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8 20:10:51

종기


1. 질병
1.1. 개요1.2. 원인1.3. 대한민국 역사 속의 종기1.4. 엉덩이 종기1.5. 치료1.6. 관련 문서
2. 終期
2.1. 관련 문서
3. 무협소설겁난유세》의 등장인물

1. 질병

1.1. 개요

/ furuncle

피하감염으로 고름이 형성되는 질환이다. 종기가 악화되면 피부 염증으로 끝나지 않고 발열, 오한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정말 드물게는 패혈증까지 진행되어 생명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확실한 절개 배농법과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종기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재도 당뇨병, AIDS, 간경변, 환자 같은 면역이 저하되는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질환이다. 종기가 농익었을 때 툭 짜면 퍽 하고 고름이 쏟아지는데, 증세가 심하다면 가만있는데도 고름이 제멋대로 터져서 우수수 쏟아진다.

1.2. 원인

모낭(털구멍)의 염증이 가장 흔한 원인이나 피하에 작은 낭종이 형성되어 감염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보다 더 깊은 범위의 감염일 경우에는 종기라고 칭하지 않는다.[1]

보통 종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비위생적인 생활습관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면역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환이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피부의 세균 감염을 쉽게 처치하지 못하고 점점 악화되는 것. 당뇨 등 만성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종기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나이와도 관련이 있어서, 면역력이 좋은 젊은 시절에는 종기로 인해 죽는 경우가 별로 없지만 이러한 생활 패턴과 나이로 인한 면역력 악화가 겹치면 간단한 질병이었던 것이 난치병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선 조선 왕들이 젊을 때 걸리면 끙끙거리며 버티다가 나이가 들면 죽고는 했다.

현대에는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여드름처럼 가벼운 피부 질환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병이었다. 왜냐면 조선시대에는 종기 치료에 꼭 필요한 항생제 및 상처 소독 기술이 미비하다보니 종기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하는데 필요한 소독기술과 항생제가 부족했다.[2] 특히 환자가 왕인 경우는 소독을 안 하고 시술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물론 왕이라고 해서 외과시술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고 침으로 고름을 따내기는식의 치료는 했다. 물론 조선 효종의 경우에는 어의 신가귀가[3][4] 종기가 난 부위를 잘못 땄다가 세상을 뜬 사례가 있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1.3. 대한민국 역사 속의 종기

대한민국 역사의 왕들을 고생시킨 병 중 하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도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이 악화된 끝에 그 등창이 터져서 죽었고[5], 조선왕조실록에는 문종[6], 효종[7], 정조[8]가 종기로 목숨을 잃었고, 세조[9], 광해군, 현종 등 27명의 왕 중 무려 12명이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10]
정조실록 정조 24년(1800) 6월 25일

여기 나오는 6월 25일은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8월 15일인데, 그 무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처음에는 피재길이 만든 고약으로 종기를 치료했지만, 생활 습관의 문제로 결국 재발했고[11], 고약도 내성이 생겨서 약효가 떨어진 데다가 다른 합병증까지 겹쳐서 결국 승하했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기에 시달렸던 것은 당시의 의술 탓도 있겠지만,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과식운동 부족, 수면 부족[12] 등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운 환경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당시의 최신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기록으로 남는 왕들도 저 정도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 받기도 어려운 서민들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사실 지금은 소독한 바늘 같은 걸로 쿡 찌르고 쭈욱 짜 낸 다음에 깨끗하게 씻고 소독하고 뜨거운 방에서 자면 나아버리는 게 종기겠지만, 바늘 소독도 안 되고[13][14] 상수도가 없으니[15] 씻기도 어렵고[16] 거기다 주요 장기와 먼 엉덩이 종기라면 모를까 등허리에 종기가 나서 커지기까지 했다면...[17]

1.4. 엉덩이 종기

엉덩이도 종기가 자주 생기는 부위 중 하나이다. 엉덩이 종기는 곪은 상태에서도 안 터지고 앉을 때마다 굉장히 아픈데 겪어본 사람만 안다. 엄청 아프다. 게다가 앉을 때마다 걸리적거려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이럴 때는 그냥 시원하게 터트려서 고름을 쭉 짜버린 후 소독해주는 게 편할 때도 있다. 괜히 그냥 있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터져서 속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 검은 피와 함께 새카맣거나 회색인 고름이 쏟아져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엉덩이에서 고름이 흐른다고 이게 다 종기는 아닐 수 있다.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플 수 있는 질환은 치질의 일종인 치루인데 실제 염증은 직장에서 발생했지만 이 염증에서 생긴 고름이 직장의 환부에 쌓여가다가 마침내 혈관 같은 우회로를 만드는 식으로 무작정 고름의 파이프라인이 몸 속을 파고 들어가다가 엉덩이로 튀어나오는 터널이 뚫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별한 치료 없이는 직장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이 지옥의 송유관은 철거할 방법도 없다. 고약도, 항생제도 힘들고 수술대에 오르는 것 밖에 답이 없어진다.

