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명률(大明律)은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1367년 제정하고 이듬해 공표한 명나라의 법률이다. 1374년, 1389년, 1397년에 걸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1550년 《문형조례》(問刑條例) 249조를 반포하여 보충하였다.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나라의 당률과 원나라의 원전장(元典章)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2. 내용
당률은 수나라의 개황율(開皇律)을 참조하였고, 개황율은 북제의 형법을 따랐으며, 북제의 형법은 불교의 십악(十惡)에 기본을 두어 죄와 벌의 경중을 다루었다.2.1. 구조
《원전장》(元典章)의 편목을 따르고 있다.6부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에 따라 율(律)도 6부로 나눈 뒤에 명례(名例)를 더하여 7률(律)로 하였다.
2.2. 형벌체계
당률의 형벌 체계는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오형이며, 사형(死刑)의 경우 교(絞)와 참(斬)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명률에서도 이와 같은 5형의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세부 조목 내에서 자자(刺字)의 형[1]과 능지처사(凌遲處死)의 형이 남아 있는데 전시대인 원나라의 형벌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원칙은 경범죄에 대해서는 가벼운 처벌을. 중범죄에 대해서는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되 그 시대 범죄 대부분이 그렇듯이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고의적 살인과 같이 매우 큰 죄를 지은 범죄자는 사형에 처하고, 강도 등 중범죄자[2]는 자자형을 내리거나 도형에 처하는 등 가혹하게 다루고, 도둑과 같은 일반 범죄자는 태형과 장형을 때리는 방식이었다. 물론 일반범죄가 아닌 역적이나 황제가 작정하고 죽이기로 맘먹은 죄인은 대명률에 없는 사형으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바로 주원장과 영락제다.법률이 바뀌었을 경우, 당률은 범죄 당시의 법을 적용하지만, 대명률은 재판 당시의 법을 소급적용한다. 예를 들어 절도죄로 원래 곤장 100번이였는데 50번으로 완화됐다면 당률에서는 그냥 100번을 선고하지만 대명률은 50번로 낮춰주는 식이다. 다만 고대 법체계라는 게 막 훅훅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원래 태형이었는데 사형으로 올라가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법전 자체는 상당히 선진적인 부분이 많아서 미성년자일 때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받을 때 성인이 되어 있다면 미성년자로 간주하고, 성인일 때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받을 때 노인이 되어 있다면[3] 거꾸로 노인으로 보아 처벌을 하지 않는 등, 되도록 피고인의 이익이 되도록 형벌을 가볍게 하는 교화주의적 사상이 상당부분 적용되어 있다.
본래 중국의 당률은 실형주의를 전제로 하였으나, 대명율에서는 원나라의 배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살인죄와 상해죄의 경우 매장은(埋葬銀)을 징수하여 처벌을 감경받기도 하였다. 물론 배상으로 어느 정도 처벌을 감경받는 건 언제까지나 죄질이 극악하지 않을 때고, 역적이나 사회적 공분을 부를 정도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은 예외.
성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여, 남녀에 대한 형벌을 비교적 동등하게 적용했던 이전의 법률과는 달리 여성에 대한 예외 및 감경 조항이 늘었다. 당률과 송률은 여성에 대한 형집행의 예외조항이 극히 적었다. 그런데 원나라 때 갑자기 여성 예외조항이 늘어났고 이것이 대명률에도 반영되었다. 잘 알려진 여자에 대한 물볼기 또한 대명률에서부터 명문화되었고[4] 여자에 대한 자자형을 폐지한 데다 심지어 사형이나 간통죄가 아닌 한 여자를 구금하지 못하고 그냥 가택연금만 시키라는 조항까지 생겼다. 이는 남송 이후 성리학적 사고관이 강해진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또한 대명률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조항들을 적용했는데 이걸 악용한 여성범죄가 급증하자 서민 여성에 대해서는 구금이 가능하도록 조항을 변경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관계 동의 가능 연령을 도입하였는데, 법전에서 "12세 미만의 여아는 성에 대한 관념이 생기기 이전이므로 합의에 의한 관계라 해도 강간범과 마찬가지로 보아 교수형에 처한다" 라고 규정한 부분은 현대와 거의 유사하다.
