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32:42

경복궁 강녕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
현무문
천하제일복지천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청와대 관저
청와대 본관 청와대 녹지원 춘안당 융문당
칠궁 양정재 수궁(구 관저터) 융무당 태화궁
지희실 경농재(관풍루) 대유헌 경무대
청와대 위민관,헬기장
수궁 청와대 춘추관
마장 관가문 희맹공신단
금화문 팔도배미
청와대 영빈관,경호실
추성문 금위군직소 춘화문 춘생문
신무문 수문 계무문 광무문 춘도문 수문
숙문당 수문장청 군사방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각감청 관문각
건청궁
서녹산 어구 동녹산
태원전 영사재 대왕대비전 세답방
순화궁 세답방 중궁전 세답방 종각
빈궁 세답방 공묵재 왕대비전 세답방 가회정 보현당 남여고 육우정 녹직처소 내재실
동장고 통화당 순화궁 외소주방 숙경재 서진설청 선원전 동진설청 경안당
순화궁 내소주방 진전 소주방 진전 생물방 화락당 나인처소
회안전 문경전 서장고 향원정만화당 벽혜당(왕대비전 생물방) 대향당 나인처소
정훈당
함화당 집경당 전기등소 만경전 건기당(왕대비전 내소주방) 요광당(왕대비전 외소주방)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나인처소
숙설소 영훈당
빈궁 생물방 상궁처소 다경합 건복합
회광당(빈궁 내소주방) 광원당(빈궁 외소주방)
원역처소 수인문 흥복전 중궁전 수방 대왕대비전 수방 제수합 영보당 벽월당(상궁처소)
중궁전 침방 대왕대비전 침방
제관방 원역처소(접견소) 장방 원역처소 아미산 자미당 자경전 집희당(대왕대비전 내소주방) 춘소당(대왕대비전 침방) 취운당(대왕대비전 수방) 나인처소
침채고 예춘당(대왕대비전 생물방) 벽로당(상궁처소) 웅향당(상궁처소)
함정당(대왕대비전 외소주방) 계응당(상궁처소)
임향당 나인처소
국별장직소 함원전 건순각
인지당 나인처소 보월당(상궁처소) 자운당(상궁처소) 나인처소
경회루 함홍각
교태전원길헌
복희당(대전 생물방)
국출신직소 흠경각
양의문대전 내소주방난지당(대전 외소주방)대소대금방(나인처소)
무겸직소 응지당 강녕전연길당
북소위장직소 경성전 연생전
수문파수각 향오문
영추문 수문장청 내각(규장각) 검서청(규장각) 대전장방(내시부) 천추전 사정전 만춘전 자선당비현각 장방 수문장청 건춘문
습회당 협오당 장원당 중궁전 수랏간 왕대비전 수랏간 등촉방 등촉방 장방 관리사무소
군사방 수정전 별감방 군사방
초관직소 장무관직소 입심억석(내의원) 주원(사옹원) 수정문 사정문 오상방 원역처소 세자궁 수랏간
훈국군번직소 침의청(내의원) 약방(내의원) 내반원(내시부) 협의문
융무루ㅓ
근정전계인문
융문루
통장청 문기수청 춘방
서소위장직소 의약청(내의원) 영화문 계방
옥당
(홍문관)
검서청(규장각) 대전 수랏간 계조당 훈국군번처소 초관처소
누국 당후(승정원) 정원(승정원) 숭양문 월화문 근정문 일화문
일영대 선전관청 빈청
기별청
유화문
수각

덕양문
수각
봉선문 별군직청 주차장
영제교
춘방책고대청 상의원 면복각
신당 덕응방 북마랑 흥례문
전사청 연고 내사복시 거달처소 중마랑 동마랑 용성문 어도 협생문 계방 오위도총부
우마랑 국립고궁박물관 좌마랑 내구 연지 수문장청
매표소
군사방
수문장청
매표소
남소부장청 동소부장청
견마배청 남마랑 군사방 초관처소
영군직소
측사
측사 충장장청
서십자각 수문 광화문
(월대)
수문 동십자각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 康寧殿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창경궁 통명전
昌慶宮 通明殿
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경희궁 융복전
慶熙宮 隆福殿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 交泰殿
경희궁 회상전
慶熙宮 會祥殿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 康寧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395년 (창건)
1867년 (중건)
1888년 (중건)
1995년 (복원)
파일:경복궁 강녕전.jpg
파일:경복궁_강녕전.jpg
<colbgcolor=#bf1400> 강녕전[1]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부속 건물
5.1. 연생전(延生殿)5.2. 경성전(慶成殿)5.3. 연길당(延吉堂)5.4. 응지당(膺祉堂)5.5. 강녕전 동행각(康寧殿 東行閣)5.6. 강녕전 서행각(康寧殿 西行閣)5.7. 강녕전 남행각(康寧殿 南行閣)5.8. -침채고(沈菜庫)-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강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쉽게 말해 왕의 이다.

편전인 사정전북쪽, 중궁전교태전남쪽에 있다.

