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9 15:41:32

격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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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격쟁
擊錚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 백성이 에 들어가거나, 임금의 외부행차 시 이나 꽹과리를 쳐 직접적으로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하는 것이다. 글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상언(上言)이라 하였고, 행차시에 해당 상언을 수리하는 관리가 길가에서 민원을 걷어 이후 에게 올렸으며,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꽹과 징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관리가 이를 받아 적었는데 이를 격쟁이라 했다. 오늘날로 치면 국민청원과 비슷하다.. 다만 격쟁을 할려면 일단 관아에 고한 뒤에 형식적으로 곤장 몇 대는 맞는것이 차이점이다.

본디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으나 일반 백성들과의 거리감도 있었으며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였고, 영조때 되살아나기도 하였지만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았다.[1] 반면에 이러한 격쟁과 상언제도는 그러한 백성과 왕과의 거리감을 줄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격쟁은 성종대부터 기록이 나타나는데 신문고 제도의 복잡성에 학을 뗀 백성들이 신문고 대신에 비제도적인 방식인 격쟁을 이용한 것으로 수백년에 걸쳐 오랜기간 동안 격쟁이 이루워졌지만 입법화되지 않아 빈번히 이루워지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영조가 속대전에 격쟁을 임금에게 고할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명시하면서 격쟁은 제도화되었다. 특히 정조때 이러한 격쟁이 매우 활발했으며, 약 4천 4백여 건의 민원을 격쟁을 통해 직접 처리하였다. 평균 횟수로 따지면 정조는 한 번 행차시 50여 건의 민원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주로 밖에서 백성들의 민원을 수리하였고, 영조는 홍화문 근처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2]

일단 민원 수리가 확정되면, 평균 3일 만에 백성들은 그 민원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격쟁은 합법이었으며, 격쟁과 상언 제기의 계급 비율을 보면 평민천민이 과반 이상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양반도 격쟁을 많이 했다는 의미이다. 그 예로 추사 김정희가 있다. 그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나름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이후 격쟁이 난잡해지고 사사로운 개인의 송사까지[3] 궁에 들어와 격쟁을 거는 일이 빈발하자 철종때는 왕의 행차 시에만 격쟁을 수리하도록 규정을 변경했다. 그래도 동시대(에도 시대)의 일본에 비하면 매우 관대한 제도이다. 격쟁을 하려면 내용에 관계없이 일단 곤장은 맞아야되고, 무고로 밝혀지면 곤장 100대에 유배까지 갈수있었지만 그래도 들어줄건 들어주었던데 반해 일본은 쇼군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면 그냥 사형이었으니까.

2. 같이보기



[1] 이게 무슨 뜻이냐면.. 분명 신문고를 울려서 억울한 사정을 설명을 하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 해 놓고 정작 신문고는 궁궐 안에 설치를 해 놨다. 그런데.. 왕족들과 궁인, 궁녀, (왕의 소집을 받은)대소신료들을 제외하면 일반 평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2] 50년 정도를 재위한 영조보다 20년 정도 재위한 정조의 상언, 격쟁의 숫자가 갑절 가까이 많았다고 한다.[3] 오늘날로 치면 이혼이나 재산권, 경영권, 상속같이 민사소송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대통령에게 청원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