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55:37

척준경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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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세가(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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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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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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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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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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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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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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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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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고려국 명예 태사
고려국 태보
고려국 중서문하성 차관
고려국 서경 분사조정 장관
고려국 상서성 호부상서
척준경
출생 미상
고려 황해도 곡산
사망 1144년 음력 2월
고려 개경
최종 직위 <colcolor=#000,#fff>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1]
본관 곡산 척씨(谷山 拓氏)
이름 척준경(拓俊京) / 탁준경(卓俊卿)[2]
아내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 황씨(黃氏)
아들 척순(拓純)[3]
아버지 척위공(拓謂恭)[4]
동생 척준신(拓俊臣)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1. 개요2. 역임 관작3. 생애
3.1. 생애 초기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3.2.2. 제2차 여진 정벌
3.2.2.1. 석성 전투3.2.2.2. 가한목 전투3.2.2.3. 영주성 전투3.2.2.4. 공험진 전투3.2.2.5. 웅주성 전투(1차)3.2.2.6. 길주 전투3.2.2.7.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토멸
3.3. 생애 후기
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고려시대의 무관.[5]

국사 시간에 비중이 그다지 높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현대에는 척씨가 없어 잘 잊히지 않는 편이다.[6]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활약도를 보여준 한반도 역사상 최강 무력의 소유자다.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명장들은 대부분 최고 사령관의 위치에서 활동하였고, 따라서 일신의 무력보다는 전략 · 전술에 능한 유형이었다. 반면 척준경은 본인의 무력 그 자체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역덕들은 한국의 소드마스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고려의 척준경여진족사묘아리송나라한세충과는 동시대에 활약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다만 서로 직접 대면해서 싸운 전적이 없기에 가끔 vs놀이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정치나 세상을 파악하는 식견은 어두운 편이라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이자겸에게 그저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7],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세력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애초부터 왕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던데다, 나중에 내부적인 갈등으로 이자겸과도 갈라졌다가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타이밍이 늦어 결국 말년은 유배 생활로 마감하게 된 인물이다.

현대에는 이자겸의 반란 같은 고려 역사보다 오히려 전투에서 뛰어났다는 가십이나 일화가 더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며 '아무튼 매우 강력한 대단한 인물' 로서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본인에게 그닥 충성심이 없고 왕권을 위협했던 권신이었던데다, 반란에까지 가담한 전적이 있었으니 전투에서의 공적이 어찌했건간에 인물로서 평이 박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 들어서 척준경의 '재발굴' 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고 흥미거리로 떠올려진 데에는 조선시대의 이러한 평가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 역시 약간은 작용했다.

2. 역임 관작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이자겸 배신 후, 척준경의 마지막 직위
공신호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
(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인종이 준 위사공신호. 신흥사의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갔다.
향직 품계 삼중대광
(三重大匡)
1품 1등위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향직 품계는 원래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였으나 성종이 문산계 품계를 만들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종1품 품계로서 최고위 품계. 문산계 품계는 성종이 도입한 정식 품계이다. 문관, 무관 모두 문산계의 구분을 따랐다.
검교직 검교태사(檢校太師)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리는 명예직이다.
수직 수태보(守太保)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에 수직을 붙힌다. 태보는 삼사 직 중 하나다.
직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문하시랑~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8] 판호부사는 호부의 장관이다.[9] 서경유수사는 서경 분사의 최고 장관이다.
훈위 상주국(上柱國)

