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
1.1. 상업
조선 후기 장시망과 상인. |
조선은 전기에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적 경제를 추구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내수 상업이 확대되어 화폐를 도입하고 세계무역의 활성화에 힘입어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고려 시대 수도인 개성에 존재했던 어용상인 제도를 그대로 본떠 새로운 수도인 한양에 시전을 설치했던 것으로 주로 정리 요약할 수 있다. 현대의 종로거리 양쪽이 바로 시전이 설치되었던 자리다. 이런 시전은 관공서와 서울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은 것이었다. 시전 건물을 설치하여 그곳에 입주한 상인은 조정에 상세를 내야했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실제로 그 발전이 매우 미비하며 그에 따라 기록이 극히 적기 때문에 연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동시대 세계사적으로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대항해시대로 표현되는 국제무역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조선의 상업은 발전하지 못한 편이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을 재검토하는 측에서도 조선의 상업이 이전 한반도 왕조들보다는 발전했다고 평할지언정 동시대 유럽은 물론 동아시아 타국, 즉 중국 일본보다도 상업의 발전 양상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조선 전기의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요인이 제시된다. 가장 흔히 꼽히는 이유는 조선 정부가 상업을 실제로 의도적으로 천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상인의 집안은 과거를 응시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금했다.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서울 시전 상인 외의 지방 상인 역시 정부의 탄압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육로로 돌아다니는 상인의 경우 매년 저화 8장을, 배를 가진 상인의 경우 큰 배는 저화 100장, 중간배는 50장, 작은배는 30장의 세금을 납부하게 했는데 저화 1장이 쌀 2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고세율인 것이며, 제일 자본과 규모가 컸던 시전상인들의 세금은 고작 매년 저화 4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하게 불공정했던 셈이다. 또 조선의 장터하면 으레 생각나는 정기시, 자유시장인 장시는 조선에서 불법이었으며,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이미 자연적으로 형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5세기 말까지 계속해서 단속, 처벌되었다. 이런 이유로 잉여생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상업 발전은 부진했다. 조선 전기의 장시는 잉여생산들의 거래보다는 농사를 망치거나 토지가 적어 생계를 잇기 어려운 소농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차린 것이었다.
조선의 상업 발전 미진의 원인으로 또 꼽히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도 지적된다. 원나라의 붕괴와 그로인한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이 붕괴, 명나라의 해금령과 일본의 전국시대 같은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조선의 상업이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 상업을 장악하여 굴러가던 원나라의 붕괴에 따라세워진 명나라와 조선의 유교 사대부들은 원의 붕괴에서 상업의 위험성을 느꼈고, 그들은 상업 대신 중농 위주, 자급자족적 정책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귀금속의 절대적인 부족이 심각했던 조선은 금속화폐를 유통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지적된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국제 무역의 축소는 설명할 수 있으나 조선의 내부 상업 발전의 미진을 설명하는데에는 부족하다. 일본의 경우 국제무역의 역량이 거의 없었던 11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이미 내수 상업이 발전하여 상인조합인 좌(座)가 형성되고 정기시가 있는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토지 매매 문서 등 대규모 거래 역시 중국산 동전으로 행해졌으며 농민의 세납도 동전으로 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총 국력이 조선 전기보다 딱히 낫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생산력이 부족해서 조선 전기의 내수 상업이 미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나라의 상업 붕괴로 인한 타격으로 사대부들이 상업의 위험성을 느꼈다 운운도 실제로는 여말선초 당대 문헌에서 비슷한 논조의 주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완전히 허무맹랑한 주장일 뿐이다. 또 저화 자체가 교초의 본을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 조선은 원의 교초 제도를 매우 좋은 것으로만 인식했고, 결국 실패한 것에서 보이듯 원의 교초 정책의 성공과 실패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반면교사로 삼지도 못했다. 학술적으로도 단 한 번도 논의된 적 없고, 오직 인터넷에서만 돌아다니며 논리만 그럴싸해보이고 근거는 전혀 없는 유사역사학적 주장이다. 유학은 고대부터 상업을 천시하는 이념을 가졌고, 여말선초 시기에 전파된 성리학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철저히 성리학적 이념으로 접근하여 상업을 천시했지, 원나라의 붕괴를 상업과 연관 지어 생각하거나 분석한 적은 없다.
또 귀금속의 경우, 귀금속이 상업의 선제조건이 아니라 상업이 발전했을 때 화폐로 사용할 귀금속의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잘못된 지적이다. 일본의 경우 상업이 11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해서 화폐경제가 활성되었으나 정작 광업 기술은 극히 미비하여 동전을 전부 중국에서 주조된 것에 의존했다. 그 와중에 명나라가 해금령을 때려버리자 심각한 동전 부족에 시달리다가 일종의 위조화폐인 사주전이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수백년이나 그런 문제에 시달리자 그냥 중국을 약탈해서 해결하거나, 동전이 아니라 쌀을 화폐 본위로 삼는 대응도 했다. 에도 시대의 고쿠다카가 그 흔적이다. 결국 일본은 회취법의 전파와 광산의 개발이 활성되어서야 화폐의 부족이 해결되었다. 즉, 자기네 동네에 광산이 있는지도 몰라도 상업이 일단 활성화되면 화폐경제가 생겨날 수 있다.
때문에 현재 경제사학에서는, 조용조 혹은 공납으로 불리는 현물위주수취 경제와 양반 계층 내의 광범위한 선물경제를 조선 상업 미진의 원인으로 꼽는다.공납의 고난은 나무위키에도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이라는 별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을 정도로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민폐를 주었으나, 그것 말고도 조선 사회에 심대한 문제를 끼쳤다. 일단 공납의 세율 자체가 제대로 규정된 것이 아예 없었다. 공납의 양이나 종류 자체가 각 고을에 공정하게 책정되지가 않아서 작은 고을이 큰 고을보다 더 많이 내야하는 일이나, 고을에서 나지도 않는 물품이 책정되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상소에 툭하면 나오는 일이었다. 또 공물을 수취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동원되기 싫었던 백성들은 일부러 자기 동네의 특산물의 생산을 줄이거나 숨겼다. 게다가 전세 등은 자연재해 등으로 손실이 나면 감면해주었으나 공물은 감면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한 동네가 재해를 입어 정말로 공납을 못하면 근처 고을에 부과했고,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공물이 사용되었다 해도 감면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세율이 낮았으나 현물 조세 형태를 통해서 실제 세율은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가장 거대한 수요를 만드는 정부가 자신들의 물품 수요를 공납으로 해결해버리니 시장의 가장 큰 지분이 박살나버린 것이다. 국가 다음으로 큰 수요를 만들 수 있었을 지방의 호족 유력자들 역시, 재지 사림이라는 형태로 국가 제도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시장을 형성하는게 아니라 반대급부 없이 수취해가는 입장이었다. 조선 정부는 사대부들에게 사여의 형식으로 각 지방의 공물들을 뿌렸으며, 지방관들 역시 정부에서 규정한 공물 이상으로 수취한 다음 자신의 친지나 중앙 정부의 연줄들에게 선물하는 사선(私膳)을 하곤 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쓴 글을 보아도 다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구하는데에 상인이 아니라 지방관 연줄을 만들어두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사실 고려 역시 국가 주도의 공무역은 존재했으나 민간 경제는 매우 미진했는데, 이 때문에 한반도사 최초의 동전을 주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활성화에 실패했으며, 고려 역시 이런 조용조 등 공납 수취 제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공납의 폐해를 단순히 관의 가렴주구, 탐관오리의 부패로 설명을 마칠 수는 없다. 현물수취제도를 경제학적으로 보면, 공급 자체가 몰수되는 상황에서 수요 역시 사라지니 가격이 낮아지고, 물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물품을 팔아서 이득을 보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오히려 극심한 손해를 보게되니 당연히 기피하게 되며, 공급자가 줄어든 산업은 결국 붕괴한다.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무리한 공납의 끝에 사람들이 도망가 마을이 붕괴되거나 마을 사람들이 손을 자르는 등 자해를 해서 공납을 안 바치려하는 등 공납의 폐단이 심하니 시정해야한다는 상소의 반복이 가득하다. 종이, 먹 등 문방사우에서부터 과일과 곡물 같은 농산물, 바다에서 나는 온갖 해산물, 양과 염소 등 목축업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폐단이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의 상업은 공납제를 대체하여 미곡, 포, 동전으로 납부하게 한 대동법의 도입 이후 극적으로 성장한다. 다소 늦고 별공은 그대로 있는 등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사상 최초로 유의미하게 상업에 대해 논할 정도의 발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1],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유통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 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다.
