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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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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혜종 정종(定宗)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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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성종 목종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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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 정종(靖宗) 문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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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헌종 숙종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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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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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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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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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
高麗王朝
918년 ~ 1392년
파일::012222.jpg 파일:고려 국새 인영.svg
고려 국왕의 자황포(柘黃袍)
고려 말기의 국새[1]
국성
개성 왕씨
창건자
태조 (918년 ~ 943년)
마지막 군주
공양왕 (1389년 ~ 1392년)
국호
고려 (918년 ~ 1392년)
군주 직함
대왕 (918년 ~ 950년)
황제 (950년 ~ 963년)
대왕 (963년 ~ 1392년)
통치 국가
고려 (918년 ~ 1392년)
탐라국 (938년 ~ 1392년)
우산국 (930년 ~ 1022년)
君王萬歲, 天下太平
군왕 만세, 천하 태평
고려 당악정재 왕모대가무 中
其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
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팔표가 내정하며 천하가 태평하다.
고려 중동팔관회 中

1. 개요2. 역대 군주3. 계보도
3.1. 태조 이전3.2. 초기3.3. 중기3.4. 후기
4. 원 심왕 작위 보유자5. 추존 군주6. 비정통 군주7. 제후왕 목록8. 왕족들의 후일담(야사)9. 여담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역대 군주들의 정보를 정리한 문서.

2. 역대 군주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군주들의 시호는 군주의 총서세가 마지막 조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총서 기준으로 작성했고 세가 마지막 조 기준은 각 군주들의 문서에서 볼 수 있다.
대수 묘호 시호 휘(이름) 재위 기간 능호 비고
01 태조
(太祖)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왕건(王建)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현릉(顯陵)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2032304247a010a011.jpg
고려 건국, 초대 군주
불천지주
02 혜종
(惠宗)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
(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왕무(王武) 943년 5월 30일 ~ 945년 9월 15일 순릉(順陵) 장자 계승
불천지주
03 정종
(定宗)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왕요(王堯) 945년 9월 15일 ~ 949년 3월 13일 안릉(安陵) 형제 계승
04 광종
(光宗)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
왕소(王昭) 949년 3월 13일 ~ 975년 5월 23일 헌릉(憲陵) 형제 계승, 칭제[2]
05 경종
(景宗)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
(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왕주(王伷) 975년 5월 13일 ~ 981년 7월 11일 영릉(榮陵) 장자 계승
06 성종
(成宗)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왕치(王治) 981년 7월 12일 ~ 997년 10월 27일 강릉(康陵) 종형제, 사위 계승[3]
07 목종
(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
(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왕송(王誦) 997년 10월 27일 ~ 1009년 2월 3일 의릉(義陵) 숙질, 사위 계승[4]
08 현종
(顯宗)
달사덕위대효원문대왕
(達思德威大孝元文大王)
왕순(王詢) 1009년 2월 3일 ~ 1031년 5월 23일 선릉(宣陵) 신하에 의한 추대[5][6]
불천지주
09 덕종
(德宗)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
(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
왕흠(王欽) 1031년 5월 23일 ~ 1034년 9월 17일 숙릉(肅陵) 장자 계승
10 정종
(靖宗)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
(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
왕형(王亨) 1034년 9월 17일 ~ 1046년 5월 18일 주릉(周陵) 형제 계승
11 문종
(文宗)
장성인효대왕
(章聖仁孝大王)
왕휘(王徽) 1046년 5월 18일 ~ 1083년 7월 18일 경릉(景陵) 형제 계승
12 순종
(順宗)
정헌영명선혜대왕
(靖憲英明宣惠大王)
왕훈(王勳) 1083년 7월 18일 ~ 1083년 10월 23일 성릉(成陵) 장자 계승
13 선종
(宣宗)
안성사효대왕
(安成思孝大王)
왕운(王運) 1083년 10월 24일 ~ 1094년 5월 2일 인릉(仁陵) 형제 계승
14 헌종
(獻宗)
정비공상대왕
(定比恭殤大王)
왕욱(王昱) 1094년 5월 2일 ~ 1095년 10월 7일 은릉(隱陵) 장자 계승
15 숙종
(肅宗)
강정문혜명효대왕
(康正文惠明孝大王)
왕옹(王顒) 1095년 10월 8일 ~ 1105년 10월 2일 영릉(英陵) 숙질 계승[7]
16 예종
(睿宗)
제순명렬문효대왕
(齊順明烈文孝大王)
왕우(王俁)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유릉(裕陵) 장자 계승
17 인종
(仁宗)
극안공효대왕
(克安恭孝大王)
왕해(王楷) 1122년 4월 6일 ~ 1146년 2월 28일 장릉(長陵) 장자 계승
18 의종
(毅宗)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왕현(王晛)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희릉(禧陵) 파일:의종(고려).jpg
장자 계승
19 명종
(明宗)
황명광효대왕
(皇明光孝大王)
왕호(王晧) 1170년 9월 기묘일 ~ 1197년 9월 계해일 지릉(智陵) 신하에 의한 추대, 형제 계승
20 신종
(神宗)
경공정효대왕
(敬恭靖孝大王)
왕탁(王晫) 1197년 9월 계해일 ~ 1204년 1월 13일 양릉(陽陵 ) 신하에 의한 추대, 형제 계승
21 희종
(熙宗)
인목성효대왕
(仁穆誠孝大王)
왕영(王韺) 1204년 정월 가사일 ~ 1211년 12월 계묘일 석릉(碩陵) 장자 계승
22 강종
(康宗)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浚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清元孝大王)
왕오(王祦) 1211년 정월 기사일 ~ 1213년 8월 9일 후릉(厚陵) 신하에 의한 추대, 사촌 계승
23 고종
(高宗)
안효대왕(安孝大王)
충헌왕(忠獻王)[A]
왕철(王㬚) 1213년 8월 무인일 ~ 1259년 6월 30일 홍릉(洪陵) 장자 계승
24 원종
(元宗)
순효대왕(順孝大王)
충경왕(忠敬王)[A]
왕정(王禎) 1259년 6월 임인일 ~ 1274년 6월 18일
1269년 11일 ~ 1274년 6월 18일
소릉(昭陵) 장자 계승, 마지막 대왕(천자)
25 -[B] 경효대왕(景孝大王)[C]
충렬왕(忠烈王)[D]
왕거(王昛) 1274년 6월 계해일 ~ 1298년 1월 갑진일
1298년 8월 임신일 ~ 1308년 7월 갑인일
경릉(慶陵) 장자 계승, 원 간섭기 시작
26 -[B] 헌효대왕(憲孝大王)[C]
충선왕(忠宣王)[D]
왕장(王璋)
[16]
1298년 1월 병오일 ~ 1298년 8월 임신일
1308년 8월 갑인일 ~ 1313년 3월 갑인일
덕릉(德陵) 파일:IMG_6315.jpg
삼자 계승[17], 심왕 겸직
27 -[B] 의효대왕(懿孝大王)[C]
충숙왕(忠肅王)[D]
왕만(王卍)
[21]
1313년 3월 갑인일 ~ 1330년 7월 갑자일
1332년 2월 갑자일 ~ 1339년 3월 계미일
의릉(毅陵) 차자 계승[22]
28 -[B] 헌효대왕(獻孝大王)[C]
충혜왕(忠惠王)[D]
왕정(王禎)
[26]
1330년 2월 초하루 임오일~1332 2월 갑자일
1339년 3월 계미일~1343년 12월 계축일
영릉(永陵) 장자 계승
29 -[B] 현효대왕(顯孝大王)[C]
충목왕(忠穆王)[D]
왕흔(王昕)
[30]
1344년 2월 정미일 ~ 1348년 12월 5일 명릉(明陵) 장자 계승
30 -[B] -
충정왕(忠定王)[D][33]
왕저(王胝)
[34]
1348년 12월 ~ 1351년 10월 임오일 총릉(聰陵) 형제 계승
31 -[35]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36]
공민왕(恭愍王)[37]
왕전(王顓)
[38]
1351년 10월 ~ 1374년 현릉(玄陵) 파일:화장사에 봉안된 공민왕 어진를 찍은 유리건판 사진.jpg
숙질 계승[39], 원 간섭기 청산
32 -[C] -
,<여흥왕(驪興王)>[41],
왕우(王禑)[42] 1374년 9월 병술일 ~ 1389년 6월 경술일 - 신하에 의한 추대, 장자 계승
33 -[C] -
,<윤왕(允王)>[44],
왕창(王昌) 1388년 6월 ~ 1389년 11월 무인일 - 신하에 의한 추대, 장자 계승
34 -[45] 공양왕(恭讓王)[46] 왕요(王瑤) 1389년 11월 ~ 1392년 7월 17일 고릉(高陵) 신하에 의한 추대, 마지막 군주