척준경은 정8급 무관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무관 출신이기도 했는데, 그 후 큰 권력을 얻으면서 참지정사, 평장사까지 오른 보기 드문 출세를 한다. 무신정권이 시작되면 정중부문하시중을 얻고 나서는 개나소나 재신, 추밀에 오르지만 무신정권 이전까지 무관 출신 중에 중서문하성 재상에 진출한 인물은 유방, 왕국모 등 많지 않다. 고려 최고 정부 기관인 중서문하성은 장관이 문하시중, 차관이 평장사, 서열 3위가 참지정사이다.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척준경 실각 후 최종 직위
직위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척준경이 죽은 뒤 추증되었다.
문산계 품계 조봉대부
(朝奉大夫)
원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종1품보다 한참 떨어지는 품계.
검교직 검교호부상서
(檢校戶部尙書)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의미이며 호부상서는 호부의 장관으로 판호부사의 별칭이다. 척준경이 실각 전 호부상서였던 것을 감안해 검교호부상서를 준 것으로 보인다.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으나 본인이 실각하고 이자겸과 똑같이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 실각의 주역이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대우는 받았다.[10]

3. 생애

3.1. 생애 초기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11]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호장, 부호장 정도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신라 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은 가병들도 뺏기고, 신분도 격하됐지만, 고려까지 호장(戶長)은 세력을 갖춘 지역 토호들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었다.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 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 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고려 시대는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었다. 고려의 무과는 예종 때 무학재와 함께 잠깐 생겼다가 인종 때 혁파되고 이후 공양왕 때 가서야 잠깐 생겼다가 고려가 멸망한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문종의 3남 계림후 왕희가 계림공이던 시절, 후에 숙종이 되는 왕희는 1077년부터 1095년까지 계림공으로 불렸다. 척준경이 차후에 활약한 나이를 감안하면 척준경은 대략 1070년 생이고 1090년 정도에 계림공 소속 종자로 들어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때 왕희의 저택은 계림부라 하였는데 고려에서는 3등작을 받은 왕족에게 제왕부를 봉해 관저로 삼게 해주었다. 척준경은 이 계림부의 소속 종자로 들어간다.

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추밀원 별가(別駕)' 즉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업무 등을 하는 주로 남반으로 지냈다.

3.2. 대 여진(女眞) 전쟁기의 활약

3.2.1. 제1차 여진 정벌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에 쳐들어왔을 때 전면 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휘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불과했다. 이 직책은 향리(鄕吏)의 자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벼슬이었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무명에 불과한 소졸이 사령관에게 바로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전사시키고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치면서 고려군이 전면 패주하는 상황을 막아냈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 기(騎)가 추격해 오자 또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 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 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 여진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엄청난 무공을 세우게 된다.

이때의 전공으로 하급 남반 신세에서 벗어나 천우위(千牛衛) 소속 녹사(錄事)가 된다. 천우위는 궁중 숙위와 국가 행사에서 의장대 역할을 하던 부대로 핵심 전투 부대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나 치안 부대인 금오위보다 규모와 중요성이 떨어지나 엄연히 6위의 일원으로 척준경은 여전히 말단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벼슬아치가 되었다고 볼 순 있었다.

3.2.2. 제2차 여진 정벌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부원수(副元帥)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판관(判官)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기타 지휘관
녹사(錄事) 척준경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
도탕군(跳盪軍) 사궁군(射弓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강노군(剛弩軍) 대각군(大角軍)
철수군(鐵水軍) 발화군(發火軍) 석투군(石投軍)
도합 170,000 명

별무반 대원수 윤관과 친해진 척준경은 천우위에서 중군(中軍) 소속 녹사로 보직을 바꾸어 참전했다. 중군은 2군 6위처럼 특정 부대가 아니며 고려의 전시 편제인 오군 중 하나이다. 6위의 병력이 수도 혹은 북방에서 부병하다 전시에는 오군으로 편성되는 방식으로 척준경의 소속 부대는 여전히 천우위이다.
3.2.2.1.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 명의 별무반은 진격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 도달했는데 이곳에 있던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농성을 벌였다. 이 때 윤관은 여진족 족장들을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다.[12]

이때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 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다.