또한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상업을 천시하는 이념은 깔려 있었으나 현실을 무시해가면서 상업을 억압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고, 결국 타협하게 된다. 조선 후기들어 늘어난 인구로 인한 수요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물자의 순환을 요하게 되었고 조정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장시가 발달하게 된 것. 이런 자유로운 상인인 사상(私商)이 늘어나자 한양 도성 내에 금난전권이 주어졌다가 정경 유착 문제로 다시 폐지되기도 했고, 대동법을 포함해서 조세 운송 등에 민간 자본에 위탁하는 등 조선 후기에는 조정 차원에서도 상인과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가졌다.
물론 조선 역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빈말로도 조선의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여러 왕이 밀어붙인 화폐 정책도 번번이 실패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주둔한 명군이 은으로 식량을 구하려 했으나 그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조선의 상업과 화폐 경제는 미약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상평통보가 법정 화폐로 자리잡았고, 17-18세기에는 세계 무역 트렌드에 힘입어 은도 다소 유입되어 은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하멜 표류기에도 조선에서 은화를 자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효종 때는 세의 납부도 은으로 일부나마 대체하고 상평통보 도입 후 조세의 금납화가 진행된다.
하지만 고려처럼 조선 또한 제대로 된 화폐 경제가 완벽히 정착하기엔 문제점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도 삼베나 쌀 등의 현물 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은 1700년대 이후로 만성적인 현상이었으며, 조정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서 논의되었다. 오죽 심각했는지 청나라로부터 동전을 수입하자는 대책까지 논의되었고 청나라에 요청까지 했는데, 현대 입장으로 보면 화폐 발행 주권을 가져다 바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고 그러한 우려도 당대에 나왔으나 다행히도(?) 청나라 측에서 거부해서 무산되었다. 결국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삼국이나 남북국, 고려 같은 한반도의 다른 왕조들처럼 현물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화폐 가치를 귀금속이 부족했다는 원인을 찾을 필요도 없이, 조선의 화폐 정책은 동전만 따져도 동시대 중국, 일본이랑 비교해도 이상할 정도로 미진하고 조잡했다. 중국이랑 일본은 한창 이전부터 당오전, 당십전 등 고액 동전이 존재했다. 조선도 그것을 인지해서 당오전과 당십전 등 고액전을 주조하자는 논의가 숙종 시절부터 있었으나 흥선대원군 시절까지 200 여 년이나 고액전 발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당오전, 당십전 주장이 나올 때 반대측의 이유가 동전의 표면가 상의 유통이 많아지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주조차익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인플레이션 개념을 이해한 주장이지만 결국 이 이유로 동전의 발행량을 계속 통제한 결과 상평통보 항목에서 나오듯 동전이 국가 경제와 유통 가치의 극 일부만 커버하는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200여 년을 지나 조선이 처음으로 발행한 고액전이 그 유명한 실패 정책인 당백전이었다.
또한 조선의 상업은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생산성이 증가해서 잉여생산물을 거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되려 농지는 세종 시기에 정점을 찍고 농지는 확대되지 않는 상태에서 인구가 급증한 결과 1인 당 농경지 면적이 줄어들어 1인 당 생산성은 악화 일로였고[2], 자급자족 농업 경제의 생산성으로는 민중들이 먹고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생계를 위해 시장이 확대된 것이다. 실제로 장시에서 거래되는건 사치품이 아닌 농민들의 일상용품등이 대부분이었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빈농들의 생계를 위해 장시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기도 했다[3]. 상업을 단순히 먹고 남은 것을 파는 행위로 생각하기 쉬우나, 비교우위 항목에서도 나오듯 상업으로 인한 교환은 그 자체로 생산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후기의 모내기 확대도 1인당 경작지가 극히 줄어들어서 경작지 면적 대비 생산성을 높히기 위한 분투였다.
결론을 요약하면, 조선 시대는 전반적으로 동시기 타국 수준으로는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였지만 이전에 알려진 통설처럼 발전이 전무한 시대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2. 화폐
조선은 건국 이래 통화(通貨)를 정착시키려 했으나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패했다.태종 이방원 시기에 저화를 발행한 것이 처음이다. 처음에는 쌀 두 말, 상오승포 1필로 가치를 책정했다. 하지만 일상 거래에 사용하기에는 가치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 정부에서 저화를 통해 세금을 받는 품목이 한정적인 점, 종이라는 특성 상 약하다는 점, 무엇보다 국가에서 저화를 실제 품목으로 태환해주지 않아 그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에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심지어 조정도 저화로 받기로 되어 있던 세금 품목들을, 저화의 실질 가치가 떨어지자 쌀로 받는 것으로 바꾸는 등 조정 측에서조차 저화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후 세종대에는 조선통보를 발행하여 저화의 가치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쓰려 했으나, 조선통보의 발행량 자체가 극히 부족해 유통이 불가능했으며, 백성들이 저화가 아닌 조선통보만을 신뢰하자 저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조선통보 유통과 태환을 정지하는 등 운영 정책이 혼란스러워 결국 조선통보도 폐지된다. 이후 세조 시대에 전폐를 유통 시도하나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조선 위정자들을 지속되는 화폐 유통의 실패 원인을 시장 부족으로 파악했다. 서울의 시전 외에는 지방에 장이 없으니 백성들이 돈이 있어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니 지방에 장을 세워야한다는 건의가 이미 세종 대에 나왔으며 세종도 긍정적으로 답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성종 대에는 지방 경제가 성장하여 장시가 곳곳에 자연발생했는데 신숙주는 이에 대해 지방 시장을 세우고 화폐를 유통할 천년의 기회라며 건의했으나 성종은 다른 사림들의 건의대로 장시를 탄압하는 방향을 잡으면서 화폐 유통은 시도하려는(...) 모순적인 정책을 시도하여 결국 성종 조에도 실패하며, 그 후 왕들도 장시 탄압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화폐 유통에 대해도 무관심했다. 심지어 성종이 그나마 다듬어 놓은 공납제도 이후로 점점 해이해져 수탈이 극심해질 지경이었다. 조선의 자생적인 경제 성장에 조정은 발을 전혀 맞추지 못했다.