3. 계보도

  • 이름인 휘(諱)만 기재되어 있다. 성씨는 모두 왕(王)이다.
  • 굵은 글씨는 추존되었거나 즉위해서 군주가 된 인물이다.
  • 여성의 이름은 일괄적으로 자칭한 성씨로 그 이름을 대체한다. 이는 고려사 후비열전에 있는 “이에 아들을 딸에 장가보낼 때 이름은 외가의 성을 칭한다(以子聘女, 諱稱外姓)”는 구절에 근거하며, 실제로 성평왕후에 대해 “이름은 임씨를 칭한다(諱稱任氏)”고 적혀있어 외가의 성을 여성의 이름으로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성씨가 여러 명 있는 경우 등장한 순서에 따라 숫자를 붙여 표기한다.
  • 배우자와 항렬을 맞추기 위해 임의로 가로 두 칸씩 표기되는 인물이 존재한다.

3.1. 태조 이전

호경
강충
보육
진의
?건
작제건
용건
왕건

3.2. 초기

1.

+류씨1
+오씨1 2.

+임씨진주2
임씨진주3
+유씨1 3.

+박씨승주2
+박씨승주3 박씨승주4
4.

+황보씨2
5.

+김씨2
+유씨7
+황보씨3 7.
+황보씨4
유씨2
유씨3
+황보씨1 황보씨2
황보씨3
황보씨4
6.
?
+류씨6
류씨7
+김씨경주1/이씨합주1
+유씨
김씨경주3/이씨합주3
+황보씨4 8.