1.5. 치료

이렇듯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종기로 고생한 조선시대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침이나 칼로 외과적 시술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뱉거나 하는 식의 치료를 했다.[18] 정조는 종기의 치료를 위해 신하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고, 인삼과 육화탕이 들어간 탕약을 먹었다고 한다. 정조 본인은 자신과 인삼이 맞지 않는다고 싫어했지만, 신하들은 기어이 인삼이 들어간 약을 먹였다. 많은 치료법이 있었겠지만, 당시 조선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 도구의 살균처리는 고사하고 물론이고 환부의 처리도 현대 기준에서는 불완전했다.[19] 그래서 외과적 치료를 시행해서 고름을 빼내도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치료법은 그저 종기의 고름만 제거할 뿐, 근원적으로 고름을 만드는 조직을 제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재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상황은 조선 후기에 들어 고약이 개발된 후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고약이 종기 속의 고름을 배출해 줌과 동시에 상처 소독까지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고약은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정 상비약의 자리에 올랐지만, 의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 위생수준도 급속도로 상승하면서 바르기 간편한 연고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상황이다.

Dr. Pimple Popp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종기 수술 영상으로 유명한 유튜버이자 피부과 의사인 산드라 리 박사의 수술영상을 보면(클릭 주의, 연령 제한) 고름을 뽑아낸 이후 고름을 만들어내는 조직 자체를 끄집어내서 전부 떼어내버리는걸 볼 수 있다.[20] 고름을 뽑아내기만 하는걸로 수술을 끝내면 높은 확률로 재발하는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세균 감염으로 발생된 모낭염인 경우가 많으므로 항균 비누 (Dial, Hibiclens등)를 이용해 온 몸과 종기가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씻는 방법이 있다. 교차 감염을 막으려면 속옷, 옷은 물론 침대 시트나 이불 그리고 수건등을 주기적으로 빠는 것이 좋다. AHA와 같은 화학적 각질 제거 성분이 함유된 로션 등을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환부를 깨끗히 관리해주면 보통은 2 ~ 3주 정도면 사라진다.

속옷의 원단이 부드럽지 못한 합성섬유일 경우 피부 간 마찰을 증가시켜 더욱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어 면으로 된 부드러운 재질의 속옷을 입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앞서 언급한 고약을 사용해 볼 수도 있다. 상처 부위에 붙이기만 하면 고름을 쭉쭉 잘 뽑아낸다. 직접 짜는 것보다 훨씬 덜 아프고 간편하다. 요즘은 쓰기 편하게 밴드 형태로 출시되는 고약도 있다. 다만 고약으로 종기 치료 하려다가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서# 안 붙이는 것만 못 한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장기간 사용시 납중독이 우려되며 흉이 진다는 말도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하여 사용하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면 웬만하면 고약은 추천하지 않는다.

화농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경우 항생제 복용만으로 좋아지지만, 심한 종기가 났을 경우에는 외과를 방문하여서 제거하기를 추천한다. 혼자서 해결하려 했다간 소독이 올바로 되지 않아 또 고름이 생기며 아파진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항문 외과에서 치료를 해야하며, 치료라는 것이 마취 주사를 놓고 피지낭종을 제거하고 주변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즈를 쑤셔넣고 향후를 지켜보면서 염증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거즈를 교체해가면서 고름을 짜낸다.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염증이 나는 살 부분을 완전히 도려내는 대수술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피부에 탁구공의 절반만큼의 구멍이 생기는 거다. 당연히 치료 과정은 더 괴로워지고, 흉터도 크게 남는다. 그러니 귀찮다고 냅두지 말고 종기가 좀 심해진다 싶으면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기가 이미 커져서 마취하고 절개하는 경우, 그 과정이 조금 길어진다. 우선 마취를 한 뒤, 칼로 환부에 여러 번 상처를 내어 고름을 빼며, 심을 박아 넣고 거즈와 반창고를 위에 덮는다. 여기서 심을 박는 이유는 수술 이후에도 나오는 고름을 한 곳에 모아서 잘 배출하여 거즈에 배기 수월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항생제를 며칠 복용하며 경과를 지켜본 뒤 다시 내원하여 이 심을 제거한다.

1.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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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終期

법률 용어로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를 뜻한다. 부관 종류 중에서도 기한(期限)의 한 종류이다.

