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6:48:39

도로고

1. 개요2. 편찬 배경3. 내용 4. 의의5. 기타6. 참고

道路考

1. 개요

조선 영조 46년, 1770년에 신경준(申景濬)이 우리나라의 국도, 지방도, 육로, 해로, 도로 등 여러 교통로에 대해 기록한 지리지. 국립중앙도서관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1]

원래 삼국시대 때부터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은 도로정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치도 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 라는 숙종의 말이 그 단적인 사례로, 군사적 측면에서 도로의 역기능이 강조됨으로써 도로 건설은 곧 외적의 침략을 부른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들은 적군, 특히 주적이었던 북방 기마민족들의 주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조선시대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거기다 조운선에 의한 수운이 있었기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모든 교통로는 몇개의 좁은 보도만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다면 평시에도 도로를 통한 마차의 이용이 꽤 있기는 했으나 신라백제는 이미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도로와 마차의 사용이 매우 적었고, 고려 건국 후부터는 아예 도로가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는 마차 등은 의전용에 가깝게 변해가게 된다. 이후 들어선 조선 정부에서는 양마장을 설치하고 중국의 품종 좋은 말을 들여 북방 평지지역인 평안도에 한해 도로를 닦고 마차를 적극적으로 운용해보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그만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거친 이후 사정이 달라지게 된다. 처들어올 마음을 먹은 놈들은 도로가 깔려있든 말든 잘만 처들어와 쾌속 진격했고, 오히려 방어를 하려던 조선 측이 지휘관의 늦은 속도로 인해 제승방략의 허점이 찔리거나 구원온 명나라 연합군에게 보급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등 불리한 상황을 겪게 된 것이다. 200여년간 평화를 누리며 전국적인 범위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던 조선은 이때 처음으로 대난리를 겪은 후 기존의 문제점을 인식, 이후 이를 반성하고 삼국말 통일신라초부터 시작되었던 통금정책을 해제한 후 각지에 서서히 잔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도로들을 기점으로 광해군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여각등의 발달, 상평통보의 발행과 한반도 최초의 전국적 화폐 유통 경제 구축 등이 이루어진다. 사상적으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들어 유형원반계수록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설파한 이래로 이익유수원 등의 실학자들이 도로 및 교량 건설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이들이 평가받으며 이에 따라 한반도 전토에 도로 건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2]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국가 도로에 대한 총집편이 바로 도로고이다.

3. 내용 [3]

1권: 왕이 선대 조선왕릉에 행차할 때 통행하던 34개 능행로에 대한 내용. 휴식차 가는 온천길에 대한 내용, 화성행궁, 남한산성 행궁 등 왕이 여행갈 때 머무르던 여러 행궁을 잇는 도로에 대한 내용. 수도 서울로부터 육대로(六大路)와 그에 소속된 제읍 및 역원(驛院) 간의 국도에 대한 내용 등이 있다. 국가 육대로는 크게 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이다.

2권: 팔도 각 읍의 사방경계와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까지의 거리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3권: 사연로(四沿路), 즉 백두산연로·압록강연로·두만강연로 및 팔도연해로(八道沿海路)를 열거한 뒤, 팔도 각 지방의 역로(驛路)와 대로(大路)·중로(中路)를 구분, 기록하였다. 그리고 파발제(擺撥制)에 따라 서울과 의주(義州) 사이에 38참을 두어 말이 질주할 수 있게 해놓은 기발(騎撥)인 서로, 그 외 걸어서 공문을 전할 수 있게 깔아놓은 보발(步撥)인 북로와 동남로 등 파발로와 봉수로를 기록하고 있다.

4권: 외국과 연결된 도로에 대한 내용. 즉, 강진제주 사이의 해로 및 교린사행로(交隣使行路)인 중국사행육해로(中國使行陸海路), 일본통신사해륙로(日本通信使海陸路), 유구국해로(琉球國海路) 등을 수록하고 있다. 부록으로 조석(潮汐)·풍우(風雨) 등의 조목과 항해에 사용되던 전통적인 지식, 전국 각지의 정기 시장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4. 의의

전통적인 지리지가 아니라 최초로 경제의 유통을 중점에 두고 만든 전문 저술로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전개된 도로와 시장에 대한 이용과 유통량의 증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이정표(里程表)》와 《도로표(道路表)》 등 유사한 종류의 많은 경제적 도로 관련 저술을 나오게 한 선구적인 업적이 있다.

5. 기타

2016년 4월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에서 도로고에 나와 있는 육대로(六大路), 즉 삼남로·의주로·영남로·강화로·경흥로·평해로의 6개 도로 중 삼남길·의주길·영남길 일부를 복원해 '경기옛길'이라 이름짓고 경기옛길 생태탐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관련 기사

6. 참고



[1] <한국건설기네스(Ⅰ) 길(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간> 을 참조하여 작성[2] 다만 이것과 별개로 조선의 도로는 외국인들에게 꾸준히 까이는데 그들이 남긴 묘사를 보면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은듯하다.[3]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참조하여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