+김씨안산1
9.
10.
김씨안산4
김씨안산5
+김씨안산2 11.
김씨안산6
+김씨안산3 김씨안산7
+류씨2 ? 류씨6
류씨3
류씨4
류씨5
+평씨 ? 유씨8
+왕씨명주2 왕씨명주3
+유씨평주
?
+임씨천안 ?
+임씨진주1 주림
+박씨승주4

태조 왕건의 경우 호족을 끌어안는 정책을 펼치느라 많은 부인을 두었고, 그로 인해 외가의 세력이 가장 약한 장남인 무의 후계를 강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애매하게 위치를 설정하는 바람에 이후 복잡다난한 왕위계승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 즉 혜종은 결국 오래가지 못해 죽고 말았고 이후 그의 뒤를 이은건 이복동생인 요 즉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의 경우 서경의 왕식렴 세력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올랐기에 재위 초반에 개경의 귀족들이 많이 죽어나가는 결과를 맞았고, 이후 서경으로의 천도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종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고, 다시금 왕위는 그의 동복동생인 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소 즉 광종은 원래 왕위에서 거리가 멀었다고 당시 귀족들이 생각했는지 혼인관계를 호족들과 맺지 않고 자신의 이복여동생 대목왕후와 혼인을 한 상태였고, 자신의 조카인 혜종의 딸 경화궁부인 임씨와도 혼인 상황에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은 어머니와 아내들을 통해 호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호족의 딸과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호족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황에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고 재위 후반부에는 피를 부르는 숙청작업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숙청 작업은 그의 아들인 주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물론 주가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살아남아서 경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런 영향력으로 인해 그의 재위기도 순탄치만은 않게 되었다.

한편 경종은 모두 사촌들과의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태조의 첫 번째 아내 헌숙왕후 김씨는 고모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혼인해서 얻은 딸로 그의 고종사촌이 되고, 두 번째 아내 헌의왕후 유씨는 삼촌인 문원대왕의 딸로 사촌지간이 된다. 하지만 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봤을 때에는 오래 못가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아내와 네 번째 아내가 되는 헌애왕후 황보씨와 헌정왕후 황보씨는 모두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의 남동생인 대종과 태조의 6번째 아내 정덕왕후 유씨의 딸인 선의왕후 유씨의 딸로 한마디로 경종에게는 외사촌이 된다. 마지막 후궁은 대명궁부인 유씨도 자신의 고모 흥방궁주와 역시 정덕왕후 유씨의 아들 원장태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어서 역시 고종사촌이 된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경종의 유일한 자식인 송을 낳은 건 헌애왕후 황보씨가 유일했다.

경종은 재위 후반부에 몸이 상하게 되어 결국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송의 나이가 어린 탓에 경종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여 자신의 외사촌이자 자신의 누이인 문덕왕후의 남편이고 또한 두 아내들의 오빠가 되는 치 즉 성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게 된다.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며 여러 개혁 작업을 펼치면서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딸들만 낳았고 본인이 송을 대신해 올랐다는 점 때문인지 이른 시기부터 송을 자신의 후계로 삼았다.

한편 이 때쯤 되면 고려에는 왕건의 직계자손의 씨가 거의 마르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된 점에는 광종 대와 경종 대에 있었던 여러 숙청과 중첩되어 누적되어온 근친혼의 결과라 볼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성종의 누이이자 선대 군주인 경종의 네 번째 아내 헌정왕후 황보씨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내 신성왕후 김씨의 아들 욱이 사통해서 낳은 순, 그리고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송 즉 목종만 남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47] 그래서 유교를 중시한 성종이었음에도 순을 궁궐에서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천추태후가 되어 국정을 좌우하게 되고 그 천추태후는 자신의 애인인 김치양을 궁궐로 들이고 그와의 사이에서 자식도 보는 등 여러모로 고려 왕조에는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천추태후는 자신과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순을 절로 보내고 암살까지 시도하는 등 여러 작업들을 하게 되지만 강조의 정변을 맞게 되어 결국 목종이 폐위당하고, 순이 현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현종은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맞았지만 최악의 위기속에서도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면서 고려를 반석위에 올리게 되고, 당시 사람들로부터 요순에 비유될 정도의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후 고려왕계는 현종의 자손들로 이어지게 된다. 현종의 장남 흠, 차남 형이 차례로 덕종, 정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덕종의 경우에는 딸만 있어서 그대로 정종에게 이어졌고, 정종의 경우에는 자식이 있었으나 자신이 꽤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아직 자식들이 어린 점, 그리고 동생인 휘가 꽤나 뛰어난 면모를 보였기에 그에게 왕위가 이어진다.

3.3. 중기

11.

+이씨1 ­
12.

+이씨6
13.

+이씨7
이씨12
+이씨8 14.
이씨13
+이씨9
15.

+류씨8
16.

+이씨14
17.

+임씨1
18.

+김씨3
18-1
18-2
18-3

+김씨4
19’-1
19.

+김씨5
22.

+류씨9
23.

+류씨10
­24.
23-1
+이씨전주 22-1
19-1
19-2
20.

+김씨6
21.