결국 조선 전기 동안은 법정화폐 유통이 실패했으며, 그 대신 조선에서 통화 역할을 대신했던 주요 상품은 베[4]와 쌀이었으며, 포화(布貨)로서의 베는 다섯 새 굵기의 섬유로 짠 중등품인 오승포(五升布)가 기준이었다. 조선에서 화폐가 정착하는 과정은 상평통보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어찌되었든 조선의 이와 같은 화폐 유통 정책은 정유재란·병자호란과 같은 외침, 사회 경제 발전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 정책의 불합리한 운용 등이 직접적·간접적 원인이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0년대에는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강화·교동(喬桐)·풍단(豊湍)·연백(延白) 등 인근 지방에서 동전이 원활히 유통되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국경과 인접하여 국제 무역이 발달한 의주부·안주목·평양부 등지에서도 동전은 통용되었다. 그리고 1670년대 말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화폐 경제의 확대 보급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6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물품 화폐와 칭량 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 사회에 명목 화폐인 동전이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의 유통 기반을 이룩했다. 동전이 초기의 유통 보급 단계를 지나 일반적 가치 척도·교환 수단·지불 수단 및 가치 저장 수단 등 제반 화폐 기능을 발휘하게 되자 호조 등 중앙 관서와 지방 관청, 그리고 각 군영의 비축(備蓄)과 수입 지출의 화폐화 비율(貨幣化比率)이 높아지고, 소작료·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다. 또한,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高利貸資本)이 보다 유통 성향이 큰 화폐 자본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토지·노비·가옥·가축 등에서부터 시장의 일용 잡화에 이르기까지 동전을 매개로 하여 거래가 이루어졌다.
1720년대 이후에는 북쪽으로 회령, 서쪽으로 의주부, 남쪽으로 동래와 제주도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는 등, 유통 영역은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 인식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1730년대부터는 상평통보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 화폐 유통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어, 고액전(高額錢)을 주조, 유통시키는 문제와 함께 금화·은화를 주조하여 동전과 병용하자는 주장이 지식 계층에 의하여 제기, 논의되었다. 181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약용(丁若鏞)은 근대 금·은본위제와 근사한 화폐 제도의 개혁 방안을 구상, 제시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악화(惡貨)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함으로써 심각한 화폐 제도 내지 유통 질서의 혼란이 있었지만, 마침내 조선 왕조의 전근대 화폐 제도, 즉 단순 소박한 단일 법화 유통 체제는 극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동법을 유지한 결과 세금 납부를 위해서라도 미곡 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지방에서는 여전히 물물 교환이 행해졌다. 실무 단계에서는 세금 납부를 동전으로 받는 관행인 도결이 시행되었으며 이 조치는 초기에는 농민들에게 편리하다고 하여 환영받기도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폐단으로 인식하여 계속 금했다.
또 조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 청, 일본과 은 거래를 활발히 했으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것이 경제 체질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상평통보의 통화 단위는 문(文)이었다. '냥'이라는 단위가 워낙 많이 사용되어서 통화 단위가 냥이었다고 착각되는 경우가 많으나, 10문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으로 통용되었다. 후에 대한제국 시기에 전환국이 설치되어 백동화가 주조됨에 따라 통화 단위는 원(圓)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여 일본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1.3. 농업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등 해외 작물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조선시대 농업이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것은 평야와 늪지, 원시림 등이 처음으로 농지로 개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전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 농업의 주 입지는 평야가 아닌 산 바로 아래의 구릉지였으며, 평야들은 대체로 천택(川澤), 즉 갈대나 억새들만이 자라는 늪지로 개간되지 못한 땅이었다. 숲 역시 여말선초 시기에도 벌목되거나 개간되지 않아 조선 전기까지도 원시림의 거대한 목재를 이용한 건축이 가능했다. 통일 신라 시기에는 토지의 90% 가량이 원시림과 개간되지 않은 평야고 10% 미만만이 경작지였던 것으로 보이고, 고려 시기에도 여전히 비슷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반도 국가들의 수리 기술의 미비로, 고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한반도 국가들의 수리 기술과 시설은 오직 제언(堤堰) 즉 저수지로, 둑을 쌓아 물을 모아두는 시설이었다. 백제 시대에 벽골제 등 고대에 이미 거대한 저수지가 만들어져서 강력한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제언은 소모되는 노동력에 비하면 그다지 효율적인 시설이 아니어서 별로 많은 농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심지어 저숙련 노동자인 농민들을 부역으로 동원해서 쌓는게 보통이던 한반도의 특성상 흙과 나무로 축조되어서 물이 닿으면 쉽게 약해져 무너지는 일도 많았고, 황당하게도 수구(水口)를 만들지 않던 사례도 자주 나타났다.
조선시대에는 천방(川防), 즉 보(洑) 건설 기술이 널리 퍼진다. 현대의 보는 더 많은 기능을 기대하고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지만, 조선시대에 천방을 짓는 주 목적은 강물을 막아 옆으로 돌려 농지에 물을 대는 것이었다. 세종과 문종과 성종은 천방의 건설을 통한 개간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기존의 천택지를 논으로 개간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수령의 평가 기준에 천방의 건설과 관리는 포함되지 않아 수령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대신 천방의 건설에 수령의 허가가 필요 없게 허용하자 민간에서 건설하는 보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보는 저수지보다 관개 면적이 6~7배 가량 넓었다. 이런 새 수리 기술들 역시 마찬가지로 저숙련 된 농민들이 쌓아 쉽게 무너졌다거나 타 문명에 비해 상당히 늦게 나타났다는 점 등은 있으나 신기술로 인해 사회가 급격히 변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대 후반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늘어 소작제가 일반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농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은 세금에다 소작료까지 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에 실학 같은 양민의 생활 형편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등장한다. 특히 정약용, 이익, 박지원,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등은 지주를 축소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토지를 지주로부터 농민에게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학은 조선에서 주류가 아니었고,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간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조선의 농업 생산성이 시간이 지나며 꾸준히 발전했을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최신 연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17세기 말에 정점을 찍었다가 구한 말 최저점을 찍을 때까지 꾸준히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농업생산성이 절정에 달했던 17세기 말에는 한 마지기에서 무려 40~50말을 수확했는데, 한 마지기가 한말의 씨를 뿌리는 넓이이니 쌀 한알을 심으면 50알을 수확했다는 의미가 된다. 영국은 산업혁명 직전의 농업혁명을 겪고도 1850년대에 한 알에 25알 정도 수확한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생산성이었다. 농업생산성 추계를 위해 지주 사족들이 마지기 당 얻은 지대를 통해 계산했는데, 17세기 말 이래로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며, 최악의 시기에는 한 마지기에서 10말도 수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후속 연구들도 최고점과 최저점의 시기나 생산성에 대한 계산이 다소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해도 조선 후기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는 것을 반박할 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계량적 역사연구는 한국사에서는 비교적 근래에 나타난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나, 조선 말기 일어난 농민들의 생활 수준 감소와 기근의 일상화, 잦은 농민 봉기 등 사회 붕괴 및 조선의 쇠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참고로 결국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지는건 8.15 광복 이후다. 북한에서는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해 버렸고, 이후엔 공산주의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협동 농장 또는 집단 농장의 형태로 바뀐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였던 남한에서는 지주로부터 농지를 구입한 뒤[5] 농민에게 장기 분할 납부의 방식으로 팔아서 분배했다. 거기다가 6.25 전쟁으로 지주고 뭐고 평등하게 박살나서 소작도 아작났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작은 불법이다. 그것도 그냥 불법도 아니고 헌법에 금지로 못 박아놨다.