무고죄인 것이 밝혀질 경우 그에 따른 처벌과 배상이 반드시 따랐으나 황제나 국왕이 무고를 했을 경우[5]에는 사과와 배상만 할 뿐 직접적인 법적 책임은 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역적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했다가 무고가 밝혀져 석방된다고 해도 조사를 맡은 자들이나 처벌받지, 황제는 그저 사과 한마디와 함께 배상만 해줄 뿐이었다.
형사미성년자 및 소년법, 장애인에 대한 형 감경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노인까지도 책임이 조각되는 연령대로 보았다. 15세 이하 및 70세 이상인 자, 경증 장애인(폐질)에 대해서는 유형 이하의 죄에 대해서는 형이 감경되었고, 10세 이하 및 80세 이상인 자, 중증 장애인의 경우 대역죄, 살인죄, 절도죄, 상해죄를 제외하고는 형사처벌이 불가능했고[6] 이외에도 범인은닉죄에 대하여 친족일 경우 기대가능성의 문제로 처벌받지 않는 것은 현재와 같으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오는 사회상의 차이 때문에 고위 관료, 하위 관료, 서민의 처벌수위가 각기 달랐다.
특이한 법으로 각종 독충 등을 사용한 맹독인 고독[7], 각종 저주용 주술인 염매 등을 제조하고 사용해 사람을 저주하거나 독살하려고 하는 행위를 아주 엄격하게 다스렸고, 또한 '채생절할'이라고 하는 사람의 신체를 조금씩 도려내어 사신에게 바쳐 강시를 만드는 저주 수법이 존재했는데[8] 이런 범행을 저지른 술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능지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존재한다. 이런 행위를 거의 테러 행위에 준하는 것으로 보아 고독 제조자, 채생절할 술사의 가솔들(사정을 몰랐다 하더라도), 동네 이장까지 벌했고 제보를 적극 장려했다. 고독을 일종의 생화학 병기쯤으로 취급했던 것은 현대와 달리 독극물을 탐지하는 합리적인 수단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채생절할' 술법의 경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미성년자/부녀자에 대한 쾌락살인/연쇄살인/토막살인 쯤으로 볼 수 있는데, 현대에도 이런 흉악범죄는 결코 중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3. 조선 내 도입
조선에서도 대명률을 참고하여, 경국대전에 대해 보조적 성격의 법률로 사용되었다.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이두로 대명률을 해석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30권이 편찬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형법이 적용된 후에도 한동안 대명률은 보조적 위치를 그대로 유지했다. 왕실이나 외척 인사들이 김옥균 등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들의 시체를 훼손하거나 효수하게 하고자 억지로 들었던 법적 근거도 대명률이었다.3.1. 참고문헌
- 조지만. 조선시대의 형사법 (경인문화사, 2007) - 대명률이 조선에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계수되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 2018년 12월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대명률직해를 완역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중국 사극에서 자주 등장한다. '평민이 관리를 고발하려면 일단 곤장 20대를 맞아야 한다'라는 불평등한 부분이 자주 영상화되는데 부패한 명나라 관리들의 현실을 강조하는 장치로 쓰인다.[1]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문신하는 형벌이다. 사극에서의 낙인과 같다.[2] 단 도적집단 등의 수괴가 아닌 일반 강도나 도적단에 속하긴 했는데 바지사장이나 일개 도적 등이 해당된다. 중요 간부나 두목급은 당연히 사형.[3]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형사미성년자와 같이 보았다.[4] 원나라 이전에는 여성에게 태형, 장형을 시행할 때도 타격부위를 벗기고 집행하였다.[5] 다만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나 오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6] 대역죄와 같은 조항들은 행정관이 판단할 수가 없고 위에 보고하여 황제의 재가를 받는 엄정한 절차가 필요했고, 절도와 상해의 경우 사람에 대해 피해를 끼친 부분에 대해서는 징벌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감경된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7] 본래는 독충 등을 사용한 상징적인 저주용 수법에 해당하나, 대명률의 법 조항은 살인이나 테러 목적으로 제조한 독극물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8]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수법이나 목적이 지방마다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