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06:25:14

창덕궁 서총대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대보단
건무문 광지문 수문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옥청문
농포
소요암 옥류천
소요정 수문
취한정
수복방 신선원전 진설청
괘궁정 취규정
재실
능허정
의효전 사가정 청심정 천향각
몽답정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존덕정
외삼문 폄우사 척뇌당
관람정
한려청 반도지
승재정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농수정
연경당 선향재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창덕궁 애련정 수궁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운경거 의두합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주합루
어수문
사정기비각 부용지 영화당 춘당대 서총대
부용정
요금문 수문장청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수정전 가정당
수궁 습취헌 집상전
영모당
생물방 경복전 경훈각 징광루 함원전
소주방 청향각
숙경재 의풍각 융경헌 대조전 흥복헌
수랏간 관리합
만수전 태화당 재덕당 정묵당 요휘문 경극문 창경궁
경추문 수문장청 보경당 선평문 양심합 여춘문 병경문
함양문
서북 진설청 내재실
선원전
서남 진설청 동남 진설청
만수문 건중문 희정당 자선재 영안문
양지당 만안문 관광청 선정전 유덕당 건인문
책고 인정전 관물헌 석유실 어휘문
봉모당 억석루 연경문 만복문 향실 선정문 성정각 보춘정 양성재 중희당 칠분서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예문관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삼삼와 승화루 한정당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장방 영현문 전의사 취운정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이문원 검서청 약방 내삼청 광범문 대전장방 내반원 낙선재 석복헌
훈국초관인직소 홍문관 당후(승정원)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수강재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승정원 상서성 연영문 협양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인정문 +양사(사간원) 공상청 사알방 누국
수문장청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일영대
금호문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저승전 낙선당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진수당 장경각 계방
수문장청돈화문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시민당 군옥재 춘방 등룡문
원역처소 수문장청 전루 별감방 등촉방 배설방 훈국군번소 사주문
단봉문 종묘북신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한국 정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궁원 宮苑
누원 樓苑 임해전
성동동 전랑지
용강동 원지 유적
구황동 원지 유적
부여 궁남지
익산 금마저 왕궁 후원
안학궁 정원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향원정
조선
창덕궁 서총대
원림 苑林 만월대 금원
경복궁 북원
창덕궁 비원
조선
경희궁 후원
조선
인경궁
조선
자수궁
화계 花階 경복궁 아미산
창덕궁 낙선재
왕실누정 王室樓亭 망원정
용양봉저정
낙천정
조선
탕춘대
관원 官苑
누원 樓苑 장대 將臺 촉석루
영보정
방화수류정
연광정
통군정
인풍루
수항루
객사 客舍
동헌 東軒
군영 軍營
세검정
환아정
영남루
군자정
한벽루
지수당
죽서루
백상루
성천
강선루
육승정
함흥
칠보정
관덕정
감영 監營 영주관
부용당
오순정
명승 名勝 광한루
항미정
채미정
망양정
월송정
쌍수정
경포대
청간정
총석정
부벽루
칠성정
풍패루
해월정
사원 私苑
별서 別墅 정원 庭苑 석파정 ·
서울
옥호정 ·
서울
백석동 별서 · 성북동 별서 ·
서울
무계동 별서 ·
반계 윤웅렬 별서 · 운림산방 · 서석지 · 귀래정 · 독락당 ·
다산초당 · 함안 무진정 · 남간정사
원림 苑林 부용원 · 소쇄원 · 식영정 · 환벽당 · 면앙정 · 송강정 ·
명옥헌 · 독수정 · 임대정 · 부춘정 · 백운동원림 · 초연정 ·
용호정 · 요월정 · 심원정 · 초간정 · 용계정 · 만휴정
임천원 臨川苑 효사정 ·
서울
압구정 ·
서울
천일정 · 서벽정 · 농월정 ·
거연정 · 요수정 · 용암정 · 월연대 · 선몽대 ·
청암정 · 침수정 · 위양지 완재정
향원 鄕苑 영보정 · 무기연당 · 선교장 · 오죽헌 ·
방해정 · 쌍산재 · 진주 용호정원
사원 寺苑
정림사 연지 · 미륵사 쌍지 ·
남원
실상사 지당 · 송광사 계담 ·
수선사 정원 ·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경주
불국사 구품연지 · 청평사 고려선원 · 낙산사 의상대 ·
대흥사 무염지 · 통도사 구룡지 · 봉선사 화계 · 봉정사 영산암
기타
금장대 · 태화루
현대정원
진해루 · 월화원 · 외도 보타니아 · 별빛정원 · 황산불빛정원 · 39-17 마중 ·
발리정원 · 섬이정원 · 아름다운정원 화수목 · 생각하는 정원 · 남이섬 · 원생정원
수목원 · 국가정원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현존하지 않는 건축물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서총대
昌德宮 瑞蔥臺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505년 (창건)
1507년 (철훼)
1. 개요2. 이름3. 역사
3.1. 철거 이후
4. 모습과 크기
4.1. 모습4.2. 얼마나 컸는가?

