 공산당 창당에 합류한 마오쩌둥도 후난성의 지역인사에 불과했고 저우언라이는 프랑스에서 좀 잘 나가는 유학생 정도라서 훗날의 경쟁자들에 비하면 장궈타오의 초기 이력은 제일 눈부셨다. 1924년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 국공 합작을 깨고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 - 학살이 벌어지자 난창 폭동을 입안, 직접 참여했고, 8.7 긴급회의에서 천두슈와 함께 토지혁명을 방해한 인물로 몰려 비판받았다. 국민당이 공산당 간부들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에, 체포를 피하기 위해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샹중파, 쑤자오정, 저우언라이, 리리싼, 취추바이, 펑파이 등 23명과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동안 중국 공산당은 취추바이의 주도로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리리싼의 주도로 대공황을 틈타 1930년 창사 폭동을 비롯한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전개했으나 대도시 공격 노선은 모조리 진압당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유격부대들의 지방 근거 투쟁들만이 효과를 보여 해방구가 확장되었고 1931년 중국 공산당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2.3. 1930년대
1931년 중국으로 돌아와 리리싼이 벌인 모험주의 노선을 스탈린의 권위로 정리하면서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의 부주석에 올랐다. 후베이성에 근거한 악예환 소비에트를 맡았지만, 제4차 초공작전에서 너무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제4방면군 총병력 8만명을 거느리고 사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이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악예환 소비에트의 남동쪽인 장시성에 있던 중화소비에트공화국도 붕괴되고 공산당 중앙과 홍군 주력부대들로 구성된 제1방면군은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은 구이저우성에서 열린 준의회의에서 보구와 오토 브라운으로부터 당권과 군권을 되찾고 북상, 1935년 6월 쓰촨에서 장궈타오가 지휘하는 4방면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전술적 안목이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 휘하에 머문 저우언라이와는 달리, 장궈타오는 항상 "청강생(마오쩌둥은 베이징 대학에서 직원 겸 청강생 신분으로 공부했고, 장궈타오는 정식 입학생이었다.) 주제에..."라며 마오쩌둥을 무시했고, 마오쩌둥과 빈번히 의견 충돌을 빚었다.
장궈타오는 마오쩌둥과의 만남에서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쓰촨성, 칭하이성의 접경의 소수 민족 지역에서 해방구를 열자고 했지만, 마오쩌둥은 소수 민족은 공산당 국민당을 불문하고 한족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게릴라 전술을 펼쳐야 하는 홍군이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원래 마오쩌둥의 게릴라전 이론은 주변 촌락의 절대적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는데,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이런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쓰촨에 머물 것이 아니라 류즈단과 시중쉰 [4]이 이미 건설해 놓은 서북 지역의 해방구로 가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둘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장궈타오는 장정 중에 집중공세를 당해서 병력이 1/4로 감소한 마오쩌둥군을 습격, 이렇게 자기 말을 안듣는 마오쩌둥을 체포해 처형하고 당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장궈타오의 휘하 부하였던 예젠잉이 이런 음모를 알고 마오쩌둥 쪽으로 넘어가면서 무산되고, 마오쩌둥은 서둘러 만 명이 안되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섬서해방구로 도피하기 시작했다.[5] 예젠잉은 코민테른과의 교신에 사용되는 암호책까지 가지고 마오쩌둥에게로 갔기 때문에, 장궈타오 부대는 외부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외부와 교신이 안되는 상태에서,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쓰촨의 변경지대에 머물면서 해방구를 건설하려 했다. 다만 원래 마오쩌둥의 1방면군에 있었던 주더와 류보청은 마오쩌둥 부대가 도피할 때 장궈타오의 휘하에 전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장궈타오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장정 도중 만난 장궈타오와 마오쩌둥. 표정에서 보듯이 매우 어색한데, 실제로 장궈타오는 마오쩌둥을 체포해 처형하려 하였다.
장궈타오는 당중앙(마오쩌둥)과의 교신이 끊기자 1935년 11월 3일, 제2당중앙을 선포하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보구, 장원톈의 당적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당중앙을 향해 "너희는 그냥 북방국일뿐, 당중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전문을 날렸다. 마오에 충성을 바치던 주더나 쉬샹첸 등이 이런 장궈타오의 전횡을 말리려고 했으나, 막무가내였고, 1국 1당원칙을 가진 코민테른과도 계속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장궈타오의 쓰촨성 해방구는 마오쩌둥의 옌안 해방구보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6] 국민당군의 집중 공세를 당하고 1936년 2차 양광사변으로 잠시 숨통 돌리나 했더니 3개월 만에 평화적으로 해결되면서 다시 두들겨맞아 완전히 세력을 잃고 말았다. 장궈타오는 살아남은 간부들만 데리고 허겁지겁 마오쩌둥의 뒤를 따라 옌안으로 피신하였다. 한때 마오쩌둥의 4배에 달했던 휘하 병력은 모조리 잃어버렸다.