+임씨2
류씨10
21-2
21-3
21-4
21-5

+왕씨

+21-5
20-1
20-2
17-1
17-2
17-3
17-4
+김씨1 ­
+이씨15 ­
+이씨16 ­
16-1
16-2

+13’-2

+왕씨

+17-4

+19-2
왕씨

+이씨17
16’-1

+17-2
왕씨
15-1
15-2
15-3
15-4
11-1
11-2
+이씨2 ­
+이씨10

+15-3

+16-2

+김씨2

+17-1
왕씨

+18-3
김씨3
김씨4
김씨5
김씨6

+11-1

+이씨11

+15-1

+15-4
왕씨
13’-2
+이씨3 ­

+이씨4

+11-2

+15-2

+16’-1
왕씨

+16-1

+17-3

+19’-1

+21-2

+보르지긴씨

+20-1
+22-1
+21-4

+19-1

+20-2

+23-1
임씨2
류씨9

+18-2

+18-1
+이씨5

두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휘 즉 문종은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문제는 그러다보니 권력에 대한 이완이 생기면서 이른바 문벌귀족들이 왕권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인주 이씨 가문의 이자연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이자연의 자손들이 세력 확대를 하게 되면서 왕권이 제약받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문종의 장남인 훈 즉 순종이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재위기간을 오래 갖지 못하고 죽었으며, 차남인 운 즉 선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선종이 어린 아들 욱만을 남기고 죽게 되자 여기서부터 문종 말년부터 중첩되어오던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욱 즉 헌종은 병치레가 잦아서 모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만 권력이 너무나 강대해진 인주 이씨 세력의 왕위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역시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계림공 희의 야심으로 인해서 완전히 꼬인 상황이 되었고, 그 상황에서 헌종은 숙부 희에게 양위하게 된다. 이후 왕위에 오른 희는 숙종이 되어 왕권을 강화시키는 군주가 되었지만 문벌귀족세력의 견제를 위해 측근의 세력이 커지는 단점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숙종의 아들 우 즉 예종은 명민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오른 후 여진정벌도 이루고 여러모로 현군이자 강군으로 자리잡았지만 문제는 그가 어린 아들 해만 남기고 죽었다는 점에 있다.

1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해 즉 인종은 고려 왕조가 형제상속이 당연시되던 상황이었고, 당장에 자신의 할아버지인 숙종이 인종과 같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조카 헌종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를 받았던 경험이 있던지라 왕위 계승 자체가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인종은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자겸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단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이자겸은 왕위까지 위협하게 되고 고려 왕조는 외척에 의해 왕이 유폐당하게 되는 이자겸의 난이라는 위기까지 맞게 된다. 이자겸의 난을 간신히 진압한 인종은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경세력을 키우고 서경으로의 천도운동을 시도하지만 개경세력의 반발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서경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후 서경세력의 반란은 묘청의 난을 맞게 된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는 개경파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가 되었고, 왕권은 약화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인종의 아들 현이 의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군주가 될 자질이 부족한 편이었고, 아버지 대에 추락한 왕권을 살리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해대는 바람에 그 상황에서 무신들의 반발이 불러오게 되었고, 무신정변을 맞게 된다. 그로 인해 강조의 정변 이후 처음으로 왕위가 신하들에 의해 바뀌는 결과를 얻게 되었고, 왕위는 의종의 동생인 호가 명종이 되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후 고려는 무신들이 조정을 차지하게 되었고, 왕권은 무신들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명종은 여러 무신 집권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 쟁탈전을 겪으면서 버텨왔으나 여러 차례의 농민 반란들로 인해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치세였고, 마지막 권력 쟁탈전의 승자인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동생인 평량공 민을 신종으로 올리게 되면서 명종의 치세도 막을 내린다. 이후 최충헌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되었고, 신종의 아들 영 즉 희종의 친위 쿠데타도 진압하고 이후 폐위되었던 명종의 태자 오를 다시 불러올리며 강종으로 옹립한다. 강종의 짧은 지세 이후 왕위에 오른 철 즉 고종은 비록 오랜 제위 기간을 지녔으나 최충헌이 이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인지라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최충헌의 경우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최씨 세습 정권의 막을 올렸고, 이러던 중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게 된다.

한편 고종은 재위 말년에 몽골의 강화를 시도하며 최씨 정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고, 그러던 중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죽고 새로운 집권자인 김준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몽골에 입조하려 간 태자 전은 쿠빌라이와 만나게 되면서 그야말로 자신과 고려의 운명을 바꾸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후 전은 고종이 죽자 왕위에 올라 원종이 되는데 강화도에서 있는 동안 몽골의 힘을 받으며 무신집권자들과 대립을 하였고, 1270년 결국 100년간 전개되었던 무신정권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리고 개경으로 환도하고 쿠빌라이의 딸과 자신의 아들 거와의 혼인을 추진하는 등 친원정책을 펼치고, 결국 그 혼인을 성공시키며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과 연결이 되는 상황이 된다.

3.4. 후기

­24.

+김씨전주
25.

+쿠틀룩켈미시
26.

+예수진
27.
?
28.
29.
30.
31.
32.
33.
+?
+김씨언양 26-1
+
27.

+노룬
덕수 28.
독타불화
왕씨
25-1
25-2
­+류씨11
24-1
24-2

+25-2

+24-2

+황보

+박(밀양)