가장 먼저 성벽에 돌격하는 병사들은 전사할 경우 대부분의 문명에서 해당 병사의 가족을 국가가 평생 부양해 준다는 약속을 해줄 정도로 공성전에서 먼저 성벽을 오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인해전술로 몰아붙여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일을 혼자 해낸 것도 모자라 성벽을 올라 체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추장과 병사들을 죽인 것이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 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3.2.2.2. 가한목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자살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군 10여 명을 해치우며 결사적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물러가는 여진족을 추격해 36명의 머리를 베었다. 날이 저물자 영주성으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 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3.2.2.3. 영주성 전투
이후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뒤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왔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아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이때까지의 전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합문지후는 조회와 의례를 맡아보던 관서인 합문(閤門) 소속의 정7품 관직이다.
3.2.2.4. 공험진 전투
2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 주었다.
3.2.2.5. 웅주성 전투(1차)
동년 2월 알새는 수만에 달하는 대병을 동원하여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80여 명의 적병을 살상 또는 포로로 하고, 병거 50여 량과 중거 200여 량, 군마 40필 등을 노획하는 등 한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라며 도움을 요청했고, 척준경은 이내 홀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데...
3.2.2.6. 길주 전투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13]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후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한 뒤 그들을 이끌고 통태진·야등포·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조리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하고 웅주성을 구해냈다. 이것이 1차 웅주성 전투.[14] 이 전공으로 상서성의 정6품 관직 공부원외랑에 제수되었다.
3.2.2.7.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토멸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 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 함주군)·영주(英州)(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일원)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9성 원정 후반부는 고려군이 갈라수에서 참패하는 등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기동대를 이끈 척준경과 왕자지는 소소하게나마 전과를 낸 것이다.

3.3. 생애 후기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해 위위경(衛尉卿)[15] - 직문하성(直門下省)[16] 직위에 오른다.

이때 경험한 여진의 강대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척준경은 후일 이자겸과 함께 대금 사대를 주도했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여진과 직접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로는 전문가인 만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금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17]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권세를 지켜냈고 이자겸의 지원으로 무신으로서는 꿈도 못 꾸던 정2품 벼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는다. 또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궁궐을 방화한다.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성에 불을 지른 뒤에 척준경은 말을 타고 자신의 친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수춘궁 정문에서 기습을 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분노한 척준경은 수춘궁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으며 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갔지만 왕의 호위 무사 2명에게 패하여 퇴각하기도 했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 ~ 1135),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 ~ 1126)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 1126)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 ~ 1126), 장군(將軍) 고석(高碩, ? ~ 1126)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임술일. 들이 궁궐을 불태웠다.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 ~ 1126)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하시랑평장사 -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가만히 있을 인종이 아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 ? ~ 1135)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난을 성공시킨 지 3개월 후인 1126년(인종 4년)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 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 수태보(守太保)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127년(인종 5년) 3월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인종도 내심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끝내 전라남도 신안의 암태도로 유배를 보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는 것. 모종의 이유로 군권을 빼앗겼거나 홀로 인종에게 직접 반기를 드는 행동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18]

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서경천도운동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다. 전자의 경우 서경 천도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 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최고 무관직 품계를 넘는 정2품의 벼슬이었다. 중서문하성 차관인 평장사. 최고 무관직인 상장군은 정3품이다.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받은 신하는 숙종 대 상장군 출신 왕국모로 종2품 참지정사였다. 이걸 천우위 녹사 출신인 척준경이 깬 것.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기조 때문이기는 했다.

그래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그를 고향 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에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된다. 심지어 1144년(인종 22년)에는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또한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의 벼슬을 주라는 황명을 내리기도. 그러나 척준경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수십 일 만에 등창으로 인해 사망했다.

4. 평가

고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 하급 남반 관리 출신으로 숙종 명효왕 대에 무관이 됐고 예종 시기 여진 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초기의 유금필양규, 그리고 후기의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무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진 정벌기 내내 독보적인 전공을 쌓았다.