어찌되었든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조선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건국 무렵 550만~7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9세기 말엽에는 약 1700만 명 정도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 가량 인구수가 폭증했다.조선시대 인구 변동 서기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6],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쌀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1.4. 광업
조선 초기에는 광산 개발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후기로 넘어오면서 광산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당시에는 덕대를 두는 등 조선에서 자주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외국에 광산에 대한 경영권을 넘겨주고 그들에게 광산을 개발하게 했다.[7]
2. 영토·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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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 |||||||||||||||||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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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慶尙南道 | 1등군 | 동래東萊 진주晉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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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平安北道 | 1등군 | 의주義州 강계江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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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咸鏡北道 | 1등군 | 경흥慶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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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등군 | - | }}}}}}}}}}}} |
1861년(철종 12년) 조선의 행정구역. |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이미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8])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특정 국가들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야인들의 영토였었다. 지금 현재 남북한의 영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유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토 확장은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3. 사법
조선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국가로, 율령(律令)에 기초하여 제도적이고 계량적인 통치를 꾀한 성문법주의 국가였다. 조선의 법률은 중국의 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 '대명령(大明令)' 및 '대명회전(大明會典)', 청나라의 '대청률례(大淸律例)'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다만 성문법이 있었다고 해서 법치국가인 것은 아닌데, 근대적인 법치 국가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법의 지배원리)를 말하지만, 조선은 이념상으로는 왕이 '법으로' 지배하는 국가였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9].조선의 왕은 법을 준수하는 자리였지, 법에 복종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므로 법치 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가 동시대 어느 나라와 견줘도 잘 돌아갔다. 다만, 이는 동시에 조선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자 모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국왕에게 무한한 권력이 주어지는 체제인데, 실질적으로 강한 신권이 왕권을 제약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있지만, 이는 왕권을 제약한 요소인 동시에 국왕권과 신권이 무한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10].
3.1. 소송제도
조선의 쟁송제도 | |||
신문고(申聞鼓) | 상언(上言) 격쟁(擊錚) | 민사소송 사송(詞訟) | 형사소송 옥송(獄訟) |
조선에도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존재했다. 자세한 것은 상기 틀의 각 문서 참조.
4. 과학
자세한 내용은 과학사/한국/조선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4.1. 문헌·활자·인쇄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덕분에 당대의 시대상과 정세, 각종 사건과 국가 상황을 실시간으로 매우 세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고 있다.[11] 또한 전대인 고려 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12]4.2. 발명과 발견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와 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 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 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한국계 국가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의 과학이 유입되어 실학자들에 의해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성호사설 천지문 편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이를 부인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4.3. 건축·토목
조선의 건축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다양하며, 정교하다. 단순한 일자형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다. 후기로 가면 만성적인 목재 부족에 시달려 휘어진 나무 줄기마저 건축에 적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상류층에서는 귀한 모과나무 등을 모양 그대로 집 기둥에 써서 자신의 부를 사치스럽게 과시했다.왕궁, 사찰 같은 대형 토목 건축은 목재 부족으로 건축물의 규모가 작아져, 예를 들어 조선 왕실건축 중 최대 규모인 경복궁 근정전이나 경복궁 경회루는 고구려의 안학궁 정전이나 신라의 황룡사 금당에 비해 좁으며, 다층 건축도 법주사 팔상전 등이 있으나 수적으로, 규모상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불교 사찰의 경우 더이상 불교가 국교가 아니라 불교 사찰은 그 세가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며, 왕궁은 개별 건축물은 작아졌지만 대신 궁의 범위를 넓혀서 공간상으로는 더 넓고 복잡해졌다. 민간의 가옥은 더 발달한 기술과 큰 규모를 갖추었다. 당연히 2층 건물도 있었다.[13]
그러나 서민 건축에 있어서는 커다란 진보가 있었는데, 이전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도성인 개경을 포함해 일반적인 서민 주거는 수혈식 주거, 즉 움집이었으나 조선 시대부터는 전기 동안에 서민 주거가 초가집으로 변화했다. 한양 등 도성 지역은 세종 대에 이미 서민 주거가 초가집으로 변화했고,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무렵에는 도성 밖 촌락들도 움집이 사라지고 초가집으로 변화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 다소 축소되는 경향은 목재 부족도 원인이긴 하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토목공사를 제한했다는 점, 온돌 문화의 보급으로 인해 다층건물의 건설이 어려웠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어시설인 성과 관련해서도 많은 부분이 진일보했는데 특히 이러한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원화성으로, 사실상 조선의 모든 기술을 집약해 만들어낸 걸작이다. 그 외에는 수도방위체계의 일원인 남한산성이나 《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모두 세계유산이거나 그 후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4. 교통
4.4.1. 도로
조선 10대 대로 | |||||||
↖의주로 | 경흥로↗ | ||||||
←강화로 | 한 양 | 평해로→ | |||||
(↙수원로) | 봉화로↘ | ||||||
↙충청수영로 | ↓제주로 (삼남대로) | 통영로 ↘ | 동래로↘ (영남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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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로 ||<-6> ||<#ddd> ↗
경흥로 ||←
강화로한
양→
평해로↙
수원로↓↘
봉화로↙
충청수영로↓
제주로
(삼남대로)↘
통영로↘
동래로
(영남대로)
일단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를 기본으로 지역마다 고을마다 연결 도로가 다 있었으며, 관련자료조선의 도로망 지도 10대 대로는 경국대전부터 속대전 등 법정 기준이 말 그대로 사신 행차가 가능한 대로라서 수레 3대가 연달아 지나갈 수 있어야 하는 등 그 규격 또한 정해져 있었다. 특히 산지가 많은 중북부는 이런 역사적 대로를 현재에도 거의 비슷하게 따른다.[14]
다만 시대별, 기록별 내용이 달라서 시중의 서술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일단 조선 초부터 쭉 이어지는 6대로(의주로, 경흥로, 평해로, 동래로(영남대로), 제주로(삼남대로), 강화로)가 베이스로 취급을 받고, 나중의 도로고도 이렇게 설명한다. 19세기 초에는 9대로, 19세기 말에는 10대로로 늘어났다.※ 그중 9대로가 국가에서 펴낸 백과사전 증보문헌비고에 대놓고 나와서※ 국가 공식에 가깝고 위 지도도 이를 따른다. 현재도 실제 길이 어땠을지 연구 중이다.[15]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서 후기 실학자들이 도로에 대해 지적하고 수레 사용이 저조한 것을 비판한 바가 있다. 실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대로 외에는 수레 하나조차 다니기 좁았던 걸로 보인다. 이러한 기술적인 측면은 조선 조정에서도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제도적인 부분은 상당히 많이 무시되었으나 기술적, 물적인 부분은 정부 차원에서 적극 수용하여 조선 후기가 되면 수레의 사용률이 늘어나고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기도 한다. 이로인해 조선의 도로 상황이 동시대 타국에 비해서 특별히 뒤떨어졌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전근대 육상 수송은 기술적인 장벽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인식만큼 '혁신적'인 개혁이 일어날 수가 없었고 당시 세계 최선진이던 유럽조차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도로고 문서의 반박에 나오듯 선박 수송이 조선에서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동양은 물론 서양조차도 19세기 전까진 '돌로 깐 포장도로'라는 걸 거의 안 만들었다. 괜히 로마시대 도로가 유명한 게 아니다. 동시대 중국조차 '남선북마(南船北馬)' 라고 하여 화북에서 수레가 달리는 도로가 많았지만 그조차도 대부분의 도로들은 판석 포장이 아닌 그냥 비포장 흙길 도로들이 대다수였다.