+신(이천)
34.
(35).
(36).
류씨11

+24-1
+25-1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한 거 즉 충렬왕은 원의 부마 자격으로 고려의 왕위를 이어가게 된다. 이 때부터 고려 군주들은 묘호를 받지 못하고 O왕으로 불리게 된다. 충렬왕의 경우 쿠빌라이의 사위 자격으로 여러 협상을 성공시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 간섭기라는 점은 없어지지 않아서 결국 원의 제후국으로 격하당하고 만다. 그러다가 부인인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그의 아들이었던 원과의 대립이 수면위에 오르게 되고 결국 원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다. 왕위에 오른 원 즉 충선왕은 즉위 이후 여러 개혁작업을 펼치지만 그러한 개혁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 아니냐는 원의 의심과 아내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인해서 왕위에 오른지 불과 8개월만에 쫓겨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편 충렬왕은 자신의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고려 왕족과 혼인 시켜서 그의 아들인 충선왕의 즉위를 막고자 하였다. 결국 충렬왕과 충선왕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활을 건 다툼은 원의 황위계승과도 맞물리게 된다. 당시 충렬왕은 안서왕 아난다를 밀었고, 충선왕은 카이산 형제를 밀었는데 충선왕이 폐위되어 원에 머무르던 시절 때 카이산 형제와 어울러 지냈기에 이런 지지가 가능했고 카이산이 새로운 황제로 오르게 되자 충선왕의 위치는 그야말로 막강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아들과의 다툼에서 실패한 충렬왕은 쓸쓸하게 고려로 돌아와서 죽게 되었고 충선왕이 다시금 고려 군주로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충선왕은 이미 원의 생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결국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금 원의 대도에 머무르면서 전지정치를 행하게 된다. 이러한 전지정치는 당연히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고, 고려에 있는 신하들은 충선왕의 귀국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자 감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가 생기자 결국 충선왕이 세자를 죽이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만다. 하지만 얼마 못가 충선왕은 왕위를 강릉대군 왕만에게 물러주게 된다. 이후 충선왕은 원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심지어 원 최고 직책인 우승상자리까지 제안받게 되지만, 그러한 권력으로 인해 반대파의 참소를 받고 티베트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인 태정제에 의해 돌아오게 되었지만 더이상 원에서 중용되지 않았고 이후 대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새로이 고려 왕위에 오른 만 즉 충숙왕은 여러모로 좋은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으나 아버지 충선왕이 심왕의 자리를 자신의 이복조카 왕고에게 내주는 바람에 왕고에게 끊임없이 왕위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자주 원나라로 송환되는 상황이 되면서 지쳐버려서 자신의 아들 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건너가게 되지만, 왕위에 오른 정, 즉 충혜왕은 역대급 폭군이어서 결국 2년만에 폐위당하고 다시금 충숙왕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복위한 충숙왕은 정사에 손을 놓은 상황이었고, 얼마 못가 죽었다. 이후 다시금 복위한 충혜왕은 역시나 폭군의 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폐위당하고 만다. 이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흔이 충목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어머니인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다가 어린 나이에 자식 없이 죽고 말았고, 이후 충목왕의 동생인 저가 충정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역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머니인 희비 윤씨 세력의 발호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결국 어린 군주들로는 고려가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한 고려 조정에서 충숙왕의 차남이자 충혜왕의 동복동생인 강릉대군 전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에 요청했고 이를 원이 받아들이면서 충정왕도 폐위되고 말았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전 즉 공민왕은 부원세력을 척결하고,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등 여러 개혁정책을 통해 고려의 국운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였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고, 재위 후반부는 암군의 행태를 보이면서 말년에는 시해당하는 상황이 발생되었고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우는 왕위에 올라서 할머니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지만 본인을 왕위에 올린 이인임의 기세가 상당한 편이었고 결국 이 기세에 밀리면서 막장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우는 성장하면서 원이 북쪽으로 완전히 쫓겨난 상황을 통해 부원세력이자 권신이었던 이인임을 최영-이성계 연합을 통해 몰아내는데 성공하며 성공적인 군주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로부터 시작된 요동정벌 움직임으로 인해 최영과 이성계가 갈리게 되었고,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가 쿠데타인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이성계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그로 인해 우는 이성계 등의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로 인해 왕위에서 폐위당한다. 이후 우의 아들 창이 옹립되지만 얼마 못가 우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창이 폐위당하게 되고 우와 창 둘 다 모두 귀양지에서 각각 25살과 10살의 나이로 처형당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이어져오던 고려의 직계는 여기서 끊기게 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사람인 정창부원군 왕요는 한참 전에서 갈라져 나온 계보인지라 고려왕조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없다 봐야 하고, 얼마 못가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에 따라 고려 왕조는 475년만에 멸망했다.

4.심왕 작위 보유자

순서 휘(이름) 재위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왕장(王璋)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
1307년 혹은 1308년 ~ 1316년 1275년 ~ 1325년 고려 충선왕
02 왕고(王暠)
왕올제이투(王完澤禿)
1316년 ~ 1345년 ? ~ 1345년 충렬왕의 손자
심양왕 → 심왕으로 격상
03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 / 王脫脫不花) 1354년 ~ 1376년 ? ~ 1376년 연안군 왕고의 손자

5. 추존 군주

묘호 시호 휘(이름) 생몰년도 능호
시조(始祖) 원덕대왕(元德大王) ?[48] ? ~ ? -
국조(國祖)
의조(懿祖) 경강대왕(景康大王) 작제건(作帝建) ? ~ ? -
세조(世祖)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왕륭(王隆) ? ~ 897 창릉(昌陵)
대종(戴宗)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 왕욱(王旭) ? ~ 969 태릉(泰陵)
안종(安宗)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 왕욱(王郁) ? ~ 996 무릉(武陵)
- 변한국영헌공(卞韓國英憲公) 왕영(王瑛) ? ~ 1291 -
- 진한국인숙공(辰韓國仁肅公) 왕분(王玢) ? ~ ? -
- 마한국인혜공(馬韓國仁惠公) 왕유(王瑈) ? ~ 1360 -
- 삼한국인효대공(三韓國仁孝大公) 왕균(王鈞) ? ~ ? -

국조, 의조, 세조는 각각 태조의 조상들을 다룬 고려세계(高麗世系)를 통해 알려져 있다.

