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31 00:28:11

창덕궁 봉모당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대보단
건무문 광지문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농포
소요암 옥류천
소요정
취한정
수복방 신선원전 진설청
괘궁정 취규정
재실
능허정
의효전 사가정 청심정 천향각
몽답정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존덕정
외삼문 폄우사 척뇌당
관람정
반도지
승재정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농수정
연경당 선향재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창덕궁 애련정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운경거 의두합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주합루
어수문
사정기비각 부용지 영화당 춘당대 서총대
부용정
요금문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수정전 가정당
습취헌 집상전
영모당
경복전 경훈각 징광루 함원전
청향각
의풍각 융경헌 대조전 흥복헌
수랏간 관리합
만수전 태화당 재덕당 요휘문 경극문 창경궁
경추문 보경당 선평문 양심합 여춘문 병경문
함양문
선원전 진설청 내재실 만수문 건중문 희정당 영안문
양지당 만안문 관광청 선정전 건인문
책고 인정전 관물헌 어휘문
봉모당 억석루 연경문 만복문 향실 선정문 성정각 보춘정 중희당 칠분서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예문관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삼삼와 승화루 한정당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영현문 전의사 취운정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이문원 검서청 약방 내삼청 광범문 내반원 낙선재 석복헌
훈국초관인직소 홍문관 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수강재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승정원 상서성 연영문 협양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인정문 +대청 공상청 누국
수문장청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일영대
금호문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저승전 낙선당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진수당 장경각 군옥재 춘방
수문장청돈화문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시민당 계방 등룡문
원역처소 사주문
단봉문 종묘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봉모당
昌德宮 奉謨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777년 (창건)
1857년 (이전 건립)
2004년 (복원)
파일:external/dunggu.com/changdeokgung115_6.jpg
<colbgcolor=#bf1400> 봉모당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clearfix]

1. 개요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역대 임금들의 글씨, 어진, 도장, 족보, 고명, 유고, 장지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2. 이름

'봉모(奉謨)' 뜻은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奉)한다'이다.# 모훈은 ‘후대 임금들에게 귀감을 줄만한 교훈’이다.

3. 역사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리고 부용정 서북쪽에 있는 옛 열무정의 이름을 봉모당으로 바꾸고 선대왕들의 유품을 보관했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을 옮겼을 때도 봉모당은 자리를 지켰다.
파일:동궐도 봉모당.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의 봉모당. 열무정 시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공간이 좁아 많은 유품을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857년(철종 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파일:동궐도 현재 봉모당 터.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 나온 현재 봉모당 일대. 붉은색 원 안이다.
1908년(융희 2년) 규장각 기구를 분과별로 나누면서 봉모당 관련 일은 전모과(典謨課)에서 담당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옛 소유재 터에 일본식 건물을 새로 지어 족보 종류를 뺀 왕실 자료를 보관했다.[1] 8.15 광복 이후 1969년 7월에 일본풍 전각을 철거하고 자료를 분산 배치했는데 그 중 일부는 창경궁 장서각에 두었다. 그리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으로 옮겼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4]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2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전체 실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 정면 외면에는 띠살을 달았다. 교창과 머름은 없다. 나머지 칸 외면은 전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2_09_21-P9214264.jpg}}} ||
<colbgcolor=#bf1400> 봉모당 북쪽 책고[5]
봉모당 서쪽과 북쪽에 각각 을 보관하던 책고가 있다. 책고는 맞배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며 출입문과 교창을 제외하고 전부 붉은 나무판으로 벽을 마감했다. 고막이벽 가장자리에는 구멍을 뚫어 환풍 기능을 하게 했다. 《동궐도형》을 보면, 두 책고 다 6칸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의 향나무로 인해 복원할때 서쪽 책고가 5칸으로 한 칸 줄었다.

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파일:봉모당 향나무.png
<colbgcolor=#bf1400> 봉모당 향나무[6]
파일:동궐도 향나무.png
《동궐도》의 봉모당 향나무. 초록색 원 안이다.
봉모당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봉모당 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로써 볼 수 있다.

수령을 700년 ~ 75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추정이 맞다면 무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한 후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모양이 일반 나무들처럼 곧게 뻗지 않고, 구부러져있다. 높이는 6m, 뿌리부분 둘레는 5.9m, 가슴높이 둘레는 4.3m이다.[7] 가지 역시 위가 아닌 수평으로 뻗어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 씩 뻗었는데, 동서길이 11.5m, 남북길이 5.5m이다. 단, 북쪽 가지는 현재 죽었고 남쪽 가지는 잘렸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하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었다.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이고 가지 일부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나무 자체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러진 가지는 왕실 제사 때 향피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1] 족보는 새 건물 보각(譜閣)을 지은 후 그곳에 보관했다.[2]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3]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4]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5] 사진 출처.[6] 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문화유산칼럼 〈조선왕조 500년을 함께 한 창덕궁 향나무〉.[7] 원래는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는 6.8m이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