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6:49:59

서전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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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제21부인
서전원부인 | 西殿院夫人
생몰년 미상
성씨 기록실전[추정A]
부모 기록실전[추정B]
부군 태조
자녀 기록없음
직위 부인(夫人)
작호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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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창업군주 태조의 제21부인. 태조의 부인들 중에서 본관과 성씨 그리고 부모의 기록 모든 것이 실전되서 끝내 의문으로 남은 인물이다.

2. 생애

태조의 부인들 가운데 관계기록이 전무한 경우는 이 비가 유일하다. 이처럼 기록이 인멸된 이유는 고려 왕실에서 차지하는 서전원부인의 위치가 높지 못하였거나 혹은 그녀의 가문이 대역죄를 지어 기록말살형에 처했을 수도 있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 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 온 지방군벌 호족신라 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

서전원부인의 위치로 보아 신라 왕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나머지 중 한 가지 방법으로 태조를 도왔을 것이며, 이러한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태조는 서전원부인을 후비로 맞아들였다고 생각된다.

남아있는 기록 중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궁원인 서전원을 보면 매우 특이한 작명인데 풀이하자면 앞에 서(西)는 지역명으로 서경의 서를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전(殿)이 붙은 것이 특이한 점이다. 본디 전(殿)원(院)은 양립하지 않고 규모에 따라 확연히 구분됐음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를 당호에 포함한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이다.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간접적으로 연결고리를 찾아 추정을 해보자면 922년 김행파와 함께 서경으로 이주하는 시중 박질영(侍中 朴質榮)이라는 인물있는데 태조의 서경 행적상 박질영이 그녀의 아버지일 수 있으며 그 시기에 태조의 후비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금석문 기록 상 패강-서경을 기반으로 하는 박씨가 확인이 되는 바이다.

최근에는 〈징효대사탑비〉에 나오는 필영대왕(弼榮大王)이 실제로는 대광(大匡)이라는 설이 제기되면서, 서전원부인의 아버지가 대광 필영이고 영(榮) 돌림을 공유하는 박질영과 형제 관계라는 가설이 나타났다. 필영과 같은 행에 나타나는 영장(월화원부인의 아버지)과 왕경(정목부인의 아버지)이 둘 다 왕건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3. 가족관계

  • 친정
    • 기록실전
  • 배우자 / 남편
    • 남편 : 태조 왕건(王建)

[추정A] 세간에는 서경 박씨로 추정된다.[추정B] 부친 - 시중 박질영(侍中 朴質榮)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