고대 로마의 도로를 인용해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로마 상업 발전의 상당한 지분은 지중해를 통한 수로에 있다. 육로로 10 리구아를 수송하는 비용보다 이스라엘에서 스페인까지 해로로 수송하는게 더 쌌다고 할 정도[16]다. 더 정확히는 철도 개발 이전 전근대 시대는 항상 수운의 수송력이 육상 수송보다 훨씬 우월했다. 이건 서양이고 동양이고 로마고 중국이고 극복할 수 없었던 기술적, 물리적 한계다. 당대의 일본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우마를 주로 활용하기보다는 육상 물류는 대부분 사람들이 짊어지고 다녔으며, 물류 유통의 대부분을 세토내해 및 바닷길이나 오사카 운하 같은 수운으로 대부분 해결했다. 중국이 무리해서 대운하를 뚫은 이유도 이것이다. 18세기 서유럽도 또한 북유럽 평원, 특히 라인 강 하구에 매우 많은 운하를 뚫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유럽 각국들은 기차의 발명 직전까지 상업 유통을 위해 운하 개발에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
이처럼 19세기 영국에서 매캐덤 도로(쇄석포장) 포장법을 개발하기 전까진 서구 대부분의 도로들은 비포장 흙길이었으며 다른 쇄석 포장법 적용을 넓게 살펴봐도 영국이 18세기에 그나마 좀 깔기 시작했지 다른 나라들은 그런 거 없이 그냥 마차들이 흙길을 달리면 그게 도로가 되는 환경이었다. 그나마도 매캐덤 도로는 말 한마리가 수레 1톤을 끄는 수준을 넘지 못했지만 운하에 바지선을 놓고 말로 끈다면 30톤을 수송할 수 있었다. 국가적으로 포장도로를 대대적으로 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산업화 이후 미국에서 자전거가 유행한 뒤다.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다른 국가에 비해 도로를 유지하기 더 힘들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19세기 초 유럽조차도 대부분의 도로가 겨우 비 한 번에 진흙탕 뻘로 바뀌었을 정도로 도로 관리 상태는 매우 열악했으며[17], 이 문제로 보병 이동 속도는 하루에 15~20Km 정도에 불과했다. # 이 이동 속도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 명군, 일본군의 이동 속도랑 별 차이가 없다. 즉 실제로 동시대 다른 나라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참고로 현대 목전인 일제조차도 식민지 조선의 도로망을 그닥 늘리지는 않았는데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기존 도로를 포함한 전체 도로의 길이를 뜻하는 도로망 연장의 경우 1921년 23,642km에서 1938년 27,878km로 별로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이미 존재하던 도로들을 근대식으로 개수 완료한 도로의 길이를 의미하는 기성 연장만 1921년 14,743km에서 1938년 23,679km로 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일제조차도 기존 도로의 개수만 많이 했을 뿐 새롭게 더 도로를 연장하거나 크게 늘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로망 연장 측정 시작이 1921년이고 이 시기 도로 길이가 대한제국 끝 무렵이랑 큰 차이 없었다고 보여지므로 일제가 도로 연장보다는 철도 위주의 새로운 교통망 구축에 더 관심이 있었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수레의 사용이 저조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일단 소가 끄는 달구지도 수레이며, 조선을 포함한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 화북 지방이나 유럽 국가들 만큼 민간에서도 수레를 대량으로 쓰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말 개체수의 부족이 있었다. 일단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 화북 지역이나 유럽처럼 마차들을 많이 운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만큼 말의 개체수가 충분히 충족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의 지형상 평야 지대는 굉장히 적으므로 말들을 대량으로 사육할 만한 거대한 말 목장들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소를 말 대신에 사용하기에는 일단 한반도에서 소들은 대부분 농우로서 농사를 돕는 데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무엇보다 소들은 말만큼 빠르지도 못하고 생각한 것만큼 힘이 더 좋지도 못하다. 거기다 한반도에서 말들은 그나마 기병 전력으로 사용되는 개체들을 제외하면 민간에서 사용할 만한 수량은 또 그만큼 더 줄어드니 한반도에서 마차를 대량으로 사용하기에는 근본적인 말 개체수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수레와 육상 교통이라는 단편적인 잣대만을 기준으로 조선의 교통망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4.4.2. 수운
한반도의 기후나 자연 환경 등 여러 이유들로 인해 조선의 교통은 육상 도로 보다는 수운 위주로 계속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이 육상 교통을 제대로 키우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필요가 없으니까. 육상 교통을 몇 배로 발라버리는 최강 효율성을 가진 수운을 이용하면 되는데 굳이 도로를 뚫어야 할까?[18] 이미 조선 왕조는 고려 때부터 발전한 수운, 조운로를 수백 년에 걸쳐서 고차원적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이미 18세기부터 조운선의 적재 한도는 1000석을 넘어섰으며, 일부 상인들은 2000석 수준의 조운선을 건조했다. 대량의 수운 교통은 자연스럽게 전국 연안 지역의 발전을 불러와 접안 시설, 유통업, 금융업, 중개업, 창고, 숙박업이 민간 자본의 투자로 조성되어 해당 지역이 주된 상업 중심지로 변화했다.#
조선이 한성에 수도를 둔 이유도 임진강, 예성강, 그리고 중부 지방 전체를 포함하는 하계망을 지닌 한강과의 접근성이 우수한 곳이 한성이었기 때문이다. 산이 많아 도로를 건설할 수 없던 조선 입장에서 한성은 중부 지방 전역
의외로 조선의 상업은 대중들의 생각보단 발달한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도시가 작았고 농민이 많았지만 개항기 면업을 통해 확인한 조선의 면업은 1780년대 영국과 비슷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민 중심이고 그에 따른 시장이 발달했으며 오히려 길드 같은 조직도 강고하지 않아 각지의 산물이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 그 내실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즈음부터는 농본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자생적으로 상업과 시장이 (동시기 타국보다 부족할지언정) 이전보다 발전하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19]
5. 풍습
5.1. 혼인제도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排佛揚儒策)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5.1.1. 일부일처제 확립
조선시대 들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발견되던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적서(嫡庶) 구분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본처'는 철저히 하나만 두게 되었다. 아내 외의 여성은 정식 혼인관계가 아닌 '첩제'으로 제도화되었다.1413년(태종 13년)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사실상의 다처제 관행은 그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추론되며, 다처제 관행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중종시대 이후의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김유신 같은 상류층에게도 퍼져있던 연애혼은 조선 말기까지 줄어들어 중매혼이 대세가 되었다. 이는 사회제도가 엄격해지면서 심해지면서 이성끼리 물리적으로까지 서로 만나기 힘들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
동시대 다른 나라가 그렇듯 혼인은 집안을 위한 것이었지 혼인 당사자의 행복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혼 풍습도 성행했다. 개화기가 되면서 이런 풍습은 구습으로 취급되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지만, 당시의 가정 제도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결혼을 통해서만 아이를 낳는다든가 학업을 사회성 못지 않게 중시하는 풍습, 결혼의 허가나 그 생활에 결혼 당사자의 부모가 깊게 관여하려는 풍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사회상 중 가장 뚜렷하게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다. '시집', '장가', '상견례'라는 용어도 조선시대 풍습의 흔적이다.