2.1. 관련 문서

3. 무협소설겁난유세》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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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조선시대에는 봉와직염과 단독(erysipelas)도 종기의 일종으로 취급했다[2] 사실 당시 조선의 의학에도 외과시술은 있었고, 실제로 시행된 경우도 많았지만 소독기술의 부족으로 위험성이 높았다. 이는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보다 수술기술이 더 발달된 인도나 아랍, 유럽에서도 소독기술의 부족으로 수술하다가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19세기까지 이어져서 피묻은 앞치마가 의사의 상징이 되기까지 했으며 환자를 돌보고 다른 환자를 돌보기 전에 손을 씻게하는 것만으로도 병자의 사망률이 엄청 낮아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항생제의 경우에는 1928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게 그 시작이니, 현재 발견되고 발명된 지 [age(1928-01-01)]년밖에 되지 않은 의학기술계의 혁명이다![3] 왕이 승하하는 경우, 어의에 대한 처벌은 대체로 형식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신가귀의 경우에는 수전증으로 인해 침을 잘못 놓으면서 과다출혈을 일으켰다. 결국 신가귀는 왕을 사망케한 벌로 사형에 처해졌다.[4] 신가귀의 사형은 조선왕조 500년 간 어의 중에서 유일하다. 그나마도 원래는 참수형이었으나, 교수형으로 형이 낮춰졌다.[5] 후삼국 시대를 소재로 한 한국 사극 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이 점점 등창이 악화되는 묘사를 넣었는데, 하필이면 고대에 정말 더욱 치료하기 어려운 에 난 종기인데다가 그 종기도 일반 종기가 아닌 등창인지라 배우 서인석의 실감나는 명품 연기까지 더해져서 그냥 보기만 해도 정말 고통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다.[6] 등에 난 종기의 크기가 무려 30cm였다고 한다.[7] 얼굴에 악성 종기가 나서 침으로 땄다가 어의가 수전증으로 혈관 부위도 같이 따 내는 의료사고를 일으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8] 등과 머리에 수많은 종기가 났다고 한다.[9] 야사에 의하면 형수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니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니 아들을 죽이겠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침을 뱉었는데, 그 다음부터 종기가 생겼다고 한다.[10] 그릇으로 거의 몇 잔을 쏟았다. 다행히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나 그리 앓은 얼마 뒤 신하들과의 면담 도중 쓰러지고 말았는데, 약을 넘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숨졌다.[11] 정조는 평소에도 업무 과다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다가 담배를 매우 즐겼다.[12] 기록에 의하면 국왕은 과중한 업무로 1일 평균 수면 시간이 5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13] 지금이라면 약국에서 몇 천원에 알코올을 사 소독하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아니었다. 염소알코올 같은 수단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의 조선의 의학과 과학 수준으로는 그걸 인지하기도 어려웠으며, 값도 상당히 비싸고 과정도 몹시 복잡해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아편에테르, 모르핀 같은 약물로 마취를 하는 것도 근대의 일이었다.[14] 단 술, 즉 알코올을 이용한 소독 개념은 의외로 고대부터 있긴 했었다. 의료를 의미하는 한자인 醫의 의미 부터가 상처 부위에 술을 붓는다는 뜻이기 때문.[15] 완벽한 상수도를 모두 갖춘 도시는 최근의 일이었다. 일반 서민들이 사는 마을은 우물이나 하천이 주된 생활용수 공급처와 빨래터의 역할을 하였다.[16] 처치 후 소독하기도 어려웠는데다 왕쯤 되면 초기 치료도 어려웠을테니 염증이 커져서 병도 확대되었을 것이다.[17] 역사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군주들은 과도한 업무에 그로 인한 운동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에 수라와 같은 고열량의 식단들은 당뇨와 같은 합병증을 불러왔다. 조선 왕조의 세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18] 물론 현대 의학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치료법이다. 아무리 양치질을 열심히 해도 기본적으로 입 안에는 각종 세균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어서 감염 위험성이 크다. 시술자 입장에서도 세균덩어리나 다름없는 고름과 타인의 피가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당연히 나쁠 수밖에 없다.[19] 이때는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 개천이나 온천과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이상은 물을 길러 나르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다. 물론 세수는 매일같이 했기에 위생 관념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럴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20] 비위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 수술 과정을 글로 설명하자면, 환자는 왼쪽 볼에 종기가 있어 절개 수술을 받고 있다. 볼을 () 모양으로 조금 절개하니 엄청난 양의 고름이 쏟아져 나오는데, 쭉쭉 짜서(...) 고름을 다 제거하고 환부를 헤집으며 종기의 원인이 되는 조직을 잘라낸다. 그리고 봉합하는데, 국소 마취를 한 것인지 산드라 리 박사가 환자와 대화를 하기도 한다. 환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긴 적출된 조직을 보고 사진을 찍으며 "정말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네요.." 라고 하는 게 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