부대를 통솔할 때도 혁혁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단신으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말이 안 되는 수준. 혼자서 공성전의 판세를 뒤엎고, 전멸 직전의 상황에서 10명 남짓한 결사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으며, 성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결사대와 함께 무장한 병사 십여 명을 거뜬히 베어넘겨 포위진을 와해시키질 않나, 밤을 틈타 포위를 뚫고 국경까지 내달려 구원군을 편성해 왔다는 믿기 힘든 공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건 동네 주먹싸움과는 차원이 다른 오롯이 전쟁에서 세운 공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죽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향을 끼쳤느냐이며 군사들의 사기는 말할 것도 없다.

윤관 휘하로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맹장으로서의 편린을 보였고 윤관 휘하로 들어가서는 윤관의 기록 대부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전공을 세운 그는 1, 2차 정벌 동안 재상인 윤관과 친해졌으며 전쟁 종결 후 문관직에 올라 점차 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동북9성을 세울 곳의 지형조차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한 채 벌어졌던 9성 정벌은 그가 없었다면 윤관이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인종 대에는 외척 이자겸에게 포섭되어 정권을 주도했지만 결국 인종에 의해 제거된다. 척준경은 전쟁에서의 공은 걸출했으나 정쟁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는 결국 초라한 결말로 이어져 후대의 평가도 갈리게 되었다. 다만 무예만 놓고 보면 척준경은 따라올 수 없는 전공을 세운 무사였다. 한국사에 등장한 무장 중 전술 전략의 구상 및 지휘의 형태가 아닌 개인의 무력만으로 척준경보다 더 큰 전공을 세운 무장은 없다.

그러나 척준경 본인은 단순히 순수한 무인이었을 뿐 나름의 정치적 식견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지 않았지만 표리부동하지도 않았고 전장에서는 일당백이었으나 배움이 짧고 인간됨이 맞지 않아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척준경에 비교되는 무인들을 봐도 유금필, 최영, 이성계장군으로서 백전불패에 가까운 명장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최소한 큰 누가 될 만한 행동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척준경에겐 그러한 감각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권력을 다룰 줄 몰라 본인을 올바른 방향으로 써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여진과의 전쟁 때는 고려의 명장이자 존경받는 문관이기도 한 윤관의 밑에서 눈부신 전공을 쌓고 구국의 맹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후 그를 써준 사람이 하필이면 권신 이자겸이라 간신을 지키는 맹견으로 전락하여 전횡에 일조하다 뒤늦게나마 임금의 편으로 돌아섰음에도 결국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칼로 흥하고 칼로 망한 자의 표본.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맹활약하고, 이후엔 권세를 쥐었지만 결국 몰락하고 만다. 그는 권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던, 전장에 있어야 할 인물이었고, 강력한 무용을 지녔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쥔 사람에 의해 그 쓰임새가 바뀌는 검 자체였다. 잘못된 주인을 만나 끝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누구와도 뒤지지 않는 무력을 지녔지만 정작 분별력이 떨어져 스스로 제 목을 조르게 된 점은 참 씁쓸할 노릇이다.

그나마 뒤늦게 근왕파로 전향한 덕에 이자겸과는 달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그 자손들도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건 천만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윤관의 밑에서 세운 공적과 이자겸의 밑에서 차지하고 있던 권력을 곱씹어 보면 허무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후에 무신의 난 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거도 사실이나 그 무신들의 말로가 대부분 배신과 죽음 그리고 그 뒤에 주변 사람들까지 숙청당한 것을 볼 때에 척준경은 이의방, 이고,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은 맞다.