6. 비정통 군주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한 왕족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묘호도,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49] 외부 세력에 의해 옹립된 처지라 고려의 정식 군주로 보지 않는다.
묘호/작위 휘(이름) 재위기간 비고
영종(英宗)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 1269.06.21 ~ 1269.11 권신 임연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여 잠시 왕위에 올랐었다.
승화후
(承化侯)
왕온(王溫) 1270년 6월-1271년 5월 삼별초에 의해 추대됨.
덕흥군
(德興君)
왕혜(王譓)[50] 1351년 원혜종기황후에게 군주로 책봉되어[51] 공민왕에게서 찬탈하려 했으나 실패

7. 제후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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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 상보 상보 낙랑군왕 실직군왕 문원대왕
견훤 김부 김위옹 왕정
<rowcolor=#670000> ▨▨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미상) (미상) 왕기 왕도
<rowcolor=#670000> 탐라국왕 우산국왕
}}}}}}}}}
작위 휘(이름) 생몰년도 비고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 ~ ? [52]
▨▨대왕(▨▨大王) ? ~ ?
필영대왕(弼榮大王) ? ~ ?
정간왕(靖簡王) 왕기(王基) 1021 ~ 1069 평양공(平壤公)[53]
양헌왕(禳憲王) 왕도(王濤) ? ~ 1099 조선국양헌왕(朝鮮國禳憲王)[54]

1997년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흥녕사지에서 발견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가 2000년 이후에 판독되면서 비문에 왕요군(정종), 왕소군(광종), ▨▨대왕, 필영대왕(弼榮大王) 등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대왕은 남아있는 자형이 '文元'과는 차이가 있어 별개의 인물로 보이며, 필영대왕과 함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년)에 비문을 지었으나 944년(혜종 2년)에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에는 징효대사의 제자(실질적으론 후원자) 명단을 새겼는데, 정종이나 광종이 '군'으로 언급됨에도 '대왕'으로 표기되는 점으로 보아, 탑비가 세워진 944년 이전에 죽어서 왕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왕작을 받은 것으로 보아 당대에는 상당한 권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원대왕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최근에는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大王' 부분이 원래는 '대광(大匡)'이었으며 '匚'획이 마모된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했다. 왕족 인물로 확인되는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지만 ▨▨대왕과 필영대왕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논지이다.

8. 왕족들의 후일담(야사)

조선의 반체제인사(?) 남효온의 《추강냉화》나 야사 수집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 각종 야사에 의하면, 고려가 멸망하자 왕씨들이 다시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봐 겁먹은 태조 이성계가 왕씨들을 불러 섬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구라친 뒤 배에 구멍을 뚫어 몰살시켰다. 하지만 일부 왕씨들은 아시다시피 전씨(全, 田)나 옥씨(玉), 아니면 군주를 상징하는 용씨(龍), 심지어는 심문을 받게 되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하여 내씨(乃) 등으로 성을 고쳤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야사다.

물론 왕씨들을 대거 몰살시킨 것은 맞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에 왕씨 중 한 명이 연루된 반역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사헌부와 형조 등에서 왕씨들을 몰살하여 화근을 제거하자고 거듭 상소를 올리자 고려의 왕족이 불안했던 태조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명을 내려 그해 3월에 강화도와 거제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죄다 물에 던져 죽이게 하였다. 대신 한 집안만은 남겨서 제사를 이어가게 했다. 그것도 자기 사돈 집안. 우왕과 동명이인인 왕우 집안으로, 조선 초기 잘먹고 잘살다가 왕자의 난에 휘말려 멸문당했으며 이후 조선은 고려 군주의 제사를 위해 방계 왕씨를 찾아야 했다. 이렇게 남겨서 왕씨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를 봄과 가을마다 지내게 하였다.

이성계가 왕씨를 멸족시킨 그날 밤, 태조 왕건의 귀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왜 죄없는 내 후손까지 죽이느냐? 너도 죽을래?"라는 협박[55]에 혼난 이성계가 왕씨 족보에서 한 장을 찢어 그 왕씨들은 무죄방면(?) 해주었다는 야사도 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출세한 왕씨가 드물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고등학교 때 왕방연이란 금부도사가 지은 시조를 배운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고려 왕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개성 왕씨 문서 참조.