고구려의 서옥제가 변형되어 신사임당의 시대까지 살아남아 '남귀여가'라는 신부집에서 아이들이 10살 정도가 될 때까지 혼인생활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중국 풍습을 숭상하여 신부집 대신 신랑집에서 식을 올리라는 친영제를 도입하기 위해 수백년간 공을 기울였다. 그 결과는 신부집에서 식을 올리되 혼인생활은 신랑집에서 하는 것이었다. 장남은 부모를 모시고, 차남부터는 분가하는 식이었다. 재산 분배가 남녀균분상속에서 남성 위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신부쪽의 경제력이 약해져 신부집에서 혼인생활을 하는 기간이 짧아진 것이다. 이 풍습이 산업화가 되며 남자가 집을 해온다는 풍습으로 바뀌게 되어 한국의 결혼문화에서 상당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
5.2. 생활 수준
근세 일본과 중국(명과 청)의 경제적 발전과 비교했을 때 전자의 발전은 상당한 정도이나, 이것이 생활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조선의 서민 문화가 동시대 다른 지역들에 비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단순히 서민 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백성들의 삶의 수준 또한 문제가 있었을 거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한국사 연구 <조선시대의 끼니>를 보면 조선 사람들이 가난뱅이도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고 류큐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 풍속에 늘 큰 사밭에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식탐이 심해서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쓰인 외국인들 전문기에서도 조선 사람들의 큰 결점은 대식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를 참조. 이 밖에도 대일 무역의 주요 수출품이 쌀과 인삼인 반면에 수입품은 은이나 동전 재료 및 군수 물자인 유황과 구리인 점, 고율의 조세로 마비키가 만연했던 동시기 일본과 달리 일상화된 영아 살해 풍습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곡물 소비 측면에서 생활 수준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근세 조선의 일인당 곡물 소비량이 과연 우월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영훈의 <한국경제사>를 참조하면 조선의 곡물 생산량 증가는 일본과 중국 선진 지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평균 신장을 가지고 영양 섭취량을 논하기도 한다. 당대 조선인들의 평균 키는 당시 일본인들보다 최소 약 3cm에서 최대 약 6cm 정도 더 컸는데 이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평균 키 차이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기사 자료 하지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생활 수준이 높았을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일제강점기에조차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평균 키가 컸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키 차이는 영양 섭취량보다는 그냥 유전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실제로도 당시 일본이 조선인 징집 및 징병을 위해 전국적인 통계를 매긴 결과가 있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즉 북방민족과 피가 많이 섞였을 확률이 높을 수록 평균 신장이 높게 나왔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남한과 일본은 영양 섭취가 충분해지고 북한은 경제 붕괴로 기본 영양 섭취도 못하게 되어서 북한<일본<남한 순으로 평균키가 정립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식주를 기반으로 한 생활 수준의 판가름에 대해서는, 적어도 서민 생활만큼은 주변국에 대해서 뚜렷한 우열을 느낄 만한 차이는 없었다는 것. 사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전 세계가 다 그랬다. 서구 국가의 평균 신장을 봐도,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점부터야 서민을 포함한 평균 키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국 역시 1950년 이후에야 서민을 포함한 평균 키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 직전 프랑스가 조선에 비해서 1인당 GDP가 고작 2배 높았는데, 그나마도 상승치의 대부분은 국가의 군비나 관료 행정 비용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민 생활 수준에서 특별히 잘산다고 느낄 부분은 적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징집된 병사의 키가 고작 164cm인데, 20세기 초 구한말 조선의 남성 평균 키가 161cm 정도인 걸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1]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 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2]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4_0020_0020_0020_0010[3]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28_0020_0030_0010_0020[4] 나중에는 목화의 대중화와 생산량 / 교역의 증가로 면포로 대체[5] 신생 국가가 돈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유가 증권의 형태로 사들였다. 때문에 지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곧이어 일어난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력에서 자본가들에게 크게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는 21세기 들어 지방사회 소멸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다.[6]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 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7] 물론 이로 인해 얻는 이득은 경영권이 있는 외국이 가져갔다.[8]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9]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사헌부과 사간원이라는 존재였다. 왕이 자신의 임의대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적법성을 따져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왕 역시 GG 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10] 특히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한 중종반정 이후 왕권은 급격히 쇠락해졌는데 '왕권의 회복=절대 권력의 인정=폭군화'란 논리로 신료들이 왕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마저 견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좌절감을 겪어야 했으며 신료들은 왕의 왕권 수호 및 회복 시도를 '제2의 연산군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막았다.[11] 같은 시기 명나라의 공식 국가 기록물인 대명실록의 양이 1,600만 자 정도인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그 3배에 달하는 4,965만 자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무려 2억 4,250만 자에 달한다. 심지어 승정원일기는 두번의 전란으로 절반 가량이 소실되어 인조 이후의 기록만이 남아 있음에도 저 정도 분량이다. 가히 기록의 나라라 부를 만하다.[12] 원래 관리들이 보던 나라일이 적힌 신문인데 매우 날려쓴 글씨인 한문 초서체로 적혀 매우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를 정자체로 바꾸거나 한글 혼용으로 바꾸어 팔기 시작했고 글을 아는 백성들이 읽기 시작해 인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선조가 이에 분노하여 폐간되었다.[13] 창덕궁 징광루, 덕수궁 석어당, 도시 지역의 상점 건축들[14] 경의선, 경원선은 의주대로, 경흥대로를 따르고 경강선, 영동고속도로는 대관령을 지난다. 그외 경부선, 호남선 등도 삼남대로 일부가 겹친다.[15] 보도 여행에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둘레길 문서 경기옛길이 대표적인 사례.[16] 하버드 중국사 진한[17] 지금도 동유럽은 주기적으로 라스푸티차에 시달리고 최근 러우전쟁에서도 전황에 많이 영향을 줬다.[18] 거기다가 뚫으려고 해도 조선의 지형은 도로를 발전시키기엔 썩 좋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맹수도 득시글거리는건 덤.[19] 이런 사회의 변화는 상업을 진흥시키자는 북학파 계열의 실학과 상업을 억누르고 농본주의를 강화시키자는 계열의 실학으로 나뉜 당시 사회상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6. 문화
- 한국전통문화 문서도 참조.
귀족, 불교 예술 위주의 문화가 발전했던 전대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사치를 경계하는 건국이념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화려함을 배제하는 기풍이 형성되었다. 권력을 가진 상류층 역시 청백리를 숭상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국가적 중요 건축이자 유교 건축의 정점인 종묘의 단청은 단색 가칠단청으로, 부와 권력에서 거리가 멀어진 일개 지방 사찰인 해인사 대웅전에 쓰인 화려한 금단청보다도 훨씬 수수한 단청을 선택해 칠했다.
이를 화려함이 사라지고 단순, 수수해졌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기풍은 막연히 화려한 것을 배척하고 수수함을 좇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이전부터 이후까지 한국 왕조들의 풍조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는다.”였다. 예를 들어 종묘만 봐도 단청과 장식을 절제했음에도 극도의 고급스러움과 격을 표현했다.