5. 기타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고려사절요》, 1126년 6월 미상(음)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고 임원애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왕비 자리에서만 내쳤을 뿐 대우는 후하게 해줬다. 그도 그럴게 두 딸 중 한 명은 별반 기록이 없지만 다른 딸은 시종일관 인종의 편을 들며 인종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줬기 때문.
  • 젊어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보려고도 했으나 배움이 없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지 못했는데 행정 업무 외에도 나름 지식이 있었던 건지 인종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인종이 깨 5되와 황규(黃葵)[19] 3되를 얻은 꿈을 꾸고 이를 척준경에게 말했다. 이자겸의 두 딸이 폐비된 후 인종이 후비(后妃)[20]로 맞은 여인은 공예태후 임씨였으며 그녀가 낳은 다섯 아들 가운데 의종, 명종, 신종이 왕이 되었다. 고려는 형이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으면 동생이 뒤를 잇는게 자연스러웠다. 태조의 아들 중 3명이 모두 왕위에 올랐고,[21] 현종의 아들 중에서도 3명이 왕이 되었으며[22] 문종의 아들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3명이 왕이 되었다.[23] 단, 꿈 이야기 중 후비의 경우에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 수준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그녀의 친정인 장흥 임씨 가문은 상당한 명문가였으며 일찍이 이자겸과 충돌한 가문이었다. 임씨의 아버지인 임원후는 이자겸과 대립하다가 밀려서 개성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었다. 이자겸을 척준경의 손으로 축출한 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공예태후를 왕비로 들이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꿈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척준경이 임씨를 왕비로 들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음을 암시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 성격은 전형적인 무인상으로 다혈질에 의리 있는 사나이로 보이는데 자신을 인정해 준 윤관을 목숨 걸고 구출한 일화, 전투 중에 을 잃은 친구 왕자지를 위해 직접 여진족을 추격해 말을 가져다준 일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자겸의 아들들에게 역정을 낸 일화 등에서 이런 성격을 알 수 있다. 한때 이런 성격 탓에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려 하기도 했으나 인종이 직접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가며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때가 아직 이자겸이 권세를 부리던 시절이었다는 점, 이후에 그에게 보낸 배려 등을 생각한다면 인종도 그를 꽤나 아꼈던 듯하다.
  • 동생 척준신 역시 무관으로 종사하며 형과 함께 여진 정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고 형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이자겸의 난 직전에 인종의 친위 세력들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척순은 내시[24]로 근무하다가 척준신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 1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의 척준경, 사묘아리, 한세충. 만인지적용장 3명이 동시기를 살다 갔으며 시기상 척준경과 사묘아리, 한세충과 사묘아리가 전장에서 부딪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딪혔다는 기록은 없지만 워낙 시기가 절묘하다 보니 이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역덕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온다.
  • 윤관과의 관계나 이후의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이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 강유와 비슷한데 척준경과 강유 모두 유능한 상관 밑에서 공을 세웠고 그 상관이 죽자 무신 최고직에 오르는 모습도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권신이 되어 반역 열전에 올랐지만 강유는 유선을 보필하며 30년 동안 북벌을 이끌고 자신의 모든 것을 촉한을 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심지어 강유는 죽어서도 촉에서는 충신으로 추앙받았는지 사후 약 30년 뒤 그 지역에 성한이 건국되는데 당시 촉의 유민들은 아직까지도 제갈량을 그리워하며 강유가 촉한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다만 강유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기에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유는 배신자이기는 하다.

6. 대중매체

창작물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잘 다루지 않는 이유를 창작자의 기준에서 추측한다면 의외로 분명해지는데,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척준경은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힘든 인물 유형이다. 잡고 휘두르는 주인에 따라 인물이 달라졌다고 평가될 만큼 척준경의 생애는 본인이 무언가를 선택해서 밀어붙인 삶이 아니었는데, 상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척준경은 구국의 명장도, 간신을 지키는 맹견도 되었다.