[clearfix]

1. 개요

연산군경복궁 경회루를 본떠 창덕궁 후원 춘당지 동쪽에 만든 연회용 건물이다.

2. 이름

'서총(瑞葱)' 뜻은 '상서로운(瑞) (葱)'이다. 원래 서총대가 있던 구역에 성종 때 한 줄기에 가지 9개가 달린 특이한 파가 돋아나 '서총(瑞葱)'이라 불렀고 연산군이 이를 생각해 서총대라 이름붙였다.

3. 역사

1505년(연산군 11년)에 연산군창덕궁 후원 춘당지 동쪽에 경복궁 경회루를 본떠 짓게 했다. 서총대 공사는 1년 넘게 이어졌고 인원 수십만 명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자연히 자금조달을 위한 세금 독촉도 심했다. 하지만 공사 도중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서총대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건물은 중종반정 이후 3년 뒤인 1507년(중종 2년)에 헐렸다.
명하여, 양화문(陽華門)과 서총대(瑞葱臺)를 철거케 했다. 이것은 모두 폐주(廢主) 가 건축했던 것이다.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5일 기유 5번째기사

3.1. 철거 이후

건물이 사라진 이후에도 서총대는 《조선왕조실록》에 번번히 등장했다. 1560년(명종 15년)에는 유생들의 시험 장소로 사용했다.
파일:서총대첩.jpg
<colbgcolor=#bf1400> 《서총대친림사연도》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창덕궁 뒷뜰에 있는 서총대에 이 행차하여 재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베푼 작은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명종(明宗)은 이날 서총대에서 문신에게는 어제(御製: 임금이 직접 내린 제목)를 내려 시를 짓게 하고, 무신에게는 짝을 지어 활쏘기를 시켰다. 그리고 어찬(御饌)을 나누어주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 말 등을 성적이 좋은 사람들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중앙에 꽃무늬가 있는 큰 항아리가 있고, 붉은빛 단령을 입은 입시신(入侍臣)들이 각기 하나의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인물들은 가운데 맨 앞쪽에 서서 악기를 부는 악공을 보고 있기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는 인물들, 그리고 왕의 자리를 향해 앉은 악공과 기녀(妓女)들의 변화 있는 자세와 움직임이 보인다. 먹과 채색이 바래진 부분이 있으나 연회의 장면을 자세하게 잘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서총대친립사연도 설명
이후 1583년(선조 16년) 무신들의 활쏘기 장소와 문신들의 제술 시험장으로 사용하면서, 서총대는 문 · 무신의 시사 또는 열무를 하는 곳으로 굳어졌다.

4. 모습과 크기

4.1. 모습

서총대 관련 《연산군일기》의 기록이다.
전교하기를, "후원(後苑)에 새롭게 지을 누대를 경회루(慶會樓)와 같게 지으라." 했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5월 7일 신묘 7번째기사
경회루와 같게 지으라고 했는데,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에는 3층이었으므로 서총대도 3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 경회루 바깥 돌기둥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보아 서총대 기둥에도 용조각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총대 바깥 돌기둥의 용은 《조선왕조실록》 기사로도 남아 있다.
전교하기를,
"인양전(仁陽殿) · 서총대(瑞葱臺)의 공사를 마친 후에는 동·서로 성을 쌓을 것이지만, 아직 그 성터에 큰 나무를 죽 심어서 성안을 가리게 하라."했다.그때에 명하여 인양전을 짓고, 또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었는데, 1천 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차송한 인원 1백 명이 감독했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호야(呼邪)(여러사람이 힘을 합쳐 일할 때 호흡을 맞춰서 부르는 소리) 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 1월 21일 신축 7번째기사

4.2. 얼마나 컸는가?

위에 적은 《연산군일기》의 "1천 명은 족히 앉을 만하다"와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란 기록만 보더라도 그 크기가 굉장히 컸다는 걸 알 수 있다.[1] 그리고 《중종실록》의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창경궁(昌慶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했다. 그 위에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했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中
일단 이 (尺)[2]이란 단위부터 알아야 한다. 단위가 각 지역, 시대마다 들쑥날쑥한 걸 감안하더라도, 한 척이 대략 25 ~ 40cm이므로 1척 = 30cm 으로 계산하면 30 x 100 = 3000cm이다. 3000cm는 30m 이므로 서총대의 높이는 대략 30m로 볼 수 있다. 현재 근정전 높이(기단 제외)가 22.5m 이고 지금 경회루 높이가 21.5m 인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높이이다. 그리고 경회루는 2층이고 경회루는 서총대의 높이의 약 2/3이므로, 《중종실록》의 저 기록은 서총대 3층 설을 뒷받침해준다.


[1] 하지만 반정 세력들이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했을 수도 있다.[2] '자'라고도 불린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의 7번째 문단 참조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