그래서 전대 국가들의 권력층과 달리 건물의 규모나 금 같은 귀금속의 적극적 사용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화려함과 섬세함까지 찍어누르는 식으로 배제하진 않았다. 민간에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금지하긴 하지만 절이나 관영 건축은 이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건축이나 공예는 이전 시대와 비교해도 섬세함과 화려함에서 더 발전한다. 대중들이 막연히 조선을 수수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을 드라마, 교과서나 인터넷으로만 접하고, 그 외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보다 훨씬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후기에 와서 서민들의 문화가 크게 발전했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전통 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때 생긴 것들이 많고 특히 탈춤, 판소리, 민화등 서민들의 문화가 많이 발전했다. 실제로 바로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의 사치품 제작과 또 그걸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 귀족들이었고 조선 시대는 민화 등 서민 미술이 크게 발전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은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문화 면에서 오히려 고려 시대보다 더 발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는데,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려는 욕구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도 역시 지속적으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조선 후기의 기득권층이었던 서울 북촌에 거주하던 벌열 가문 경화세족들이 그 주역이다. 당시 슈퍼갑 부자들 사이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청나라 문화가 유행해 활발히 중국 문물을 수입하며, 서양이나 중동, 인도의 문화 역시 부수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은 사치를 지양했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선 후기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가세가 하늘에 뻗치던 당대 명문가들이 향유한 문화 양식은 매우 화려하다.
조선의 유물은 미디어에 잘 노출되는 편이 아니라 사극으로 한정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족하다. 도자기가 그나마 유명하며, 칠기나 병풍, 부채, 군사 유물 정도가 한정된 인지도를 가진 편이다.
7. 계급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20]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21]이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22]
그리고 신분 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 층 개방적이었다.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23]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24]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 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 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 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명예직이나 하급직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급제한 것만으로도 출신 지역에서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 데다,[25] 여타 문명권에서 이런 법으로 규정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설령 보여주기용일 지라도 드물었다. 다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는 등 소수의 가문에 과거 급제자가 몰려 있었으며 1789년 당시 전 인구의 2%를 차지하던 서울에서 43%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과 가문의 쏠림 현상이 발생했다.[26] 이것은 교육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인 현대와 달리 과거 합격을 위해선 필요한 경전을 구입하기 위한 재산과 이를 공부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출제 경향을 위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도 이러한 법률 가문이나 정치 가문 등의 명문가들이 있기는 하나 과거 급제자가 수도권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은 조선이 오히려 지금보다도 격심했던 게 사실이다.
또한 상민이 문과를 급제하여 바로 양반이 되는 매우 힘들었던 것에 반해 무과라는, 좀 더 입관하기 쉬운 시험이 있었다. 무과에서도 유교 경전 시험이 있긴 했는데 문과처럼 깊게 파는 걸 요구하진 않았고, 그나마 문과에 존재하는 서얼 차별도 없었다. 다만 승마 시험이 있었기에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산은 꽤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제약이 있던 건 사실이다.[27] 이렇듯 과거 제도를 통해 소수의 귀족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기도 했지만 새롭게 인재가 등용되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했다. 에드워드 W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과거 제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성의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한편, 조선의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자, 신분 체계에 변화가 생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관료를 의미했던 양반이 차츰 세습 계급에 가깝게 변모해 간 것. 과거에 응시할 때 재산과 관직이 있는 양반 가문들 및 지주층이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은 세습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으며, 찍어내다시피 한 공신들을 축으로 이루어진 훈구파 성립은 이런 "양반의 계급화"를 고착화시켰다. 관직이 없어도 공신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 그 결과 양반의 자손은 관직이 없어도 양반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고, 이것이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는 지방의 사족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양반은 점차 하나의 지배 계층으로써 고착화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제도적으로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양인, 천민이라는 2계급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계급의 반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반'이 지배 계급으로의 위치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의 폭이 넓어졌다.
관료를 일컫던 용어였던 양반은 세습 계급화되어 상민 위의 지배 계급으로 고착화되었으며[28], 조선 전기에는 총인구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 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년~ 1822년)의 풍속도를 보아도 전형적인 양반 - 평민 - 노비의 모습이 보이는 등 실제 양반이라 할 수 있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은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성 호적을 살펴봤을 때 서얼, 잔반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1910년의 호적보다는 많은 10% ~ 20% 내외로 추정한다.[29] 조선시대는 서얼 계층이 양반으로 편입되고 부유한 상민들이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의 폭이 넓어지는 등 빈부에 따라서 제도상의 신분 간 편차와 차별이 완화되는 조짐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비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삼국 시대에 전 인구의 10%에 지나지 않던 노비는 고려 말을 거치면서 전 인구의 30%가 넘게 되었는데 양란을 겪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노비 비율이 전 인구의 최대 30% - 4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조정의 양인 증가 정책 등으로 신분제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노비의 비중은 극적으로 줄어드는데 이는 단성 호적에서 잘 드러난다.[30]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 관료 계층이 농사에 필요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종천법을 명시화했고 갖은 꼼수를 부려 상민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이 심했는지 (다른 지배층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조선 초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 송사였고 족보를 조작해 상민을 자신의 노비를 만드는 사례까지 발견된다. 특히 가뭄과 같은 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굶주린 상민들은 자발적으로 양반집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협호), 문제는 한 번 노비가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나마 납속책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노비가 상민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었다.
상민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로 조선은 만성적인 세금 부족과 병역자 감소에 시달렸고 왕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천법을 종모법이나 종부법으로 바꾸어 어떻게서든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배 계층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실패에 그첬고 일천즉천법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까지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무려 만 명에 가까운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금계필담의 내용이라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야사집을 제외한 상속 문서를 살펴본다면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 퇴계 이황이 367명의 노비를 자녀에게 상속했으며 중소가문인 전의 이씨 가문이 18세기 중반까지 노비를 100명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론할 때, 유력한 사대부가는 천여 명 정도의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변하게 된다. 조정에서 점차 양인 증가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영조 때는 노비종모법을 확정하고 속대전에 납속책을 규정했으며, 이후 정조 때의 노비추쇄관의 혁파, 순조 때의 공노비 혁파, 고종 때의 노비사가절목(노비 세습 금지)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도 도망 노비가 증가하고 소작제와 상공업의 발달로 노비가 점차 소작농, 장기 고용자(고공)로 대체되면서 노비가 급격히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 때 노비 제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없어진다.
간혹 노비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사람이 아닌 사고 팔리는 물건 취급받았다고 오해, 혹은 곡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는 사고 팔리는 인간 취급이었다.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건뿐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인간도 사고 팔릴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와서나 보편적이게 된 거고 조선 시대에는 모든 사람은 뿌리는 같지만 가지고 있는 성품에 따라 귀하고 천함이 정해진다고 보았다.[31] 비록 신분 제도가 있었고 노비의 인권이 낮긴 했지만 노비도 역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은 있었다. #선상 노비의 폐단을 구제하게 하다 중종때 노비 출신의 반석평의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간들도 반석평을 천한 출신이라고만 비난했지 그 이상 나가진 않았다. 오히려 이를 기록한 사관이 '천한 가문이라고 멸시하지 말고 능력보고 사람 뽑자' 라고 한 데서 보듯 노비를 인간 이하 존재로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법적으로는 양인-천민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에서 많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다만 신분 상승을 위한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아래를 보면 이랬다.[32]
- 전쟁에서 군공 세우기 : 주로 임진왜란에 벌어진 일인데 당시 조선의 상황이 하도 개판이라 노비도 단 한 명의 일본군 병사의 목을 따오면 면천되었다. 하지만 관리는 개판이었는지 선조도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대로면 일본군은 다 죽고 없어야 하는 거 아니냐?[33]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남아있지?" 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이 1명의 목만 베어오면 그냥 면천이지만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보상에 쩔어줘서 벼슬도 할 수 있었다.