이렇게 일생을 다른 이의 뜻에 따라 정반대의 행적을 보인 사람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삼기는 대단히 어렵다. 보통의 한국 사극처럼 주인공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터무니없는 미화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고증을 살려 그대로 묘사하면 주인공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힘만 센 바보가 되어버린다. 역설적이지만 살아온 생애에서 무언가 큰 욕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끝에 타락해 버린 악역 주인공으로 묘사해 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한 다음 최고 권력까지 쥔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이 들어오자 순순히 이를 받아들여 권력을 놓아버렸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모르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 결국 망하고 마는 인물로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 척준경은 청렴 결백하지는 않았어도 권력을 단번에 놓아버릴 만큼 과욕은 부리지 않았고 이자겸을 왕을 능가할 만한 권신으로 만들어줬지만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아무 힘도 없던 왕의 명을 받들어 이자겸을 제거했으며 평소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는 재주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해몽 등 특정 분야에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여주는 등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인물상도 척준경을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쉽게 다룰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캐릭터의 성격을 결정짓기도 어렵거니와 창작자의 의견이 개입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

또 다른 약점은 기록이나 창작물의 부재인데 이 정도 무인이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글 소설 같은 게 있어서 인지도를 유지시켜 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 척준경을 언급하고 찬양하는 이도 없었던 듯하며 하다못해 본인이 남긴 기록이라도 있어야 했다.[25] 척준경이 주인공인 사극이 나오더라도 그 사극에 나오는 대사나 심리 묘사는 전부 작가의 허구일 것이라서 이름만 사극이지 그냥 가공의 전기물이 되기 쉽다.

다만 주인공으로서 중심 인물이 되기 애매하다는 뜻이지 역사적 행보는 뚜렷한 편이기 때문에, 시점을 옮겨 윤관이나 이자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 조연으로 등장한다면 나름대로 눈에 띄는 감초 조연이 될 여지는 있다. 특히나 사극에서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 탁상공론보다는 전투가 더 관심을 끄는데, 딱히 무협지 같은 요소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가장 빛이 날 수 있는 맹장이기 때문에 시원시원한 액션 신을 보여준다면 충분히 사극에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26]

6.1.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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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롱이의 옛날여행> 묘청 편의 배경 설명에 잠시 등장하는데 이자겸을 척결한 공으로 권세를 얻고 횡포를 부린 것으로 묘사된다. 그 후 정지상에게 탄핵 크리를 맞고 퇴장한다. 지상파 방송에서 척준경의 모습이 묘사된 것은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6.2. 드라마

  • 사극에서는 현재까지 등장한 적은 없지만 <육룡이 나르샤>를 포함해 <뿌리깊은 나무> 세계관에서 가장 강하다고 추측된다. <육룡이 나르샤> 세계관에서 척준경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그의 후손인 척사광의 재능이 생전의 척준경을 연상케 한다는 언급이 작중 내에 있다. 경험조차 부족하지만 재능만으로 이방지, 무휼을 크게 상회하며 카르페이와 동급으로 여겨지는데 남자였던 만큼 체력도 우월했을 것이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일생을 바친 만큼 경험 역시 척사광을 상회했을 테니 사실상 넘사벽인 장삼봉과 동급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 드라마 <도깨비(드라마)> 의 '김신'장군의 모티브 인물이라는 의견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6.3. 웹툰

  • 2014년 1월 30일부터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푸른바람 척준경>이 연재됐다. 척준경의 친구인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나온다. 다만 작품 내에 종종 고증오류가 보이는데 1화에서 이자겸의 난을 조명하고 있는데 왕궁에서 치고받았다고 기록된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려져 있는 데다 이자겸의 난 발발 당시 1126년인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질 않나, 뭣보다 전형적인 문관인 윤관인간흉기급 무관으로 그려진다. 극의 흐름을 위한 각색이라고 보면 되지만 그나마도 조기 완결당한 듯하다.
  • <사신소년>에서 이경호의 25번째 사용 영혼/데스애더의 코어 등 꽤 자주 등장한다. 수식어는 "검성". 작중 등장하는 영혼들 중 가장 많은 버전으로 등장하는데 사용자 기준으로 하면 4가지[27]에 개방 단계를 기준으로하면 9가지 버전이 있다.[28]
역사고증도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석성, 가한목, 영주성 전투 때로 추정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고 이자겸의 난때 가족이 화를 입자 궁궐에 불을 지르고 처들어가는 모습도 나온다.
  • <헬로도사>에서는 척준경의 후손이 나오지만 비형랑에 빙의되어 척준경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위협적인 악역으로 나온다.