한때 8만명에 이르렀던 총병력은 옌안 근방에서는 2만명까지 병력이 줄었으나, 도착 직전 후이족 군벌인 마부팡이 거느리는 10만 대군의 습격을 받아 휘하 병력을 다 잃었다. 쓰촨에 출발할 때는 7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200명의 패잔병만 거느린 초라한 모습이었다.[7]
2.4. 국민당 전향
장궈타오는 옌안에서도 상징적인 당고위직을 지켰으나, 마오쩌둥이 쭌이 회의 이후 당에서 절대권을 확립함에 따라 실권은 거의 없었다. 결별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악화된데다가, 실제로도 당중앙을 참칭하며 마오쩌둥을 출당하는 짓거리를 했기 때문에 옌안은 가시방석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당내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자기와 남의 과오를 올바른 이념(즉 마오쩌둥의 사상)의 기준으로 비판하자"는 운동을 벌였는데[8] 장궈타오(그리고 리리싼, 왕밍)은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다. 장궈타오 입장에서는 본인이 무시하던 마오쩌둥 아래 있는 것도 서러운데, 다른 당원이 지속적으로 자기를 비판하는 것도 모자라 자아비판까지 강요당하니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결국 1937년 당 정치국에서도 밀려나서 섬서성 당서기가 되었으나, 당시 공산당은 섬서성의 옌안 근방의 지역만 영역으로 보유하고 있던 사정이라 이름뿐인 자리였다.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국공합작이 재개되면서 국민당의 포위가 풀려서 공산당 인사들은 국민당 영역인 시안에 오갈 수 있었는데, 1938년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안을 방문했다가 그곳에 연락업무를 위해 주재하던 저우언라이 등의 공산당 대표단에게 탈당할 뜻을 비쳤다. 저우언라이는 탈당을 말렸으나, 그대로 국민당 측으로 가서 "가장 혁명적인 정당은 국민당이며,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사당이 되었다.[9]"고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민당에 귀순하였다.
장제스는 "이것은 옌안 측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라고 기대했으나, 이미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을 통해 왕밍을 비롯한 당내 경쟁자들을 철저히 까부수고 저우언라이 등 나머지 경쟁자들의 복종을 받아내어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장궈타오의 망명이 국민정부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향 직후 장궈타오는 화북과 산둥반도 지역에서 활약하던 공산당측의 무력인 팔로군 129사단[10]을 상대로 한 선무작업에 동원되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그나마 이 시기에는 명예직이나마 고위직에 임명되면서 어느 정도 대접은 받았다.
2.5. 국공내전 이후
1946년 국공내전 재개 이후, 국민정부가 패배하여 국부천대를 단행하자 같이 대만으로 이주했지만 장제스는 더 이상 쓸데라고는 없어진 장궈타오를 푸대접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궈타오는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고, 1952년 구멍위, 장파쿠이 등 홍콩으로 망명한 저명정치가들과 함께 중국자유민주전투동맹 창설에 합류했으나 잡지 평론을 쓰면서 가난 속에서 지냈다. 중공정부 초기 신정부를 이끌 인재가 드물 때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과오를 반성하면 복당을 허용하고 다시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장궈타오가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1]이후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67폭동[12]이 일어나 홍콩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13] 1968년 홍콩을 떠나 미국을 거쳐 두 아들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수모를 감내하고 중국에 남았어도 문화대혁명 때 마오의 정적들은 홍위병에 의한 린치, 학대와 비난을 못이겨 자살, 또는 오지로 귀양을 갔기 때문에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오의 정적들은 건국 후 당정군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홍위병의 비난 대상이 되었는데, 리리싼은 홍위병의 박해를 못이겨 자살했고, 마오에 반대를 한 적이 있던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고 학대 속에 최후를 맞은 것이 대표적 예. 마오의 정적 중에서 이런 박해를 피할 수 있던 사람은 병을 핑계로 소련으로 망명한 왕밍이나 국민당으로 귀순했던 장궈타오 정도였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장궈타오에게 가혹하지만은 않았고, 옌안에 남은 장궈타오의 처와 아들들에게 연좌제로 책임을 묻지 않았고, 중국을 장악한 후에 장궈타오와 지낼 수 있도록 본토에 남은 처와 세 아들의 홍콩 망명을 허가해 주었다.