- 역모 고변 : 이것도 좋은 신분 상승의 수단. 삼국시대와 고려는 외침이 잦았다면 조선은 역모 사건이 잦았다. 그런데 당연히 역모가 성공하면 안 되었기에 역모를 고변한 사람에게는 상이 뒤따랐다. 물론 반대로 이것 때문에 거짓으로 고변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었기에 무고죄(혹은 반좌율)에 의해서 거짓 고변자는 유배 내지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중종 때의 정막개, 숙종 때의 정원로, 경종 때의 목호룡 등의 사례를 보면 벼슬도 주면서 자연스레 면천도 이뤄진 모양이다.
- 맘씨 좋은 사람 만나기 : 이 부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반석평인데 반석평은 원래 노비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반석평의 주인이 반석평의 재능을 알아보고 면천시켜줘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확률이 낮긴 하지만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자신의 노비라면 자신이 직접 면천시켜 주면 되고 자신의 노비가 아니더라도 공노비가 아닌 이상은 노비 주인에게서 사들인 뒤 면천시켜 주면 그만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소수 사례이며 자신에게 운빨이 주어지고 그걸 잘 잡는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대개 재력이 뒤따라야 한다.
- 납속 : 정부나 국가에 쌀 등을 바치고 받는 것. 조선 성종 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 4명을 면천시킨 노비가 나온다. 물론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벼슬을 받겠지만.
- 투탁 : 이것은 양반 가문과 '합의'해서 신분 세탁을 하는 것 좀 간단히 말하자면 양반 가문과 접촉해서 "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나 혹은 내 아들을 당신네 가문에 끼워넣어 준다면 내가 OOO을 해 주겠다" 라는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것. 이것을 양반 가문에서 승낙하면 이뤄진다. 이것은 명백히 합법이었기에 꿀릴 건 없었다. 이 경우엔 주로 후사가 끊어진 쪽을 잇는 방식으로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서 삼대를 보면 조 의관이 거금을 주고 자기 집안을 명문가에 끼워넣어 혈통 세탁을 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래서 개신교인이었던 아들 조상훈이 "도대체 왜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명예에 집착을 하세요. 왜 '꾸어온 조상'에 제사를 지내신다는 거예요."라고 비판을 하자 안 그래도 평소 제사 등에 부정적이었던 아들을 못마땅해하던 조 의관은 '꾸어온 조상'이라는 말에 꼭지가 돌았다.
- 족보 위조 : 말 그대로 족보를 위조하는 것. 물론 조선 초기에는 인쇄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어려웠고 족보도 양이 방대해서 어려운 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쇄술이 발달하다 보니 가능해졌다. 당연히 불법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는지 태평천하를 보면 윤 직원이 자신의 족보를 위조한 경력이 있다고 나온다.
- 인맥 : 박문수 관련 일화에서 박 좌수 이야기를 보면 박 좌수는 백정 출신으로 돈은 많았으나 천시를 받아 결국 이방을 통해서 좌수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34] 물론 곧 동네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곧 좌수 자리를 잃었지만 직첩이 회수되지 않아 재산 챙겨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년에 좌수했다며 양반 행세를 했다고 한다.
[20] 양반이라는 이름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21]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 계층으로 존재했다.[22]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었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23]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 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24]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25] 과거 제도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과거 급제를 위한 노력과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급제는 커녕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게 한자였기에 과거에 응시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최소한 한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한자도 당연히 어려우니 한자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식쟁이 취급은 안 받는다.[26] 조선 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27] 참고로 고려는 무과 시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우기는 더 쉬웠는데, 이는 조선에 비해 전쟁과 변란이 많았기 때문이다.[28] 관료를 지칭하는 건국 초에는 그 수가 2,0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의 평균적인 추정 인구치가 400만 ~ 500만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1%도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29] 위에서 언급한 사카타 히로시의 기재 오류를 쉽게 이해하려면, 원래 영감(令監)이 종2품 및 정3품의 당상관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신분제가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신분을 막론하고 뭇 중장년 및 노년의 남성을 가리켜 영감이라고 지칭하게 되는 현상을 떠올리면 된다. 곧 사카타 히로시는 유학을 벼슬을 하는 양반으로 판단 오류를 범했던 것이며 여기서 유학은 '유학자', '양반'이 아니라 전술한 영감과 비슷한 의미를 띤다. 쉽게 말하면, 통상적으로 옛날에 벼슬을 하지 않은 남자와 그 부인이 죽으면 묘비명에 남자는 '유학(孺學)', '처사(處士)', 그 부인은 '유인(孺人)' 이라 기재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처사의 '사(士)'자가 관직에 종사하는 양반을 의미하고, 유인이 본래는 9품 관원의 부인에 대한 칭호이므로 신분제가 철저하던 조선 전기에는 이러한 칭호를 묘비명에 남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했던 통명(通名)에 '~우에몬(右衛門)', '~사에몬(左衛門)', '~베에(兵衛)', '~조(藏)', ~스케(助, 丞, 輔, 祐, 佑)'이 유독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호칭들은 본래 엄연한 관직명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 이후 실제 해당 관직에 종사하지 않는 몇몇 사무라이들이 해당 관직명을 참칭(僭稱)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관직과 아무 관련이 없는 농민, 상인, 기술자들도 사용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호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관직이 없는 자들의 전술한 호칭들의 참칭을 금지했지만, 이 호칭을 아예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 일본 해군의 핵심 세력인 사쓰마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이 사람이 전술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당 호칭을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사쓰마번에 봉사하고 녹봉을 받는, 엄연히 관직을 가진 사무라이었기 때문이다.[30] 다만, 조선 시대 호적의 경우 당대 행정 능력의 한계, 세금 및 군역 회피를 위한 농민들의 호적 등록 기피 현상, 정확한 인구 조사를 학정으로 인식하던 관리들의 성리학적 인식(호구 조사가 세금, 군역을 걷으려는 목적이므로) 등으로 인해 실제 조선 인구, 신분 비율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자.[31] 이것은 왕조 국가인 조선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데 만일 만민이 평등하다면 양반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왕과 양반 혹은 왕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소리가 된다. 당연히 조선시대에서 이 얘기를 했다 하면 어느 왕이든 "너 역적" 이라는 말과 함께 코로 사약 한 사발 들이키게 해 줄 것이다.[32] 노비 기준에서 서술해 놨지만 양인도 가능, 단 양인은 이미 자유민이었기에 면천은 해당되지 않았다. 이 경우엔 면천 대신 벼슬을 받는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33] 단, 이건 선조가 일본군이 계속 증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반도에 체류한 일본군은 20만을 넘은 적이 없지만, 투입된 병사는 40만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20만은 죽고 없었거나 부상으로 전투 불능이 되어 귀국 중이었다는 소리.[34] 아무리 양반에 비해 격이 낮았다고는 하나 이방이 백정 한 명을 위해 이런 편의를 봐준 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이방도 박 좌수가 백정이던 시절에 박 좌수 덕분에 빚을 많이 진 곤경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서로 형동생 하며 친분이 깊은 사이였기에 가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