6.4. 소설

  • 2022년 1월 28일부터 카카오페이지에서 척준경의 일대기를 다룬 웹소설 <무쌍 척준경>이 연재를 시작했다. 무협 장르로 출간됐는데 대체역사물과 판타지가 혼합된 느낌이 더 강하며 읽다 보면 척준경이나 등장인물들 무력이 너무 황당무계한 수준이다. 다른 웹소설들이 그렇듯 고증이 잘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껏 나온 척준경을 다룬 창작물들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척준경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판타지나 무협을 좋아하며 척준경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은 하다.

7. 관련 문서



[1] 사후 추증된 마지막 공식 직위.[2] 고려 말 대학자 이제현이 쓴 익재난고(益齋亂藁)의 9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4년에 국구(國舅) 이자겸(李資謙)이 평장사(平章事) 탁준경(卓俊卿) 【척준경(拓俊京)을 말한다.】(후략)[3] 내시가 되었는데, 삼촌인 척준신과 함께 살해되었다.[4] 아들 덕에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여기서 검교는 명예직을 의미한다.[5] 문산계라 문관이라고 착각하지만 척춘경은 중앙 정부의 무관들이 밟는 행보를 보였다. 척준경의 행보는 전형적인 무관이다.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군기(軍機) · 왕명의 출납 · 궁중의 숙위(宿衛) 등을 수행하던 관청이었으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후계자 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뿐인 직위였었다. 고려에서 중앙 정부에 속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있었으며, 무산계는 군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 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으므로 척춘경은 무관이 맞다.[6] 이 척(拓)이란 한자를 성씨로 읽을 때는 '척'이 아니라 ''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7] 다만 이자겸을 섬긴 것이 정치적으론 나쁘지 않았던 게,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이자겸을 통해 자신도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8] 중서문하성의 장관은 문하시중. 바로 밑이 문하시랑~평장사다.[9] 풀네임은 '판상서호부사'인데, 줄여서 판호부사라고 불렸다. 당나라의 제도로 치면 원래 중서령과 문하시중도 당태종 때 종2품으로 승격되기 전엔 정3품이었다. 당태종 당시 기준을 보면 상장군은 종2품, 대장군은 정3품, 장군은 종3품, 중랑장은 정4품으로 고려는 문신들은 올려치기를 하고 무신들은 내려치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본인 당의 관제를 보면 정1품이 될려면 작호(爵號)중 왕(王)이 되어야 정1품이 될 수 있다. 군왕(君王)과 사왕(嗣王)은 종1품 上이고 국공(國公)은 종1품 下에 해당되며 그 밑으로 개국군공 등 6개의 작호가 더 있으며 이들은 보통 정3품보다 위에 존재한다. 즉, 종2품부턴 관료 체계가 아니라 작위 체계에 가까운 형태를 볼 수 있다.[10] 이자겸도 인종의 외조부라 사후 검교태사 - 한양공에 추증되었다.[11] 곡산은 고려 때 곡주(谷州)였다.[12] 이 일화를 가지고 윤관과 고려는 정말 비겁하다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에서 비겁하거나 치졸한 방법을 쓰는 것은 결코 문제 되지 않는다. 손자병법에도 싸움을 하는 자는 속임수나 기이한 꾀를 써야 한다(兵者詭道也)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의를 따지며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과정이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물리치는 결과인 것이다. 한 예로 1518년 여진족 속고내의 토벌 사례에서 여진족 추장인 속고내를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에서 조광조가 도적의 꾀로 엄습한다면 의리에 어긋납니다, 선비로써 체면이 있는데 기습은 예의에 어긋난다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어떤 방식이 더 옳은가를 고르기 쉬울 것이다. 