9. 여담

  • <훈요 10조>에서부터 형제 상속의 가능성을 명시했기 때문인지, 현 군주에게 어린 아들이 있음에도 대신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은 사례가 상당히 많다.[56]
    • 혜종 - 정종 - 광종
      태조의 아들. 혼인정책에 따른 호족들의 갈등으로 형제 상속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혜종에게는 흥화궁군과 왕제라는 두 아들이, 정종에게는 경춘원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 덕종 - 정종 - 문종
      현종의 아들. 덕종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덕종 → 정종은 혜종~광종 대 처럼 의도적인 형제승계라기보다는 종법에 따른 부자승계의 형태로 봐야한다. 정종은 애상군, 낙랑후, 개성후라는 아들이 있었다.
    • 순종 - 선종 - (헌종) - 숙종
      문종과 인예태후의 아들. 선종의 아들 헌종이 1년 남짓 왕위에 올랐지만 외척과 종친 양파의 대결 끝에 숙종에게 양위하게 된다.
    • 의종 - 명종 - 신종
      인종과 공예태후의 아들. 명종과 신종은 무신정권에 의해 형이 폐위되고 옹립된 것이라 형제 상속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약간 애매하긴 하다. 명종의 아들 강종은 왕위 계승에서 밀렸다가 후일 군주로 추대된다.
    • 충목왕 - 충정왕
      충혜왕의 아들. 다만 충목왕이 아들 없이 요절하여 형제 상속된 사례이다.
    • 충혜왕 - 공민왕
  • 고려의 역대 군주 34명의 평균 재위 기간은 14년이 채 안된다. 그나마도 중간에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던 경우까지 따진다면 만 12년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조선의 만 19년 2개월에 비하면 정말이지 짧다.[57]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사 메이저급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제일 짧다.[58] 군주들의 재위 기간이 긴 편에 속하는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두드러지는데, 고구려보다 230년 짧게 존속했으면서 군주는 6명 더 많다.[59] 살해당한 왕도 8명[60]이나 된다. 이런 이유로 고려 왕들의 평균 수명은 41세 남짓에 불과했다.[61]
  • 재위 직후 단명한 군주는 특수 사례인 강종을 제외하고 혜종, 정종(3대), 경종, 덕종, 순종, 헌종, 충목왕으로 7명, 시해당한 군주는 목종, 의종,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7명, 폐위당한 군주는 명종, 희종, 충선왕(1기), 충혜왕(1기/2기) 4명이다.[62] 결국 곱게 살지 못한 군주가 자그만치 18명이다. 여기에 신종이나 강종, 고종은 무신정권 치하라 곱게 왕위를 보내지도 못했다.[63] 특히 의종부터는 왕들이 고종 말고는 정상적으로 승계-정상적으로 퇴위를 밟지 못하고 폐위, 복위, 피살, 강제 옹립 중 1개 중 하나 이상을 밟게 된다.
  • 반면 8대 현종 말기부터 15대 숙종, 16대 예종까지 덕종, 순종, 헌종의 단명과 정치적 혼란을 제외하고 총 94년, 100여년간 7명의 명군들이 줄지어 왕위에 올랐다. 이 일곱 군주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16년(덕종 제외시 18년), 수명은 만 40.6세, 덕종 제외시 만 45세에 달한다. 기록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동국통감》과 같은 국내 사서와 《송사》, 《요사》등의 기록만으로도 11세기는 모든면에서 고려가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 ## 참고. 동시에 문벌귀족 가문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훗날 인종, 의종 때의 혼란과 무신정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 최단 재위는 12대 순종(1083년, 약 3개월), 2위는 14대 헌종(1094년 음력 5월 ~ 1095년 음력 10월, 1년 5개월)과 33대 창왕(1388년 음력 6월 ~ 1389년 음력 11월, 1년 5개월), 4위는 2대 혜종(943년 ~ 945년, 2년 4개월(111일)), 5위는 22대 강종(1211년 ~ 1213년, 2년 7개월), 6위는 30대 충정왕(1348년 ~ 1351년, 2년 10개월) 순이다. 강종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만 61세까지 살았다.
  • 최장 재위는 고종(1213년 ~ 1259년, 45년 10개월), 문종(1046년 ~ 1083년, 37년 79일), 명종(1170년 ~ 1197년, 27년 23일), 충렬왕(1274년 ~ 1308년, 23년 5개월 + 9년 11개월 = 34년 4개월), 태조(918년 ~ 943년, 24년 350일) 순이다.
  • 수명이 제일 길었던 군주는 25대 충렬왕(만 72세 119일), 19대 명종(만 71세 25일, 단, 만 66세에 폐위), 23대 고종(만 67세 185일), 태조 왕건(만 66세 155일), 문종(만 63세 263일) 순이고, 수명이 제일 짧았던 군주는 33대 창왕(만 9세 127일), 29대 충목왕(만 11세 234년, 재위 4년 10개월), 14대 헌종(만 13세), 30대 충정왕(만 14세) 순. 다만 창왕은 자연사가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단명한 군주는 충목왕. 덕종을 포함해 5명의 군주가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 고령으로 즉위한 군주는 22대 강종(60세), 20대 신종(51세), 34대 공양왕(45세) 순이고, 최연소 즉위는 29대 충목왕(8세), 32대 우왕, 33대 창왕(9세), 14대 헌종(10세) 순이다.
  • 가장 많은 부인을 둔 군주는 태조 왕건(총 29명)이다. 또한 왕건은 가장 많은 아들을 둔 군주이기도 하다.(25명) 이는 다양한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략이었으며, 상당수 호족들이 먼저 자진해서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바쳐 혈연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 혼인 정략이 고려 초기 왕실 혼란의 원인으로 작용해 버렸다는 단점도 있었다.
  • 원 간섭기에는 거의 원 황실의 방계 가문쯤으로 전락해 버렸다. 원 간섭기에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라 하여 고려의 군주는 원나라 공주나 종친의 딸[64]을 정비로 삼아야 했는데, 이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고려-몽골 혼혈이고, 이 왕자가 군주가 되어 다시 원나라 공주나 종친의 딸과 결혼하면 이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는 고려 왕실의 피는 1/4밖에 남지 않는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 사실상 몽골인이나 다름 없어진다.
  • 실제 고려인의 피가 가장 희미한 군주는 1/4인 충숙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공민왕은 순수 고려인인 명덕태후 소생이라[65], 고려인의 피가 1/4뿐인 충숙왕보다 혈통상 훨씬 더 고려인에 가깝다.[66]
  • 태조, 혜종은 각각 신라, 태봉 출신으로 처음부터 고려 출신이 아니다. 정종, 광종은 후삼국시대의 고려에서 태어났다. 통일 고려에서 태어난 최초의 군주는 경종이다.