중년의 장궈타오
2.6. 말년
노년의 장궈타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죽의 장막에 휩싸인 중국의 자료가 부족했던 미국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1969년 미국 캔자스 대학의 자금 지원을 받아 회고록을 남겼다. 이 회고록은 마오쩌둥이 당을 장악하기 이전의 당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회고록에서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며 마오쩌둥의 역할을 축소했는데, 자기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많지만, 다른 사료의 교차 검증으로 극복되는 부분이다. 다만 회고록 이후 시점의 중국이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나는 정치에서 손을 씻었다" 논평을 사양했다. 1976년에는 중풍으로 반신 불수가 되었다. 죽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양로원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이불을 떨어뜨렸는데 반신불수 상태여서 이불을 도로 줍지 못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1979년 12월 3일 이었다. 사망할 때 푸대접했던 장제스와 달리 장징궈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장례까지 도와주었다.
아내 양쯔례(1902-94)도 공산주의자로, 장궈타오가 홀로 전향 후 옌안에 남겨졌지만 연좌제로 투옥되지는 않고 계속 당직을 맡았다. 이어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공산당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중국 임산부협회장을 맡았다. 당에서는 남편과 절연하고 이혼을 선언하라고 강요했으나 끝까지 남편과의 의리를 지켰고, 나중에 마오의 허가가 떨어지자 후에 홍콩으로 건너와 장궈타오와 지내다가 캐나다에서 생을 마쳤다. 자식들은 모두 미국과 캐나다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대학교수(수학자), 의사, 엔지니어로 일했다.
3. 평가
대장정 기념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장궈타오의 흉상. 다만 비문에는 처음에는 영웅적으로 시작했다가 후에 변절했다는 점이 기록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배신자로서 "이완용" 취급을 받았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안정되자 아무래도 중국사의 전통인 "한때나마 역사를 주도한 자도 결국 영웅이다"라는 논리에 따라서, 핑싱현에 있는 생가가 관광지로 정비되고, 대장정 기념관에는 동상까지 세워져 전시되고 있다.[14]
4. 매체에서
호이4에서 중국 관련 DLC인 Waking the tiger와 1.5패치가 나오면서 중화민국의 공산당 지도자로 등장한다. 장궈타오의 국민당 전향이 1938년 시점인걸 생각하면 시작 연도가 1936년인 상황에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고증오류지만 아예 마오쩌둥이 공산당 지도자로 나오던 기존보다는 나은 듯.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비븐 레빈, 민음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하,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1] 의사[2] 엔지니어[3] 교수[4] 시진핑의 아버지이다.[5] 이 공 때문인지, 예젠잉은 후에 군에 계급이 도입되었을 당시인 1955년 원수에 올랐고, 문화대혁명 기간에 다른 원수들이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거나 실각하여 삽질을 할 동안에도 마오의 신임을 받아 별탈 없이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문혁 종료 직후 화궈펑을 압박하여 덩샤오핑을 복권시키고, 화궈펑이 덩샤오핑에게 선양하는 것에도 큰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때 세운 공으로 숙청이나 실각 한번 없이 군 커리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행운의 원수이다.[6] 여기에 장궈타오는 쓰촨 해방구에서 스탈린 흉내를 내면서 아직도 자리잡히지 않은 해방구에서 피의 숙청을 하는 등, 여러모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마오쩌둥처럼 카리스마나 문필력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리더십에 금만 갔다. 그 휘하에 있던 4방면군 사령관인 쉬샹첸이나 참모들 여러 명이 나중에 모두 그를 외면하고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그때 이미 잔인하고 무능한 리더임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 장궈타오는 쉬샹첸의 아내인 청쉬쉬안(程训宣)마저 공산당 내의 국민당 프락치인 "AB단"으로 몰아 처형했을 정도.[7] 여담이지만 이 당시 장궈타오 부대 소속으로 마가군벌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옌안으로 탈출해서 훗날 공산당 고관이 된 사람이 바로 후야오방 총서기이다.[8] 이것은 나중에 체계화되어 옌안시절에는 정풍운동이 되고, 집권 후에는 규모와 강도가 커지면서 1950년대 반우파 투쟁, 1960년대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으로 나타난다.[9] 이 말의 후반부는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쭌이 회의 때 마오쩌둥의 전략이 옳다는 것이 판명됨에 따라, 당내 절대권이 확립되었고, 당내에서 마오쩌둥에 맞설 만한 인물은 거의 굴복하거나(저우언라이, 리리싼) 침묵을 지켜야 했다.(왕밍, 보구)[10] 사령관 류보청, 정치위원 덩샤오핑.[11] 실제로 마오쩌둥과 함께 1차 전당대회에 참가했으나, 중도에 중공을 탈당하고 국민당에 붙었던 류런징과 바오후이성은 반성문을 제출하고 복당해서 대륙에서 관리생활을 했다.[12] 이당시 마오이즘의 영향력은 홍콩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막강해서,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 몽상가들에서 문화대혁명 포스터가 기숙사에 붙어있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3] 영화 첩혈가두를 보면 그 상황이 나온다.[14]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창당 일원이었으나, 후에 트로츠키파로 전향했다가 아예 사회주의를 버린 천두슈도 동상까지 세워져 기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