또 항우가 미리 준비한 병사들을 숨겨놓고 유방을 잔치에 초대하여 죽이려 했던 홍문의 연이나 아랍의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들을 잔치에 불러서 대접하고 있다가 미리 숨겨둔 병사들을 풀어서 모두 죽였던 사건들이 있듯이 고대 동양에서 잔치를 가장하여 적을 불러들여 죽이는 일은 일상화된 풍습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홍문의 연을 두고 항우의 참모인 범증은 항우더러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우가 유방과 그 부하들을 왜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냈느냐며 그의 결단력이 없음을 비난하였다.다만 앞서 서술된 저 관점은 단순히 전투로만 국한했을때의 얘기고, 여진정벌 문서를 제대로 보면 알 수 있듯 윤관의 친 조선계 여진추장족 척살은 대 전략안으로는 최악의 악수였고, 조선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말 오랫동안 고전하게 된다. 이건 그냥 역사적 사실이다.[13]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14] 2차 웅주성 전투 때는 임언과 최홍정이 구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했다 참패해 위기에 처했으나 오연총이 정예군 1만 명을 데리고 개경에서 급히 달려와 27일 만에 포위에서 벗어났다.[15] 위위시(衛尉寺)의 차관. 종3품. 위위시는 부서명으로 왕실의 의장용 비품을 관리하는 부서다.[16] 중서문하성 소속 서열 8번째 직위. 종3품.[17] 게다가 위의 활약상을 찬찬히 뜯어보면 알겠지만, 여진 정벌의 성과는 척준경 개인의 무예에 크게 의존했으며 당시 고려군 전체로 보면 실책이 많았던 데다가 여진족의 전술로 고려군 일부가 곤경에 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위기 때마다 척준경 본인의 힘으로 타개했는데, 바꿔 말하면 척준경이 아니었다면 크게 패하고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척준경이 자기가 활약한 것만 생각하는 바보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전체적인 전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없었을 경우 여진족과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그것이 대금 사대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18] 당장 최충헌의 경우는 아예 희종이 자신을 제거할 낌새가 보이자 폐위시키기 까지 하였다.[19] 누런 아욱[20] 황제 또는 국왕의 정실과 후궁을 통틀어 일컫는 말.[21] 혜종, 정종(3대), 광종[22] 덕종, 정종(10대), 문종[23] 순종, 선종, 숙종[24] 환관이 아니라 내직관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내시란 흔히 아는 내시가 아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고자인 내시(환관)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일 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그때 정착된 것이다. 물론 고자인 인물이 당시에 환관으로 궁에서 일하기는 했으나 조선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게 아니라 사고로 그렇게 된 자만 이를 채용했다. 조선도 원칙적으로는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만 채용했지만 뽑는 인원이 고려 때보다 많다 보니 몰래 거세해서 들어온 경우가 허다했으며 걸렸을 경우 내시에서 짤렸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25] <난중일기>가 이순신 창작물에 있어 하나의 등불이 되고 지침이 되는 반면 척준경은 '누구를 몇백 명 베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본인이 남긴 어록은커녕 명언 한마디도 없어서 무슨 생각하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26] 비슷한 인물로는 여포가 있는데 배신하는 인생으로 살아왔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정사보다 무력이 더 부각되면서 책이든, 게임이든, 드라마든 멋진 무예를 뽐내며 신 스틸러 역할을 한다. 척준경도 비슷하게 그려질 수 있다.[27] 이경호(영혼,코어),이신(영혼),데스애더(코어)[28] 영혼 빙의 2개, 영혼 지배 1개, 영혼 동기화 2개, 코어 개방 2개, 코어 폭주 1개, 완전코어개방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