  • 옛 고려의 수도 개경이 현재의 북한땅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려 왕들은 북한 땅에 묻혀 있다. 단 4기의 왕릉만이 대한민국에 있는데 희종, 강종[67], 고종이 강화도에, 그리고 공양왕이 고양시(혹은 삼척시)에 묻혀 있다. 우왕과 창왕은 우창비왕설을 명분으로 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시해된 후 아예 능이 조성되지 않았고, 그 시신은 대충 처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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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왕조 및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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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89년에 발급된 보물 제2062호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에 찍힌 문양을 바탕으로 복원한 그림이다.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적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서 각각 자국이 만든 국인(印)을 고려의 군주에게 보냈으나 고려는 자체적으로 국새를 만들어 사용했다.[2] 황제라 칭함. 이에 따라 처음에는 없었던 묘호를 모두 추가.[3] 경종의 사촌 동생, 광종의 사위[4] 성종의 조카 겸 (법적)사위[5] 왕위를 계승할 유일한 용손[6] 생부는 안종이나 사통으로 태어난 사생아라 혜종의 법통을 계승함.[7] 헌종의 숙부, 헌종의 병약과 이자의의 난 진압으로 인한 계승[A] 원이 충선왕 때 강제 하사한 시호.[A] [B]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원나라의 속국이기 때문에 묘호를 받지 못했다.[C] 공민왕 6년에 추시된 고려 군주로서의 시호.[D] 원 제후로서의 시호.[B] [C] [D] [16] 몽골식 이름은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17] 장, 차자가 몽골 혈통이 아니라 계승 배제[B] [C] [D] [21] 몽골식 이름은 왕아라트나시리(王阿刺訥忒失里)[22] 왕이 장자를 죽여버려 차자가 계승.[B] [C] [D] [26] 몽골식 이름은 왕부다시리(王寶塔實里)[B] [C] [D] [30] 몽골식 이름은 왕바스마도르지(王八思麻朶兒只)[B] [D] [33] 원에서 내려준 시호 밖에 없다.[34] 몽골식 이름은 왕미스젠도르지(王迷思監朶兒只)[35] 원 간섭기에서 벗어났지만 아직까지 건재했던 원나라와의 마찰을 우려해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36]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추시된 고려 군주로서의 시호.[37] 명나라 제후로서의 시호.[38]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39] 충정왕의 숙부, 원 황실의 명에 의한 계승[C] 우왕과 창왕은 폐위됨과 동시에 신씨로 몰려 처형당했고 아예 왕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묘호와 시호 모두 없다.[41] 우왕이 유배된 지역을 따서 불려진 사시(私諡).[42]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신우', 창왕 또한 '신창'이라고 표기되어 <열전>의 끄트머리 반역조에 들어가 있는데 이는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주장을 이성계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단 현전하는 자료만 놓고 봐서는 진위 여부를 따지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 당시에도 이러한 공식 사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선비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우, 창왕을 <반역 열전>에 수록한 《고려사》 찬자들을 비판한 바 있고, 안정복은 이러한 스승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저술한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우, 창왕대를 각각 '폐왕 우', '폐왕 창'이라는 편명으로 다루며 군주 취급을 해줬다.[C] [44] 창왕을 따르는 신하들이 바쳤던 사시(私諡).[45] 고려가 멸망하여 묘호가 없다. 조선 조정에서 올려줬을 리도 없고...[46] 조선 왕조의 태종이 추시.[47] 물론 태조의 15남인 효은태자의 자손이 있었으나 효은태자가 광종 대에 반란 혐의로 처형을 당했던지라 사실상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린 상황이었다.[48] 국조는 정확한 이름이 뭔지 불분명하다.[49] 안경공이 영종이라는 묘호와 영종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이마저도 나중에 취소되었다.[50] 몽골식 이름은 왕타스테무르(王塔思帖木兒)[51] 기황후의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는 덕흥군 왕혜의 세자로 책봉.[52] 태조의 아들로 정종(定宗), 광종의 친동생. 경종의 2비 헌의왕후의 아버지. 《고려사》에는 봉증(封贈) 경위를 파악할 수 없다고 나왔다.[53] 왕기는 개성국공(開城國公)으로 봉작되었다가 평양공으로 옮겼으며, 양헌왕이 '조선국양헌왕'으로 불렸던 점 등으로 보아, 왕기의 최종 봉호는 '평양국정간왕(平壤國靖簡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4] 왕도의 차남 왕원묘지명 기준. 《고려사》에서 파악된 최종 봉작은 조선공(朝鮮公).[55] 이후 이성계는 수도가 개경이라 이런 꿈이 나타났다고 여겨 한성으로 옮긴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계승원칙을 고수한 조선보다 장자 계승 사례가 많았다는게 아이러니하다.[57] 고려는 조선보다 존속기간이 44년 더 짧은데 군주는 7명 더 많다.[58] 단 발해의 경우 대위해대인선 사이에 군주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59] 단 삼국시대 군주의 계보의 경우 왜곡이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고구려의 경우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대의 비정상적인 수명과 재위 기간 등을 근거로 보았을 때 추가적으로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백제 또한 마찬가지로 백제 초기 계보 역시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 기간으로 의심을 받는 편이고 신라 역시 초기 계보의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60] 목종, 의종, 충혜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61] 반면 조선의 왕들은 평균 45세 남짓으로 조금 앞선다, 그런데 고려의 왕들은 앞서 보았듯 제 명에 못 죽는 경우도 많았기에 피살당하거나 한 왕들이 제 명에 죽었다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62] 시해당한 군주들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시해당한 군주 7인 중 공민왕을 제외한 6인은 폐위되었다. 이들을 합치면 폐위 당한 군주는 10인에 달한다.[63] 더군다나 단명한 군주들 중 혜종이나 정종은 시해설이 뒤따르는 군주들이다. 이외에도 충혜왕 역시 정황상 원나라에 의해 사사된 것으로 보인다.[64] 제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종친의 딸을 고려로 시집보냈다.[65] 충숙왕몽골인 왕후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했기 때문.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았지만, 용산원자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66] 충혜왕과 공민왕이 5/8의 고려혈통을 가지고 있고, 충혜왕과 몽골인 덕녕공주 사이의 아들인 충목왕도 5/16의 고려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 충숙왕보다 고려 왕실의 피가 진하다.[67] 개경에서 사망했으나 강화도에 묻혔다. 다만 현재로선 능이 실전되었다.