2. 이름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2]서경(書經)》 -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3]이 나오는데, 거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강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4]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강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강'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강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현판 글씨는 1995년에 서예가 여초 김응현(金膺顯. 1927 ~ 2007)이 쓰고 각자장[5]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역사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다. 1433년(세종 15년) 고쳐지었으며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사라진 뒤 재건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탔고 270여 년 뒤인 1867년(고종 4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년)에 다시 화재를 입었고 1888년(고종 25년)에 재건했다.
<colbgcolor=#bf1400> 경복궁 침전 복원 사업. 복원 중인 강녕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colbgcolor=#bf1400> 1992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만든 문화영화
〈대목장의 우두머리 목수, 도편수의 '경복궁 강녕전 복원과정〉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기 위해 해체, 이전했다. 그래서 지금은 희정당이 되었다. 이후 80년 가까이 빈 터로 남아있다가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정면 11칸, 측면 5칸의 1층[6]으로 조선 왕궁의 정식 침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조선 전기에는 정면 7 ~ 9칸이었으나 경복궁 중건 이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뒤, 쇠서 2개를 둔 이익공 공포 양식으로 지었다. 동, 서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긴 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유행했던 궁궐 건축 양식의 특징이다. 건물 가운데엔 넓은 월대를 세워 위엄을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위에 언급한 것처럼 행사 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파일:강녕전 내부 구성도.png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내부 구성도
  •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놓고 좌, 우 양 옆에 9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건물 4면의 가장자리 칸들은 툇마루로 구성했는데, 정면의 대청과 통하는 툇마루는 밖으로 드러나게 하여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툇간과 대청 사이의 출입문을 위로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만들여 공간을 언제든 개방 또는 분리 가능하게 만들었다.
파일:강녕전 내부 방.png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내부 온돌방. 왼쪽이 동온돌, 오른쪽이 서온돌이다.
파일:강녕전 대청과 천장.png
강녕전 대청과 대청 천장의 단청.
  • 내부는, 대청의 경우 한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7]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온돌방의 경우 양쪽 모두 각각 9칸인데, 대청 쪽 방은 3칸을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했다. 가운데 방은 이 머무는 공간이고 기타 방은 왕을 보조하는 상궁들이 머물렀다. 원래 각 방의 장지문마다 십장생 등 그림을 그려넣어 장식했으나 지금은 창호지만 발라져있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강녕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왕비의 정식 침전 지붕은 다 저렇다. 이유에 대한 여러 가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의 침전의 경우, (=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용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8]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황제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9]

5. 부속 건물

5.1. 연생전(延生殿)

景福宮 延生殿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연생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2. 경성전(慶成殿)

景福宮 慶成殿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성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3. 연길당(延吉堂)

景福宮 延吉堂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연길당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4. 응지당(膺祉堂)

景福宮 膺祉堂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응지당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5. 강녕전 동행각(康寧殿 東行閣)

파일:강녕전 동행각 배치도.png}}} ||
<colbgcolor=#bf1400> 강녕전 동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康寧殿 東行閣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정면 15.5칸, 측면 1.5칸의 행각이다. 북쪽부터 흥안당(興安堂).계광당(啓光堂),지도문(志道門),수경당(壽慶堂)으로 이루어졌다.

5.6. 강녕전 서행각(康寧殿 西行閣)

파일:강녕전 서행각 배치도.png}}} ||
<colbgcolor=#bf1400> 강녕전 서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康寧殿 西行閣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51.5칸의 행각이다. 북쪽부터 융화당(隆和堂),대재문(大哉門),자안당(資安堂),건상당(建祥堂),내성문(乃成門),의안당(宜安堂)으로 이루어졌다.

5.7. 강녕전 남행각(康寧殿 南行閣)

파일:강녕전 남행각 배치도.png}}} ||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남행각 내부 구성도
景福宮 康寧殿 南行閣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정면 37칸, 측면 1.5칸의 행각이다. 동쪽부터 안지문(安至門),청심당(靑心堂),정문인 향오문(嚮五門),연소당(延昭堂),용부문(用敷門),건의당(建宜堂)으로 이루어졌다.

5.8. -침채고(沈菜庫)-

파일:침채고.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침채고 내부 구성도
景福宮 沈菜庫

함원전 북쪽에 있던 침채(김치)를 보관했던 정면 6칸, 측면 1.5칸의 창고이다. 원래는 침전 구역을 복원할때 같이 복원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구역이 태원전 권역에 있던 제30경비단과 일부가 곂쳐서 미복원됐다.

6. 대중매체에서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침전으로 많이 나왔다. 제일 처음 등장한 작품은 KBS 드라마찬란한 여명》. 마침 드라마 방영 시기와 복원 공사하던 때가 맞물려 1860년대의 경복궁 중건 장면을 실제로 공사 중이던 현장에서 촬영했다. 희한하게 조선 후기 경복궁이 없던 시절에도 나오는데 창덕궁의 희정당이라고 현판을 바꾸거나(...) 아니면 재현을 무시하고 강녕전 현판 그대로 달고 나온다.
  • 2001년 ~ 2002년 방영 된 SBS 드라마여인천하》에선 국가의 공식 행사를 하는 모습도 많이 나왔다. 원래는 근정전에서 촬영하려 했으나 하필 당시 근정전을 보수하는 공사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강녕전이 공식 행사장으로 나온 것. 하긴 강녕전에서 행사가 많이 열렸던 것도 사실이니 아주 재현이 엉망인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도 즉위식을 침전에서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조선 왕궁을 재현한 전라북도 부안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경상북도 문경의 《대왕세종》 세트장에 각각 강녕전 세트가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부안의 강녕전 세트는 사정전 현판을 달고 있다. 반면 《대왕세종》 세트장의 강녕전은 제 모습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예산이나 부지 문제 때문인지 정면이 11칸이 아닌 9칸이다.

[1]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편안할 강(康), 편안할 녕(寧).[3] 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아홉가지 큰 원칙.[4]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시(保寧市), 고령가야(古寧伽倻), 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 항목 참조.[5] 나무판에 글자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6]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7]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8]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9] 사실 함녕전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10] 당시 고종은 주로 건청궁에서 거주했다.[11] 확실한 것은 연생전과 이어지는 복도각이 경성전과 연결된 복도각보다 오래 남아있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0 (이전 역사)
문서의 r879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