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6 15:46:46

경희궁 승휘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무덕문
계상당 춘화각영취정
서암 덕유당 상휘당 광명전 어조당 용비루 장락전 봉상루
영렬천 자정전 집경당 회상전 융복전 융무당 집희당 경선당
위선당 태령전 자정문 영선당 사현합
태령문 향실숭정전 정시합 흥정당 청한정 지효합 상의원
내삼청 숭양문
숭정문 승휘전 흥원문
직조청 내각(규장각) 예문관 서방색 궁방 사옹원 사은원 양덕당
일영대 금루 호위청 선부관청 경현당
기상청
국립기상박물관
무겸청 연화문 광달문 화경문 경헌문 승화문
숭의문 서울특별시 교육청 금상문 서울역사박물관 건명문 금천교 흥화문
남소 옥당(홍문관) 약방(내의원) 약원 도감군사대직청 빈청 전설사
오위도총부 정원(승정원) 덕응방 내구 마구
개양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북궐
(경복궁)
경복궁 계조당
景福宮 繼照堂
경복궁 자선당
景福宮 資善堂
경복궁 비현각
景福宮 丕顯閣

동궐
(창덕궁 · 창경궁)
창덕궁 중희당
昌德宮 重凞堂
창덕궁 성정각
昌德宮 誠正閣
창덕궁 관물헌
昌德宮 觀物軒
창경궁 저승전
昌慶宮 儲承殿
창경궁 낙선당
昌慶宮 樂善堂
창경궁 시민당
昌慶宮 時敏堂

서궐
(경희궁)
경희궁 승휘전
慶熙宮 承輝殿
경희궁 경현당
慶熙宮 景賢堂
경희궁 양덕당
慶熙宮 養德堂
경희궁 집희당
慶熙宮 緝熙堂
경희궁 경선당
慶熙宮 慶善堂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승휘전
慶熙宮 承輝殿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추정 (창건) / 1698년 (소실)
1. 개요2. 역사3. 여담

[clearfix]

1. 개요

경희궁동궁으로, 왕세자왕세자빈이 머무는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승휘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

이름은 ‘빛(輝)을 잇는다(承)’는 뜻이다.

인조 ~ 숙종 시기에만 존재했다. 즉, 경희궁경덕궁[1]일 때만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경희궁 승휘전’이 아닌 ‘경덕궁 승휘전’이 맞다.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 1940년에 제작된 《경희사림》에 실린 '경희궁 배치도'에 따르면 융복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건립되었다. 경희궁을 지은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정작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인조장남소현세자가 처음 사용하였다.

1655년(효종 6년) 12월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헐려고 했다.#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효종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는데#, 효종의 손자 숙종 시기에 승휘전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이 때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은 것인 지는 확실하지 않다.

1698년(숙종 24년) 11월에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일어난 불이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건물이 전부 타버렸다.#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즉, 80년도 못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

3. 여담

  • 1675년(숙종 1년) 10월에 승휘전 뜰에 희귀한 쌍무지개가 뜬 적이 있었다.#
  • 1693년(숙종 19년) 3월에 승휘전과 그 주변을 수리하다가 사람 가 나왔다. 누구를 저주하려고 묻은 건 아니고, 옛날 이 일대가 매장 터였기 때문에 발견된 듯하다. 숙종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뼈의 주인들을 가엾게 여겨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이에 헌납 이우겸이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공사를 밀어붙였다.#


[1]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영조 재위기인 1760년이다.[2] 여기엔 '輝'가 아닌 '暉'로 적혀있다. 둘 다 빛, 또는 광채를 의미하는 글자라서 예전부터 서로 혼용해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